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종학의 글과 칼럼

[글] 숭실대 지식인포럼: 현대사회 기독인 과학자의 책임

별아저씨의집 2013. 12. 4. 11:44

현대사회 기독인 과학자의 책임 -(주1)


우종학(서울대)



들어가는 말


현대는 과학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눈부시게 발전한 과학을 통해 현대인들은 매일의 삶에서 수많은 문명적 혜택을 누릴 뿐만 아니라 경험적 증거와 논리적 추론에 근거한 과학적 사고방식에 따라 의사결정을 하는 일에 익숙해졌다. 과학적 증거는 정치, 사회, 개인의 영역에서 중요한 기준이 되었으며, 과학은 현대인들이 자신의 인생을 읽고 해석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일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과학의 시대이니 만큼 과학을 등에 업은 무신론의 공격도 맹렬하다. '만들어진 신'의 저자인 생물학자 리차드 도킨스는 과학주의를 바탕으로 기독교를 공격하는 무신론자들과 함께 21세기 판 과학주의적 무신론을 대변한다. '지식인선교 포럼'에서 다루어야 할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는 분명, 지식인 선교의 방해물이 무엇인지 진단하고 대책을 논하는 것이다. 과학시대인 현대사회에서 과학이 바로 그 방해물이라는 사실은 매우 안타까운 현실을 반영한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창조세계를 다루는 과학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반계시로서의 과학을 수용하지 못하는 기독교인들의 태도와 올바른 정보와 해석을 제공해 주지 못한 기독인 과학자들과 신학자들에게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1. 일반계시로서의 과학에 대한 수용을 역설하고 2. 이를 위한 건전한 창조신학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3. 한국사회에서 기독교인 과학자들의 실천방안을 논한다. 




1. 일반계시로서의 (자연)과학 - (주 2)


과학은 자연현상의 원리를 규명하는 학문이다. 과학을 통해 자연현상의 인과관계가 밝혀지면서 산신령이나 용왕님 등 어떤 신적 존재의 활동으로서 자연현상을 이해했던 미신적 믿음이 깨지고 자연현상은 탈신화화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과학은 자연세계만을 존재하는 모든 것이라 여기고 초자연적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으로 귀결되는 징검다리가 되기도 한다. 그런 이유에서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과학에 무신론의 혐의를 씌우고 의심의 눈초리도 과학을 대한다. 그러나 자연현상의 탈신화화가 필연적으로 무신론에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산신령에 대한 미신적인 믿음은 제거할 수 있지만, 자연법칙에 따라 우주를 창조하고 섭리하는 창조주를 배제할 근거는 과학에 없기 때문이다. 자연현상의 인과관계를 과학이 밝힌다고 해서 무신론이 되지는 않는다. 


과학을 자연주의에 물든 타락한 학문으로 보는 견해는 일반계시로서의 과학의 위상을 훼손하며 오히려 과학을 복음진보의 장애물로 만든다. 자연세계는 창조주가 부여한 자연법칙들을 통해서 창조되어왔고 그리스 신화의 신들이 자연세계에 마구 개입하는 변덕스런 방식이 아닌, 창조주의 본성에 부합되는 합리적인 방식으로, 끊임없는 인과관계의 패턴으로 운행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세계의 인과관계를 밝히는 과학은 창조주가 부여한 자연세계의 원리들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물론 자연현상 자체는 누가 그 현상의 주인인가를 직접 말해주지 않기 때문에 과학 혹은 자연 자체만을 통해서 직접 신에게 도달하려는 노력이 헛되다는 것은 자연신학에 대한 비판을 통해 이미 경고된 바 있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보면, 과학을 통해 밝혀지는 자연세계에 대한 풍성한 지식들은 성경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지식과 더불어 창조주와 창조세계를 더 넓고 깊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며 그런 의미에서 과학은 오히려 우리의 신앙에 새로운 시각과 풍성함을 더해줄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과학을 비판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방법론적 자연주의(methodological naturalism) 때문이다. 신을 배제하고 자연 안에서만 원인을 찾는 자연주의가 르네상스 시대 이후로 학문의 세계를 지배하고 무신론적 세계관을 퍼트리는 주범이라고 많은 기독학자들이 지적한다. 자연주의적 방법론(혹은 방법론적 자연주의)은 어떤 현상이 있을 때 자연적인 원인을 찾아 그 인과관계를 밝히는 것이다. 가령, 설악산에서 흔들바위를 발견한다면 흔들바위의 생성원인으로서 풍화작용과 같은 자연적 원인을 탐구하는 것이며 천사가 밤에 내려와 바위를 깎았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초월적 원인은 배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에서 사용되는 자연주의적 방법론 자체를 비판하거나 기독인 과학자들이 자연주의에 물들어 자연주의적 방법론을 취한다고 비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과연 창조주는  어떤 방식으로 우주를 창조했는가? 창조주는 지금도 태평양에 새로운 섬들을 그리고 우주에 수많은 별들을 새롭게 창조하고 있다. 천사라는 에이전트를 통해서 기적적으로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원인들을 통해서 창조하고 있다면, 그 인과관계에 따라 자연현상을 밝히는 일은 즉, 자연주의적 방법론은 창조세계를 연구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이다. 기독인 과학자들이 신을 배제하고 과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창조주가 자연적 인과관계에 따라 우주를 창조했다고 보기 때문에 자연주의적 방법론을 취하여 자연세계를 연구하는 것이다. 



