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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월간 복음과상황에 지난 2003년 2월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복음과상황의 문맥 (다른 분들의 기고글들과 관련된) 에서 벗어나 제가 쓴 글만을 올려서 포커스에 오해가 있을 수도 있겠으나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 최근에 쓴 글은 아니지만 여전히 유효한 글이며 지적설계 운동에 대해 보다 균형 잡힌 시각이 전달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올립니다.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반론에 응답하여 두편의 글을 더 기고하였고 이 글과 함께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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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인간적인 '지적' 설계 (월간 복음과상황 2003년 2월호)

우종학

연세대학교와 대학원에서 천체물리학을 전공하고 현재 미국 예일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밝고 있다.

성실한 글읽기는 지적작업의 전제조건이다. 지적설계논증들은 기본이고 그에 대한 비판들까지 접하고 않고 하는 얘기는 일방적이기 되기 쉽다. 창조과학운동의 영향이겠지만 지적설계논증을 대하는 (그리스도인을 포함한) 과학자들의 태도는 무관심과 냉소로 이어졌다. 과학에 무지한 필립 존슨의 책들은 여전히 과학과 신앙을 양극화하여 과학을 정죄하는 창조과학자들의 비수를 담고 있었고, 마이클 베히의 저작을 비롯한 몇몇 책들은 20세기 과학의 패러다임을 바꿀 것처럼 매스컴을 탔지만 동료과학자들로부터 성급하고 손쉬운 설명이라는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서울대창조과학회의 김창환 형제가 '현존하는 가장 엄밀한 설명'이라고 표현한 윌리엄 뎀스키의 저작들도 일반인이 이해하기만 더 어려워졌지 무지에 호소하는 논증을 넘지 못한다. 하지만 젊은 PhD들의 참여와 더불어 각급 학교를 대상으로 자본과 조직력을 통해 지적설계운동이 전개되자, 신앙과 과학의 양극화를 우려한 많은 과학자들이 지적설계논증들의 문제점들을 본격적으로 분석, 비판하기 시작했다. 내가 일반인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대중적인 비판서로는 케니스 밀러의 '다윈의 신 찾기(Finding Darwin's God)'와 로버트 페녹의 '바벨탑(Tower of Babel)'그리고 리젠트대학에서 출판된 '다윈주의는 패배했는가?(Darwinism Defeated?)'등이다. 조금 더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지적설계운동가들과 비판가들 사이의 지상논쟁들을 인터넷에서 직접 받아 읽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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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글을 시작한 목적은 지적설계운동을 보는 한 그리스도인 과학자의 시각을 독자들에게 제시하는 것이었다. 첫 글에서는 지적설계운동이 창조과학이 받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음을 지적하였고, 두 번째 글을 통해서는 자연적인 설명의 가능성을 부정하여 설계를 입증하려고 하는 지적설계논증은 형이상학적 논증에 지나지 않음을 논했다. 이번에는 지적설계운동의 '지적'이라는 개념과 '설계'라는 개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윌리암 뎀스키의 설계논증을 검토하려한다.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은 내가 비판적 검토를 시도하는 것은 지적설계운동에 대한 서울대창조과학회나 GSF의 입장이 아니라 미국의 지적설계운동 자체라는 것이다. 물론 부족한 나의 글이 지적설계운동에 대한 바른 시각을 제시하는 일에 조금이나마 쓰여지기를 기도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다.

