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종교 이슈/창조-진화 논쟁

지적설계 운동 비판 1 - 지적설계 운동은 창조과학의 옷을 벗을 수 없다 (월간 복음과상황 2002년 8월)

별아저씨의집 2002. 8. 1. 16:00
이 글은 월간 복음과상황에 지난 2002년 8월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복음과상황의 문맥 (다른 분들의 기고글들과 관련된) 에서 벗어나 제가 쓴 글만을 올려서 포커스에 오해가 있을 수도 있겠으나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 최근에 쓴 글은 아니지만 여전히 유효한 글이며 지적설계 운동에 대해 보다 균형 잡힌 시각이 전달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올립니다.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반론에 응답하여 두편의 글을 더 기고하였고 이 글과 함께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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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설계 운동은 창조과학의 옷을 벗을 수 없다 (월간 복음과상황 2002년 8월호)

우종학

연세대학교와 대학원에서 천체물리학을 전공하고 현재 미국 예일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밝고 있다.

지난 복음과상황 7월호 표지의 '지적설계, 창조과학의 새로운 가면인가?'라는 제목을 보고 나는 얼마 전 인터넷을 통해 접했던 기독대학원생회(GSF)와 서울대창조과학연구회(SCR)의 공동포럼을 떠올렸다. 복상의 글을 펼쳐 읽고 나서는 이 공동포럼의 자료집을 웹에서 다운 받아 읽기 시작했다. 동료 대학원생들이 엮은 자료집이라 친근감이 가고 왠지 뿌듯했다. 더군다나 책을 번역하고 서평과 자료들을 만들어 내는 노력이 무척 감사하게 느껴졌다. 포럼 현장의 분위기가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서로 다른 의견들이 진지하게 오가는 모습은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복상 지면에 실린 내용과 자료집을 검토해 본 결과 몇 가지 중요한 부분이 간과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토론을 풍성하게 싶다는 의도로 글을 쓰게 되었다.