자연적 인과관계만을 고집한다는 점이 비판되기도 한다. 초자연적인 방식의 창조를 제한한다는 비판이다. 물론 창조주는 자연적 방식이든 초자연적 방식이든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창조할 수 있는 전능함을 갖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어떻게 창조했는가의 문제는 신학적으로 답하기 쉽지 않다. 과연 창조주는 137억년이라고 하는 우주의 역사, 즉 긴 창조의 과정동안, 자연계에 직접 개입해서 창조했을까 (개입론 interventionism)? 현재 창조되고 있는 것들, 가령 마그마가 흘러넘쳐 새로운 지형과 섬이 창조되거나 정자와 난자가 합해 새로운 생명이 탄생되는 일 등을 보면 창조주가 모든 것을 기적으로만 창조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면 창조주는 자연계에 직접 개입해서 창조하지는 않는가 (비개입론 non-interventionism)? 비개입론에 비해 개입론은 불완전하고 열등해 보인다. 자연적인 인과관계를 통해서 창조하는 과정 중간에 초자연적 방식의 창조를 가끔씩 병행해야 하는 창조모델은 그런 개입이 필요 없는 창조의 모델에 비해서 덜 완벽해 보인다. 하나님의 창조는 앞으로 나무로 성장할 씨앗을 창조하신 것이라는 성 어거스틴의 견해도 비개입론으로 볼 수 있다. 씨앗이 자연적 과정에 따라 나무가 되듯이 하나님의 창조계획은 자연적 인과관계를 통해 하나씩 구현된다는 창조의 그림이다.  -(주3) 


방법론적 자연주의에 대한 비판이 지나친 둘째 이유는 과학의 정의자체를 공격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창조주가 자연적 인과관계를 넘어서는 기적의 방법을 사용해서 창조를 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렇게 창조된 자연현상은 과학이 다룰 수 없다. 과학은 자연주의적 방법론을 취하기 때문에 인과관계를 규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것, 즉 창조주의 직접적인 개입을 다룰 능력이 없다. 물론 이 문제에 대해서는 과학의 범주를 어디까지로 볼 것인가의 문제와 자연주의적 방법론을 넘어서는 새로운 과학이 가능한가와 같은 다양한 논의가 필요하지만, 최소한 경험적 증거에 기초하는 현대과학이 다룰 내용이 아니라는 점은 명백하다. 이런 점에서 최근 지적설계운동에서 과학이라고 제시되는 설계논증들을 과학자들은 나쁜 과학이라고 비판한다.


이런 두 가지 측면 때문에 과학에서 사용하는 자연주의적 방법론 자체를 비판하는 것은 부당하며, 아울러 자연주의 방법론을 통해서 과학이 밝혀낸 결론들을 정죄하거나 폄하하는 일은 옳지 않다. 하나님의 창조활동을 자연적 인과관계로만 제한하여 비개입론을 고집하거나 혹은 반드시 기적적인 방법을 사용하셨다고 보고 개입론을 고집하기 보다 열린 태도를 갖는 것이 바람직하다. 창조의 방식을 미리 제한하지 않고 자연적 (과학적) 설명이 가능한지 밝히기 위해 노력하는 태도가 기독인 과학자들이 취할 바람직한 태도라 할 수 있다.