반쪽 짜리 설계 개념

지적설계논증의 핵심은 어떤 지적인 존재에 의해 설계되었음이 분명한 증거들이 자연계 안에 있다는 것이다. 즉 설계를 판정할 과학적 기준과 그 기준에 부합하는 자연현상들이 있다는 주장이다. 사실, 설계(디자인)라는 말은 매우 흔한 말이다. 그것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뭔가를 구상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좀더 확장하면 그 구상대로 뭔가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하지만 만드는 행위가 설계에 꼭 포함될 필요는 없다. 건축을 예로 든다면, 설계자는 어떤 집을 지을지 구상하지만 실제로 집을 짓는 사람은 시공자들이다. (반면, 장인은 무엇을 만들지 먼저 구상한 뒤에 본인이 손수 작품을 만들어 낸다.) 즉 완성품을 구상하는 지성의 작업은 설계에 필수적이지만, 직접 만들어 내는 손의 작업은 그렇지 않다. 신은 태양계를 설계했을까? 9개의 행성, 지구 주위를 아름답게 도는 달.... 나는 이 태양계가 깊고도 깊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을 통해 창조의 계획안에서 설계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뉴턴이 생각한 것처럼 신이 일일이 9개의 행성을 지금의 위치에 직접 배치했거나 주기적으로 행성의 궤도를 수정하고 있을까? 글쎄다. 나는 태양계에 대한 신의 계획(설계)은 태양이 만들어지고 9개의 행성이 잇따라 만들어진 자연적 과정을 통해 완벽하게 수행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설악산의 울산바위는 어떨까? 2002년 12월 현재, 설악산의 암벽들이 저렇게 아름답게 보이도록 설계한 신의 구상은 긴 세월의 풍화작용과 지표의 작용을 통해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지적설계운동에서 사용되는 설계개념은 이런 개념은 아니다. 하워드 반 틸이 비판한대로 지적설계운동에서 다루는 설계는 지성적 작업에 더하여 손으로 직접 만드는 일이 포함된 제한적인 설계이다. 다시 말하면 지적 존재가 직접 자연계 안에 개입하여 만든, 즉 자연적 과정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현상들을 설계의 대상으로 삼는다. 만일 태양계의 행성들이 어떻게 현재의 궤도에 놓여졌는지에 대한 자연적 설명이 불가능하다면 그래서 자연적인 과정이 아니라 신의 간섭을 통해 행성의 위치들이 결정되었다면 이것은 지적설계운동이 찾고자 하는 설계의 대상이 되는 셈이다. 만일 신이 진화메커니즘을 통해서 자연적으로 종이 분화되도록 생물계를 설계했다면, 즉 직접 간섭하는 일이 필요 없도록 설계했다면, 이것은 지적설계운동가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설계가 된다.

지적설계운동의 설계 개념이 반쪽자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리스도인은 자연적 방식으로 설명되는 현상들도 신의 설계로 인정할 수 있지만, 무신론자들은 결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무신론자들을 꺾기 위해 지적설계운동가들은 어쩔 수 없이 자연적 방식으로 설명되지 않는 현상, 즉 지성의 작업과 손의 작업이 모두 필요한 현상만을 설계 대상으로 삼는다. 하지만 이 전략은 창조과학의 전략과 마찬가지로, 자연적으로 설명되는 일에는 신이 필요 없다는 무신론자들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는 셈이며, 신앙과 과학이 양극화된 현재의 상황을 악화시킨다. 그나마 큰 희생을 통해서 붙잡은 반쪽자리 설계개념으로 지적설계의 과학적 증거를 제시하려는 시도가 성공한다면 위로가 되겠지만 그 길은 너무나 멀어 보인다.

뎀스키의 설명여과기-여전한 부정의 논리

지적설계논증들이 과학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논증이라는 점을 나는 지난 11월호의 글에서 단계별로 제시하였다. 예로 들었던 두 가지 논증 중에 하나는 사실 뎀스키를 염두에 둔 것이었지만 아마도 구체적인 설명이 더 필요한 것 같다. 김창환 형제는 다른 글들과는 달리 뎀스키의 '설계 추론(1998)'의 설계판정기준을 만족스럽게 보는 것 같지만 나는 그 역시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먼저 고백해야겠다. 기존의 창조과학자들의 방식처럼 뎀스키의 논증도 '어떤 현상을 자연적인 방식으로 설명할 수 없다면 그것은 설계된 것이다'라는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설명여과기로 요약되는 그의 '설계 추론'은 어떤 사건을 설명하는 세 가지 방식, 필연(당연히 일어날 일이 일어났다), 우연(여러 가지 가능한 일들 중에서 하나가 발생했다), 설계(어떤 지적 존재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일어났다) 중에서 필연과 우연을 차례차례 제거하여 설계를 추론한다. 하지만, 자연적인 방식(즉 필연과 우연)으로 설명될 가능성을 제거함으로써 설계를 추론하는 뎀스키의 부정의 논리는, 사실 설계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런 독립된 기준도 제시하지 못하며 다만 확률이 낮다는 이유로 필연과 우연의 가능성을 제거하는데 책의 대부분을 할애할 뿐이다. 어떤 사건이 우연에 의해 일어난 것인지 계획(설계)된 것인지를 판단하려면 관측된 사실을 바탕으로 우연일 가능성(likelihood)과 계획되었을 가능성을 비교하여 결정하여야 하지만 그의 추론에서는 설계의 가능성이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아주 심하게 말하자면, 뎀스키는 설계를 필연이나 우연으로 설명될 수 없는 모든 것으로 정의한 뒤에, 필연이나 우연으로 설명될 수 없는 사건은 설계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셈이다. 즉, 그의 설계 추론은 바로 자신의 설계의 정의 자체를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편리한, 그러면서도 여전히 반쪽자리인 뎀스키의 설계 개념을 가지고 설계에 대한 과학적 기준이 세워졌다고 과학자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지적설계운동가들은 뎀스키의 책 '설계 추론'을 유일하게 논문심사과정을 거친 것으로 내세우지만, 사실 이 책은 뎀스키 자신이 인정한 것처럼 과학철학계의 혹독한 비판을 받고 있다.

