삶을 고민하다/손가락 가는 대로

잃어버린 목소리

별아저씨의집 2018. 11. 11. 23:25
캘리포니아 산불로 오늘 관측을 또 망쳤습니다. 원격관측을 대기한 연구원들의 관측보고가 이메일로 날아왔는데 산불로 천문대 돔을 열지도 못했군요. 에고~ 역시 천문학은 아무나 하는 학문이 아닌거임.

어제 밤에 강의를 2시간 하고 왔는데 그 이후로 다시 목감기가 도지더니 오늘은 말을 할수가 없게 되었네요. 목소리가 안나오는 이런 경험은 평생 처음입니다. 속삭이듯 의사전달을 하니 아내가 우습답니다. 평소에 뭔 얘기를 해도 까르륵 거리는 제 아내 덕에 저의 유머 감각이 말이 아니게 되었으니 나는 그녀에게 언제나 우스운 존재가 아니었던감.

오늘 교회에서는 '건강한 작은 교회 연합'의 강단 교류로 더함교회에서 목사님이 오셔서 설교를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공유하는 속성과 공유하지 않는 속성이 있는데 우리는 자꾸 공유하지 않는 속성을 가지려 합니다. 가령, 바람을 다스리거나 미래를 예지하거나 공간을 초월하거나 그런 신비한 능력을 갖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하나님을 닮는 것이 아니랍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사랑하고 섬김을 닮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듣다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생각해 봤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형상은 비공유적 속성은 아니겠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어떤 신비한 능력을 주셨다는 말도 아니겠습니다. 하나님처럼 우리 인간이 뭐 그리 특별하다는 뜻도 아니겠슴다.

우리가 공유하는 하나님의 속성은 로보트처럼 정해진 대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의지를 가지고 목적을 가지고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자아를 가졌다는 점입니다. 그 자유의지로 선을 택하고 죄된 본성을 피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그를 대리할 존재로 하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머리가 아프고 몸은 으슬거려 교회의 그 맛있는 점심을 제끼고 집으로 왔습니다. 오는 길에 추어탕집에 들러 한그릇 먹었습니다. 옥천골 동동주라고 떡~하니 벽에 붙은 메뉴를 보고 아내를 꼬셔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감기라 안된답니다. 꿀꺽~

베리타스 포럼 때 썼던 강의안을 3배로 늘려 쓴 원고를 출판사로 보냈습니다. 강영안 교수님과 함께 내는 책으로 기획되었는데 여름에 거의 다 써둔 원고에 마무리 작업을 했습니다.

요즘 관심 가는 일은 유신론과 무신론을 비교하는 일입니다. 물론 과학은 이 두 세계관에 대해 어느쪽도 직접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C. S. 루이스나 알리스터 맥그라스의 관점처럼 혹은 앤소니 플루의 질문들 처럼 과학이 답하지 못하는 모든 형이상학적 질문들을 놓고 보았을 때 기독교 유신론은 무신론보다 훨씬 많은 것들에 답합니다. 설명력이 더 크다고 볼 수 있겠지요.

이런 비교가 직접적인 변증이 될 수는 없더라도 유용하고 필수적인 단계라는 생각입니다. 과학이 주는 걸림돌을 걷어낸 뒤에는 유신론과 무신론의 차이와 비교우위를 논리적으로 접근하는 일이 필요한 법입니다. 물론 그 다음에는 보다 경험적이고 계시적인 내용을 다뤄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반나절 원고 작업을 해서 보내고 나니 속이 시원합니다. 다시 읽어보니 궤변을 늘어놓은 건 아닌지, 과학을 넘어서는 철학적 주장들을 다루는 일은 오버가 아닌지, 염려가 되기도 합니다만 이미 베리타스 포럼에서 일은 저질렀고 책으로 마무리해야 할 숙제였으니까요.

이 책쓰기가 중간에 끼어들어서 뒤로 밀리게 된 과학글쓰기를 정상궤도에 올려야 겠습니다. 블랙홀교향곡 개정판 원고도 거의 되었는데 항상 마무리가 반이네요 ^^

내일 오전 수업을 잘 할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목소리를 낼 수 없다면 가르침은 불가능하겠지요? 이런 일을 겪어본 적이 없어서 예측불가입니다. 내일 아침 말짱하게 목소리가 나와야 수업도 하고 면담도 하고 저녁에 과신대 콜로퀴엄 대담 사회도 볼텐데 말입니다.

그래도 안되는 경험을 하니 목소리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처음 해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