2. 건전한 창조신학의 부재



현대과학이 제시하는 우주의 역사는 얼핏 보기에 기독교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기도 한다. 우선 지구와 우주의 나이에 관한 논쟁을 보자. 지구의 나이가 46억 년이고 우주의 나이가 138억 년 되었다는 것은 과학계에서 정설이며 이것은 창조역사가 매우 길었음을 의미한다. 반면 창세기 1,2장을 문자적으로 보면 마치 창조가 매우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것으로 읽힌다. 특히 젊은지구론(young-earth creationism)자들은 천문학의 대폭발우주론이나 지질학의 연대이론들을 부정하는 대신, 성경을 토대로 지구의 나이를 만년 정도라고 주장한다. 노아 시대에 있었던 전-지구적 홍수를 통해 현재 우리가 관찰하는 지층과 같은 지질 현상이 한꺼번에 만들어졌다는 홍수지질학을 근간으로 하는 젊은지구론을 과학계에서는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둘째, 생물진화를 살펴보자. 생물들이 아주 긴 시간동안 점점 덜 복잡한 생명체로부터 더 복잡한 생명체로 변해왔다는 생물진화는 과학계의 정설이며 생물진화이론은 과연 이 진화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그 인과관계를 밝히는 학문이다. 생물진화이론의 과학적 엄밀성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공통조상에서 부터 생물들이 분화해서 나왔다는 진화는 과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사실로 받아들인다. 반면, 진화라는 개념 자체는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큰 걸림돌이 된다. 과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와는 다르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진화에 대해서 반감을 갖고 있으며 진화라는 말을 공산당이라는 말처럼 부정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런 과학계의 일방적인 결론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독교인들(가령, 미국인의 약50% 정도)은 여전히 창조가 약 만 년 전에 있었고 생물들은 진화과정 없이 현재 모습 그대로 창조되었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이런 비과학적인 견해로 인해서 기독교인들은 반과학적이며 비이성적 집단이라는 낙인이 찍혀있다. 이런 안타까운 현실의 역사적 원인으로는 미국 창조과학회를 중심으로 한 반진화 운동을 꼽을 수 있다.  안식교에 뿌리를 둔 창조과학운동의 가장 큰 문제는 극단적인 문자주의이다. 복음주의 신학의 다양한 견해를 볼 때 분명한 것은 극단적인 문자주의 만이 유일한 해석은 아니다. 창조기사 해석에 대한 극단적인 경직성은 오히려 과학을 두려워하고 복음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더 근원적인 이유는 바로 건전한 창조신학과 균형 잡힌 교육의 부재에서 찾을 수 있다. 새롭게 제시된 우주나 생물의 역사를 통해 창조신학이 풍성하게 확대되거나 생물의 역사에 대한 신학적 재해석을 통해 창조의 그림이 새롭게 제시되는 일은 별로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생물진화이론을 수용할 때 제기되는 다양한 문제들, 가령, 원죄, 아담과 하와, 타락 이전의 죽음, 적자생존에 대한 반감 등을 신학적으로 다루어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갈등을 해소하려는 적극적 노력도 부족했다. 그렇기 때문에 생물진화는 반기독교적이라는 등식이 창조과학운동과 같은 반진화운동을 통해서 지역교회들에 퍼져나갈 때 신학은 별로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 문제는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여전히 주일학교에서 젊은지구론과 같은 극단적 문자주의에 기초한 반과학적인 창조의 모델들이 가르쳐지고 있으며 이는 현대과학을 배우는 청소년들에게 과학과 신앙이 모순된다는 잘못된 견해를 심어주고 과학과 신앙 중에 양자택일 강요하며 결국 수많은 지성인들을 복음의 길로 들어오지 못하게 방해한다.