우연과 필연이라는 설명 카테고리는 과연 제거될 수 있을까?

그렇지만 논의를 위해 일단 뎀스키의 설명여과기를 받아들여보자. 설명여과기에 따르면, 확률이 높은 사건은 필연으로 설명되고 확률이 높지 않다면 필연으로 설명될 가능성이 제외된다. 동전을 던져서 앞이 나왔다면 이것은 확률이 높지 않은 (1/2) 사건이기 때문에 필연이 아니라 우연으로 설명된다. (즉 뒷면도 나올 수 있었는데 앞면이 나왔다.) 하지만 잘 따져보면 '앞뒤가 다른 동전을 던지면 반드시 앞이 나온다'라는 하나의 필연 가설이 제거되었을 뿐이다. 만일 그 동전의 양면이 똑같이 앞면으로만 되어 있었더라면 그 사건은 당연히 필연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확률이 높은 사건인지 아닌지는, 시험하려는 특정한 필연 가설(예를 들어 동전이 어떻게 생겼는지)에 기초해서 결정된다. 그 특정한 필연의 가설이 제거되었다고 해서 다른 모든 필연 가설들이 전부 제거 될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태양근처에서 빛이 휘어 별의 위치가 예측과 빗나가는 현상은 뉴턴의 법칙으로는 설명되지 않지만(즉 한가지 필연의 가설이 제거되지만), 이 현상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의해 필연으로 설명된다(즉 다른 필연의 가설에 의해 설명된다. 이 현상은 실제로 1919년에 상대론을 입증하는데 사용되었다). 우리의 배경지식을 통해서 몇 가지 필연 가설들을 배제할 수는 있다. 하지만 가능한 모든 필연 가설들을 제거할, 즉 필연이라는 설명의 카테고리 자체를 제거할 여과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연이냐 아니냐를 판정하는 설명여과기의 두 번째 단계에서도 뎀스키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어떤 사건이 우연으로 설명될 가능성을 제거하려면 모든 가능한 우연적인 과정들을 다 고려해야만 하며 이를 위해서는 전지(omniscience)가 필요하다. 확률이 낮다는 이유로 필연과 우연이라는 설명 카테고리 전체를 제거해 버리는 뎀스키의 논증은 매우 비약적이다.

특정한 복잡성으로 우연을 배제할 수 있는가?