두가지 흔한 오해

지적설계운동에 대해 본격적으로 나누기 전에 먼저 다뤄야만 할 내용이 있다. 그것은 과학에 몸담고 있지 않은 (그리스도인을 포함하여) 사람들이 과학에 대해 흔히 갖는 두 가지 오해에 관한 것이다. 첫 번째는 기독교를 믿으려면 창조과학의 입장을 취해야만 한다는 오해인데 이 입장은 지구의 나이를 만년 정도로 보거나(젊은지구론) 혹은 지구의 나이는 45억 년 정도 되더라도 진화이론은 부정해야 한다는(오랜지구론) 견해를 취한다. 이런 오해는 진화이론(evolutionary theory)과 무신론을 동등한 말로 취급한 두 부류의 사람들의 노력(?)의 결과로 볼 수 있다. 그중 한 부류는 진화라는 자연스런 방식으로 종의 기원을 설명할 수 있게되면 무신론이 유신론을 무너뜨리게 될 것이라고 착각하는 무신론의 전도사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진화론을 따르는 과학자들을 적으로 삼아 진화이론이 틀렸음을 증명하면 무신론이 무너질 거라고 믿는 창조과학자들이다. 이 둘 사이의 싸움이 낳은 진정한 피해자는 과학을 폐기 처분해 버린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신앙을 폐기 처분해 버린 많은 세상사람들이다. 아울러서 무신론자도 창조과학자도 아닌 다수의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한) 과학자들도 이 싸움의 피해자라면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창조과학의 입장만이 유일하게 알려졌던 한국에 이제는 조금씩 다른 기독교적 입장들이 소개되고 있어서 무척 다행이다. 하나님께서 진화라는 방법을 사용하셔서 생물들을 창조하셨다고 보는 유신론적 진화론의 입장과,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는가 하는 문제는 과학이 다룰 문제일 뿐 창조주 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는 무관하다고 보는 상호독립(independence)의 입장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보다 더 숙고해 볼 필요가 있는 견해들이다. 특히 과학과 신앙을 각각 다른 활동 영역으로 보는 상호독립의 입장은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되었고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 과학자들이 지지하는 견해이지만 상대적으로 별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나는 이런 지적 성실성을 갖는 견해들의 내용뿐만 아니라, 무신론이 아닌 진화이론을 아무 문제없이 받아들이지만 누구보다도 신실한 그리스도인들과 그리스도인 과학자들의 삶을 통해서도 한국기독교계의 좁은 시각과 편견이 다소 열리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두 번째의 흔한 오해는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자연주의자이며 따라서 무신론자라는 생각이다. 자연주의(naturalism)는 자연이 존재하는 모든 것이라는 세계관으로 초월적 창조주의 존재를 배제한다. 그러나 과연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자연주의자일까?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신이 없다고 믿고 있을까? 과학자들은 자연적인 방식(natural process)으로 현상을 설명하는 사람들이다. 지구의 오존층이 왜 파괴되는지, 올 여름에는 모기가 왜 많이 발생하는지, 생명체는 어떻게 형성되는지.... 이렇게 자연적인 설명을 시도하는 일을 무신론적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기가 어떻게 성장하는가라는 질문에 모유와 수면과 운동을 통해 자란다고 대답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이를 자라게 하신다는 믿음과 대립되는 것일까? 물론 근대과학이 성립되면서 대부분의 자연현상을 자연적인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됨에 따라 무신론적 사고가 팽배해졌다는 지적을 무시하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무신론적 사고가 팽배해 진다는 이유 때문에, 어떤 현상을 자연적으로 설명하는 일 자체를 무신론적 활동으로 취급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나님은 10가지 기적을 통해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셨지만, 야곱의 열두 아들의 갈등과 준비된 요셉 그리고 가나안의 기근을 통해서 (자연적인 방식으로도)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애굽 땅으로 이주시켜 거대한 민족을 이루게 하셨다. 자연적인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는 일들도 다 하나님이 하신 일들이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자연주의를 신봉하는 무신론자라기보다는 과학이 다룰 수 있는 대상들만을 (자연적 설명이 가능한 대상들만을) 진리의 영역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다. 과학활동만을 가지고 그들이 유신론자인지 무신론자인지 분별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 여부를 막론하고 지구는 똑같이 태양주위를 돌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과학이 다룰 수 없는 초자연적인 영역에 대해서는 유신론적 신앙을 가진 과학자들이 있는가 하면 자연주의 신앙을 가진 과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많은 과학자들이 초자연적 영역에 대해서 불가지론적 입장을 취한다. 과학이 신의 존재를 증명했다거나 부정했다는 말은 대부분의 과학자들에게는 의미가 없다. 그것은 그들 대부분이 과학에 그 정도의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며 적어도 초자연적 영역은 과학의 대상이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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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과학을 넘어서는 지적설계운동