역시 논의의 진행을 위해, 우연이 어떻게 제거되나 살펴보자. 그것은 특정한 복잡성(specified complexity)에 달려있다. 복잡한 정보나 특정한 정보는 각각 우연에 의해 설명될 수 있지만 특정하면서 동시에 복잡한 정보는 필연으로도 우연으로도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이 뎀스키의 논증의 핵심이다. 가령, 컴퓨터 화면에 '러낟사판ㄴㅇ란머러' 라는 글자가 찍혔다면, 이것은 복잡하긴 하지만 누가 자판을 아무렇게나 두드린 우연의 결과로 설명할 수 있다. 또한 '한글'이라는 글자가 찍혔다면 이것은 특정한 정보이긴 하지만 별로 복잡하지 않기 때문에 우연의 결과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만일 '뎀스키의 지적설계논증은 화려하지만 역시 무지에 호소하는 논증이다'라는 글자가 나열되었다면 이것은 특정하면서 동시에 복잡하기 때문에 우연히 발생했을 확률이 매우 낮으며 그래서 결국 설계임을 추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의할 점은, 뎀스키도 지적했듯이, 여기서 다루는 정보라는 개념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개념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인간의 설계물을 예로 들 경우에는 상당히 타당하게 들리지만, 대상이 자연현상일 때 뎀스키의 특정한 복잡성은 상당한 난관에 봉착한다. 우선 필연과 우연에 의해서 과연 특정한 복잡성이 만들어질 수 없을까? 생물학자들은 가능하다고 대답한다. '설계 추론'이 출판된 이후에 생물학자들은 진화알고리즘을 통해서 뎀스키의 특정한 복잡성이 만들어 질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뎀스키는 어쩔 수 없이 최근의 책 '공짜밥은 없다(No Free Lunch)에서 설명여과기를 수정해야했고, 그 책의 목적을 다윈주의의 방식으로는 특정한 복잡성을 설명할 수 없음을 보이는 것으로 삼았다. 역시 그의 논증은 진화알고리듬(필연과 우연을 통한 자연적 방식)으로는 특정한 복잡성이 만들어질 수 없음을 보이는 부정의 논리에 기초한다. 물론 생물학자들은 무신론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면 나는 더 이상 할말이 없다. 하지만 진지한 과학자들의 노력에 나는 손을 들어주겠다. 뎀스키는 아마도 특정한 복잡성을 설명하려는 모든 과학적 시도와 싸워야 할 것이다. 설혹 그가 향후 십 년 간 나오는 모든 과학이론들이 틀렸음을 보이는데 성공한다 할지라도 그의 설계는 여전히 보증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필연과 우연이라는 앞으로 나올 모든 가능한 설명들을 반박해야 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특정한 복잡성은 무엇일까?

역시 다시 한번, 특정한 복잡성이 발견되면 우연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있다고 양보해 보자. 뎀스키는 특정성과 복잡성은 각각 우연에 의해 만들어 질 수 있지만 동시에 특정하면서 복잡한 것은 설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과연 뎀스키가 말하는 특정한 복잡성은 뭘까? 그가 좋아하는 예는 외계지성체를 확인하는 패턴이다. 아무리 규칙적이거나 복잡한 신호라도 그것으로는 외계지성체의 메시지라는 것을 확증할 수 없지만 신호와는 독립된 어떤 패턴이 있다면, 가령 칼 세이건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칸택(Contact)'에서처럼 2,3,5,7,11..과 같이 소수가 차례로 나열된다면 이것은 외계지성체가 보낸 신호일 것이다. 누가 타자를 쳤는데 김소월의 진달래가 컴퓨터 화면에 배열되었다면 이것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의도(설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예들은 오히려 독자를 현혹시키는 작용을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도(설계)를 판단할 때는 지성의 작업으로 이미 알려져 있는 패턴(여기서는 소수와 김소월의 시)에 근거하여 판단할 수 있는 반면, 자연현상의 경우에는 지성의 작업으로 이미 규정된 패턴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DNA에 '하나님은 사랑이다'라는 패턴이 발견되거나 새로 발견된 전파은하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르스 신호를 보내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자연현상의 특정성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보다 좋은 뎀스키의 예로, 벽에 과녁을 그려놓고 화살을 쏘아 맞추는 경우와 벽에 화살을 쏜 후에 화살 주위에 과녁을 그리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전자의 경우는 독립된 특정성(과녁)이 미리 주어졌기 때문에 설계의 예가 되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나중에 그린 과녁이 벽에 이미 박힌 화살에 독립적이지 않기 때문에 설계의 예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과연, 자연현상의 경우, 독립된 특정성이 설계를 보증할까? 특정성이 우연에 의해 만들어 질 수 있고 복잡성도 우연에 의해 만들어 질 수 있는데 왜 특정한 복잡성은 우연에 의해 만들어 질 수 없는가? 가령, 어떤 사람은 무작위로 벽에 과녁을 그리고 어떤 사람은 무작위로 화살을 쏜다면, 과녁을 그린 위치에 우연히 화살이 맞는 그런 우연은 도대체 왜 불가능할까? 결국 뎀스키가 의지하는 것은 확률이 너무 작다는 점이다.

사실 뎀스키는 '설계 추론'이나 '지적 설계'에서 자신의 특정한 복잡성의 정의에 해당하는 자연현상의 예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단지 우주론의 미세-조절 현상이라든가 베히가 주장하는 환원불가능한 복잡성, 스티븐 마이어가 다룬 DNA염기서열 등을 그저 나열할 뿐이다. 뎀스키의 설명여과기를 다 받아들인다해도 그 여과기를 통과해 설계를 추론할 자연현상의 증거는 (아직) 없다. 더 큰 문제라면, 지성의 작업임을 확연히 보여줄 특정성이라는 것이나 그 특정성이 갖는 독립성을 판명할 과학적 기준이 세워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과녁 안에 박혀있는 화살을 누군가 발견했을 때 과녁을 그린 뒤에 화살을 쏜 것인지 화살을 쏜 뒤 과녁을 그린 것인지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아무리 양보해도 설계를 판정할 과학적 기준이 세워졌다는 말은 동의하기가 너무 어렵다.

지적설계논증의 확률계산은 오류다.

미국에서 911사태가 발생한지 1년 뒤인 지난 9월 11일, 뉴욕주의 3자리 수 복권의 당첨 번호는 911이었다. 다음날 동네신문에는 이것이 누군가의 조작이라는 논란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911이라는 번호가 당첨될 확률은 다른 모든 3자리 숫자가 당첨될 확률과 똑같지만, 911 태러사건의 1주년이 되는 9월 11일에 911이라는 특정한 (독립적으로 주어진 패턴을 갖는) 숫자가 당첨된 것은 누군가의 조작일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인터뷰에 응한 어느 통계학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어느 숫자가 당첨되건 간에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줄 거라고. 3자리 수는 충분히 복잡하기 않기 때문에 이 예는 우연에 의한 특정한 복잡성의 예가 될 수 없다며 누군가 반박할 수도 있겠다. 그럼 만일 911사태가 9시 5분 27초에 시작되었다고 치고, 그날 9자리 수 복권의 당첨번호가 911090527이었다면 어떨까? 그럼 이것은 누군가의 조작이 분명한 걸까? 글쎄다.

뎀스키의 논중은 결국 특정한 복잡성이 우연에 의해 만들어질 확률은 매우 작다는데 기초한다. 과학적 설명이 틀렸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창조과학자들은 확률의 논리를 많이 사용해 왔다. 가령, 최초의 생명체가 만들어질 확률은, 고물상을 휩쓸고 지나가는 토네이도에 의해 비행기가 만들어질 확률만큼이나 낮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창조과학자들의 확률계산의 오류는 과학자들 사이에서 잘 알려져 있으며 그것은 지적설계논증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우선 그들은 최초의 생명체나 특정한 복잡성이 발생할 확률을 단회적인 사건으로 기술하여 현저하게 작은 확률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누적적 선택과 같은 생물학적 설명을 단회적 사건으로 처리하는 것은 심각한 계산 오류다. 가령, 자연선택과 변이의 메커니즘은 토네이도와 같은 단회적 사건과는 거리가 멀다. 둘째, 복잡성이 만들어질 방식은 매우 다양한 반면 지적설계의 확률계산에서는 하나의 방식만을 고려한다. 가령, 단백질의 구조를 결정하는 것은 아미노산의 특정한 배열인데 아미노산이 특정하게 배열되는 방식은 사실 매우 다양할 수 있다. 진 폰드가 지적한 것처럼, 건초더미에서 하나의 바늘을 찾을 확률은 작지만 수많은 바늘 중에 하나를 찾을 확률은 그리 작지 않다. 이것은 우연에 근거한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한가지 방식을 특정화하는 지적설계논증의 심각한 오류이다. 다시 복권으로 돌아가 보자. 복권당첨 자체가 어려운 걸까? 아니다. 복권기계는 매일 한 번호를 당첨시킨다. 물론 내가 미리 산(선택한) 복권의 번호가 당첨될 번호와 일치할 확률은 매우 낮지만, 누군가는 분명히 복권에 당첨이 된다.