최근에 번역된 책들을 통해 이슈가 되고 있는 지적설계운동은 여러 가지 면에서 기존의 창조과학보다 앞선 면모를 보인다. 우선 진화론을 받아들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의심하거나 재고의 가치가 없는 비과학적인 내용을 과학의 이름으로 포장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혔던 기존의 창조과학과는 달리, 지적설계운동가들은 진화론을 제외한 대부분의 과학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성경해석에 있어서도 그렇게 교조적이지 않아서 진화론도 성경해석과는 부딪히지 않는다고 본다. 즉 하나님께서 진화의 방법을 통해서 생물들을 창조하셨을 수도 있다는 점을 이들은 인정한다. 이들이 진화이론을 반대하는 진짜 이유는 진화이론이 과학적으로 충분히 뒷받침되기 보다 자연주의 세계관에 의해 전제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지적설계운동의 핵심 인물인 필립 존슨은 '창조진화에 대한 세가지 견해'(IVP)의 결론에서 젊은지구론이 갖는 과학적 문제들과 오랜지구론이 갖는 석연치 않은 점(수십억 년이나 되는 지구역사의 여러 시점에서 창조사역을 덧붙이기 위해 하나님이 지구역사에 개입한다는 점)을 인정하는 한편, 유신론적 진화론은 증거가 아니라 전제하고 있는 철학에 근거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결론 내리면서, 결국 '나는 모르겠다'는 고백을 뱉는다. 또한 역시 핵심인물인 마이클 베히는 모든 생물의 공통조상이라는 개념을 의심할 특별한 이유를 알지 못한다고 밝힌다. 즉 지적설계운동가들은 창조과학자들에 비해 과학과 성경에 대해 훨씬 열려있는 자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둘째로 지적설계운동은 기존의 창조과학과는 달리 학문적 깊이를 갖는다. 예를 들어 정보이론을 사용하는 윌리암 뎀스키의 설계논증들은 설계로 귀결되지 않는 다른 이론들의 반대에 부딪히기는 하지만 매우 설득력 있게 제시된다. 물론 이들의 학문적 노력이 창조과학과 다른 어떤 열매를 맺게 될 것인가는 더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셋째로 이들은 설계논증을 통해 하나님을 증명하려 했던 자연신학(natural theology)의 한계를 어느 정도 극복하려는 의지를 보인다. 즉 자연계 안에 지적 설계자의 흔적이 있음을 증명하려 할뿐 그 설계의 흔적을 가지고 성경을 증명하려 한다거나 유신론적 변증에 사용하려는 의도들을 피하고 있다. 설계논증을 통해 밝혀낸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지적설계자를 기독교의 하나님으로 증명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이들은 자연신학의 실수를 통해서 잘 알고 있는 듯 하다.

지적설계는 여전히 창조과학의 옷을 입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지적설계운동은 여전히 창조과학이 갖는 근본적인 한계를 안고 있다. 지적설계운동이 창조과학과 마찬가지로 비판받는 주된 이유는 먼저, 자연적 방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찾아내어 이것을 설계논증에 사용하려는 전략 때문이다. 마이클 베히는 눈과 같은 기관은 진화라는 자연적인 방식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환원불가능한 복잡성(irreducible complexity)을 갖기 때문에 지적설계의 흔적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논증은 창조과학의 전통적 접근방식과 일치하는데 그것은 바로 자연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빈틈을 초자연적인 신의 작품으로 돌리는 방식이다. 문제는 차후에 과학이 발전하여 설명할 수 없었던 그 빈틈을 자연적인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면 신의 영역은 점점 더 줄어둘 수밖에 없다는데 있다. 이러한 전략은 과학자들에게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데 그 이유는 과학은 자연적인 방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대상들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리스도인 과학자에게 이러한 전략은 유감스럽기 그지없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의 오묘함을 기껏 연구하여 설명해 낼 때마다 오히려 무신론자들에게 빼앗기는 것처럼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 과학자들이 오히려 해야할 일은 자연적인 설명이 가능한 우주의 영역들을 신의 작품으로 해석하고 이를 알리는 일이다. 자연적으로 설명되니까 신은 없는 거라고 외치는 무신론자들에게 짓눌려서 자연적인 설명이 불가능한 현상을 찾아 헤매기보다는, 오히려 무신론자들이 탈취해간 영역-자연적인 설명이 가능한 영역-들을 당당하게 하나님의 주권아래 되찾아 오는 일들을 해야 한다. 천체물리를 공부하는 나는 자연적인 방식으로 (아직) 설명되지 않는 우주의 시작, 빅뱅(Big Bang)의 원인을 신에게 돌리는 일보다는 자연적인 방식으로 설명이 가능한 별들의 탄생, 거대한 은하들과 블랙홀, 우주의 거대구조를 하나님의 작품으로 돌리는 일을 하고 싶다. 물론 하나님의 초월적 역사를 배제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빼앗기기로 예정된 게임의 법칙을 거부하고 빼앗긴 영역을 회복하자는 얘기를 하는 것이다.

지적설계운동이 창조과학으로 비판받는 두 번째 이유는 지적설계논증이 과학 '게임'의 규칙에 적합하지 않다는데 있다. 과학이론은 반증가능(falsifiable) 해야한다. 즉 어떤 이론을 제시할 때 그것이 틀렸음을 증명할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 틀릴 가능성이 없는 이론은 과학이론이 아니다. 지적설계논증은 과연 반증가능할까? 지적설계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를 찾을 가능성이 있는가? 혹자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눈과 같은 기관이 설계의 흔적이 된다는 지적설계의 논리를 역으로 해서, 모든 것이 자연적인 방식으로 설명 가능하면 지적설계가 반증되는 것이 아니냐고. 그럴 듯 하지만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지적설계자가 초자연적 방식으로만 일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시고 움직이시는 방식은 자연적이기도 하고 초자연적이기도 하다. 무신론자들은 모든 것을 자연적인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으면 무신론이 증명되는 것처럼 착각하지만 사실 무신론이 이길 가능성, 즉 유신론이 반증될 가능성은 없다. 그것은 유신론이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적설계논증 자체에 과학적 의미는 별로 없는 셈이다. 물론 지적설계의 흔적을 찾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말은 아니다. 나는 거대한 천체의 대상들을 보면서 저런 구조들의 배후에 초월적인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의심해 본 일이 없다. 자연적인 설명이 가능한 현상들로부터도 얼마든지 지적설계자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확신이 천체물리학이 다룰 내용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축구경기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왜 축구공이 이 방향 저 방향으로 움직이는지 따져볼 수 있다. 공을 차는 각도와 힘을 계산하고 바람의 방향과 공의 무게를 계산해서 공의 움직임을 자연적인 방식으로 추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축구공이 골문 안으로 날아 들어가는 다른 이유는 축구선수들이 열심히 축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이 왜 저렇게 움직이는가에 대한 이 두 대답은 각기 다른 영역에 속한다.

지적설계운동에 대한 세 번째 비판은 비판이라기보다는 의구심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만일 지적설계논증을 뛰어나게 잘 해냈다고 상상해 보자.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고 가정해 보자. 자 그렇다면 다음단계는 무엇일까? 지적설계의 다른 흔적들을 지속적으로 찾는 일이 될까? 과학은 설명불가능한 일들에 끊임없이 도전하여 자연적인 설명을 시도하는 일을 한다. 지적설계의 논리에 따르면 과학은 지적설계가 논증된 그 자리에 멈춰서야 하거나 혹은 이제 초자연적인 설명을 시도하는 일을 해야한다. 사람의 눈이 환원불가능한 복잡성을 갖기 때문에 자연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음이 증명되었다고 치자. 그래서 이 눈은 지적설계자가 어떤 초자연적 방식으로 만든 것임이 분명하게 밝혀졌다고 하자.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 자연적인 설명이 불가능하니 기존의 과학이 할 일은 전혀 없고 그러면 지적설계자가 어떻게 눈이라는 기관을 초자연적으로 만들었는가를 연구해보자는 것인가? 이런 점에서 지적설계운동은 창조과학에 가해지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지적설계운동가들이 원하는 일이 과학을 변화시켜 초자연적인 현상을 다루게 만드는 것이라면 그들은 새로운 학문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런 학문이 가능할 것인지도 의문스럽지만 기존의 과학은 과학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과학이 다루어야 할 많은 자연적인 현상들이 우리에게 아직 남겨져 있기 때문이다. 지적설계운동가들은 현대과학이 자연주의에 물들어 신을 배제하고 과학을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런 표현은 많은 과학자들을 불편하게 한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신을 배제하고 과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과학으로 다룰 수 있는 영역까지를 다룰 뿐이다. 과학이 신을 배제하라는 규범(prescription)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그저 자연적 설명이 가능한 영역을 과학이 다루는 것(description)이라는 생각을 많은 과학자들이 공유하고 있다. '유신론적 전제를 포기하지 않는 과학이 가능하다'는 프로파간다가 그리스도인 과학자들에게 정말로 화두를 던져주는 것일까? 혹은 과학에 몸담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또 다른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일까? "우리가 언제 유신론적 전제를 포기한 일이 있기나 합니까?"라고 그리스도인 과학자들이 되묻는다면 그들은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지적설계운동에 대한 비판이 기독지성에게 던지는 화두