탐탁지 않은 개념, '지적' - 신의 자연화

지적설계논증에서 사용되는 '지적'이라는 개념은 매우 인간적인 개념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명백하게 지성의 작업임을 알 수 있는 예들은 모두 인간 혹은 고등동물의 작업들이며 우리가 실제로 이해하는 설계자들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실제로 생각해 낼 수 있는 설계는 바로 인간의 설계이다. 자연현상, 특히 생물학 현상의 설계를 논한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신의 능력이 아니라 인간의 능력으로 다룬다. 그래서 신은 신이 아니라 진짜 똑똑한 인간이 되어 버린다. 신은 하늘의 큰 시계공, 신적인 유전공학 기술자, 고성능화된 지성이 되어 버린다. 로버트 페녹은 이것을 "신의 자연화(naturalization)"라고 부른다. "지적설계운동가들은 신을 자연화해서 지적 설계를 추론하려고 시도하면서, 신을 기계의 일부로 만들고 있다."

설계 자체가 지적인 산물이기 때문에 지적 설계라는 말은 사실 그렇게 좋은 표현은 아니다. '지적'이라는 말이 붙여진 것은 사실 무신론적 생물학자들의 '외형적 설계'라는 말과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즉 설계처럼 보이는 구조들은 사실 겉보기만 그럴 뿐 진짜 설계가 아니라는 주장에 반하여, 이런 구조들은 실제로 지적인 존재의 설계라는 뜻을 담기 위해 '지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여졌다. 그러나 많은 과학자들처럼 나는 그런 구조들이 그저 외형적인 것인지 혹은 실제 지적인 존재의 작업인지를 판단할 과학적 기준은 없으며 그것은 오히려 형이상학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나가며

지적설계운동은 지적작업뿐만 아니라 문화운동이다. 창조과학운동과 마찬가지로 지적설계운동은 각급 학교에 들어가 자연주의에 기초한 과학의 패러다임이 바꿔야 한다는 인상적인(?) 강의들을 통해 아직 진정한 과학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학생들을 반진화론자들, 반과학주의자들로 만드는 일을 대규모로 벌이고 있다. 그리스도인 학생들로 하여금 생물학 분야를 아예 외면케 하는 일은 자연적 방식으로 현상을 설명하려는 과학자들의 노력을 총칼로 막는 것 보다 훨씬 더 무섭다. 자연적 방식으로 현상을 설명하려는 노력을 막는다는 발상이 어떻게 가능한지 모르겠다는 김창환 형제는 아마도 지적설계운동에 대해 너무 나이브한 시각을 갖고 있거나 혹은 미국의 지적설계운동가들에 비해 훨씬 바람직한 과학에 대한 시각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나는 후자이기를 바란다.

고등교육을 받았더라도 과학에 문외한인 사람들이 지적설계논증에 쉽게 설득될 수 있다는 것이 많은 과학자들의 우려이다. 그것은 지적설계논증들이 보다 세련되었으며 세부사항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오류를 발견하기 어렵다는데 있다. 아울러 전문적 과학지식을 이해하지 못한 채 떠들썩한 뉴스거리로 만들어 버리는 대중매체에도 커다란 책임이 있음도 지적되고 있다. 미국인의 반 이상이 60년대 아폴로 우주선들의 달착륙을 믿지 않는다는 충격적인 사실은 폭스방송사가 만든 다큐멘타리 프로그램에 기인한다.

지적설계운동을 과학자의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한 세 편의 글을 통해 나는 내가 다룰만한 얘기들 대부분을 담았다고 생각한다. 반론의 여러 가지 문제제기들은 내 글들을 통해서 설명되었거나 결국은 평행한 시각의 차이로 더 새롭게 설명할 필요는 없는 것들로 보여진다. 물론 다른 전문영역의 분들을 통해 마땅히 다뤄져야 할 중요한 이슈들이 계속 다뤄지기를 바란다. 결국 핵심적인 문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자연적인 방식으로) 신이 우주를 창조했는가라는 것이다. 아니라고 가정하는 지적설계운동가들이나 그렇다고 가정하는 하워드 반 틸과는 달리,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그저 우주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사람들일 뿐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필립 존슨이 지적설계운동의 핵심인물이라는 현실이 참 안타깝다. 하지만 보다 진지한 젊은 지적설계운동가들을 통해서 지적설계를 과학화하려는 노력이나 유신론적 전제가 가능한 과학을 세우려는 흐름 대신, 보다 건전한 운동이 전개되기를 희미하게 바랄 뿐이다. 그리고 한국의 많은 그리스도인들, 특히 그리스도인 과학자들 중에서 과학과 신앙의 양자택일의 상황을 바꾸어갈 사람들이 나오기를 나는 간절히 소망한다.

Posted by 별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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