지적설계운동가들이 '자연의 본성'이라는 주제로 2000년에 주최했던 컨퍼런스는 사실 그들이 의도한 만큼 썩 효과적이지는 못했다는 후문이다. 그해 가을에 예일대학에서 열렸던 '과학과 우주 안의 설계의 증거'라는 주제의 심포지움에 나는 삼일을 거의 꼬박 참석한 경험이 있다. 지적설계운동의 주요인물들이 대거 참여했던 이 심포지움은 대중들에게는 설득력 있었지만 참여했던 각 분야의 과학자들에게는 별로 호소력이 없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잘해야 본전이다라는 느낌은 성급하고 지나친 판단일까?

지적설계운동에 대한 비판이 한국의 기독교지성에게 던지는 화두는 기독교적 과학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지적설계운동가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유신론적 전제를 배제하던 과학을 넘어서서 유신론적 전제로부터 시작하는 과학이 기독교적 과학일까? 그렇다면 과학의 객관성과 보편성은 서로 다른 전제를 가진 과학자 사이에서 깨지게 될까? 그리스도인이 수행한 실험의 결과는 힌두교인에 의해서 재현될 수 있어야 한다. 도대체 유신론적 전제를 갖는 과학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외람 되겠지만 나는 그런 의미의 기독교적 과학은 없다고 생각한다. 놀랍게도 정교한 우주와 경이로운 생명체들의 세계가 법칙과 기능에 따라 자연적으로 움직인다는 것보다 더 창조주의 탁월함과 전능함을 보여주는 것이 있을까? 사실 과학은 탄탄한 신학적 토대 위에 서있다. 물론 과학의 영역에서 회복되어야 할 하나님의 주권은 분명히 존재한다. 무신론자들에게 빼앗긴 과학을 되찾아 오는 일도 필요하다. 과학의 결과들을 무신론의 증거로 해석하는 자연주의의 전도사들에게 맞서서 창조주 하나님의 아름다운 피조물들을 그분의 것으로 선포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 자체라기보다는 과학을 해석하는 일이다. 과학을 하는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신앙과 학문의 통합은 학문연구의 수준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그의 세계관에서, 그 연구를 수행하는 동기와 자세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남들이 자신의 미래를 위해 잘 나가는 연구분야를 선택하고 좋은 지위를 얻기 위해 논문 숫자에 급급할 때, 이 땅에 나그네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며 선한 청지기로서 그분이 만드신 우주를 성실하고 정직하게 연구해 가는, 포도나무 되신 그리스도에게 가지로 연결된 그리스도인 과학자가 하는 과학은 본질적으로 신앙과 학문이 통합된 과학이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그 학문의 결과를 가지고 세상사람들을 섬길 책임이 주어져 있다.

하나님이 자연적인 방식과 초자연적인 방식 모두를 사용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자연적인 세계에만 묶어둘 필요는 없다. 그런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지적설계운동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적설계논증을 과학화하려는 노력이나 더 나아가 기존의 학문의 패러다임을 바꿔서 유신론적 전제가 가능한 과학을 만들겠다는 의도는 지적설계운동이 창조과학의 다른 얼굴이거나 적어도 창조과학의 옷을 벗을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낳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