창조-진화 논쟁의 역사가 없었다면 우주의 역사나 생물진화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우주와 생물이 어떻게 진화해 왔는지 그 인과관계를 잘 밝혀낸 우주론이나  생물진화 이론도 창조주의 창조와 섭리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으로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창조주가 자연적 인과관계, 즉 진화를 사용하여 수억 년에 걸쳐 다양한 종들을 창조한 것으로 본다면, 그 과정을 밝혀내는 생물진화이론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이유는 건전한 창조신학의 부재뿐만 아니라 과학적 무신론의 도전이 있기 때문이다. 인과관계를 밝혀낸 과학의 결과들이 중립적으로만 사용되지는 않는다. 종교에 적대적인 무신론 과학자들은 다양한 과학에서 도출된 결론들을 가지고 유신론을 공격하고 무신론을 설파한다. 가령, '지구는 신에 의해서 만 년전에 창조된 것이 아니라 중력에 의해서 46억 년 전에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기독교 유신론은 틀렸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생물의 기원도 마찬가지로 신이 창조가 아니라 자연선택이나 유전자변이같이 자연적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과학적 무신론자들의 주장은 두 가지 단계를 갖고 있다. 하나는 과학적 결론을 수용하는 부분이다. 지구의 나이는 46억 년가량 되었다. 생물들은 수억 년 동안 진화되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과학적으로 문제가 없어 보인다. 반면, 그렇기 때문에 지구나 생물들은 창조된 것이 아니라 저절로 만들어졌다고 하는 두 번째 단계는 과학적인 주장이 아니다. 그것은 과학적 사실을 해석한 형이상학적 결론에 불과하다. 그들은 단지, 만 년 전에 창조되었다는 '한가지' 창조의 그림을 부정한 것이지 창조주가 불필요함을 밝힌 것은 아니다. 똑같은 과학적 결론에 대해서도 전혀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신의 언어를 쓴 프랜시스 콜린스 박사를 비롯한 많은 크리스천 과학자들은 지구의 나이가 46억 년 되었고 생물들이 수억 년에 걸쳐 진화되었다는 과학의 결론을 수용하지만 그 내용을 무신론의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창조주의 창조방식으로 해석한다. 이들에게는 지구의 연대나 생물진화와 같은 과학이 창조주를 더 깊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만, 유신론을 버리고 무신론을 선택하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문제는 과학적 무신론의 공격이 사실 매우 무딘 공격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계에 치명적인 상처를 준다는 점이다. 그것은 기독교인들이 과학을 수용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 줄 건전한 창조신학을 교육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 매우 좁은 견해, 가령 만 년 전 6일 간 이루어진 단 하나의 창조의 그림만을 갖고 있던 많은 기독교인들은 과학이 제시하는 자연세계의 역사에 큰 충격을 받는다. 어릴 때부터 주일학교에서 그런 제한된 창조의 그림, 창조주를 마술사처럼 묘사한 창조의 그림만을 배웠던 많은 사람들이 성인이 되어 과학을 받아들이면서 주일학교에서 배운 창조의 그림을 버린다. 문제는 만 년 전 창조라는 그 그림을 버리면서 동시에 복음 자체를 포기하게 된다는 것이다. 많은 지성인들이 복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도 바로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는 반과학적인 창조의 그림들 때문이다. 우주의 나이가 만 년이라는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말하는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도 뻔한 수준일 것이라는 것이 그들이 갖는 선입견이기 때문이다. 복음의 진보와 변증을 위해서 건전한 창조신학과 교육이 시급히 요구된다.



3. 기독인 과학자들의 책임

 


 과학이 창조주의 창조비밀을 밝히는 것이라면, 결국 과학의 새로운 결과들은 언젠가 신학적으로 수용될 것이다. 가령, 18세기에 뉴턴이 중력법칙을 가지고 행성들의 운동을 성공적으로 설명했을 때 상당한 거부감이 있었다. 천사와 같은 에이전트들이 직접 행성들을 운행한다고 생각하던 시절에 신성한 천체들의 움직임을 중력이라는 자연법칙의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뉴턴의 이론이 나오자, 그 이론이 기독교 신앙을 위협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뉴턴의 이론을 비판하고 반대했다. 그러나 몇  백년이 지난 지금, 행성들이 중력법칙에 의해 운동한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으며, 창조주가 직접 자연세계에 개입해서 행성들을 운행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기독교신앙에 위협이 된다고 느끼는 사람도 없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논쟁이 되는 과학내용들도 비슷한 운명이 될 가능성이 많다. 우주의 나이가 오래되었다는 과학지식은 이미 신학적으로 수용되는 단계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반면, 생물진화는 아직도 신학적으로 넓게 수용되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진화도 신학적으로 수용될 것으로 추론된다. 물론 생물진화이론의 경우는 뉴턴의 행성이론과 달리 아직 엄밀한 과학이 아니며 폐기될 것이다 라는 주장도 있다. 결국 그 논쟁들은 긴 시간이 걸릴지는 모르지만 성실히 과학을 수행하는 사람들에 의해 해결될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교회는 기독인 과학자들의 전문성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복음진보를 위해서는 건전한 창조신학을 토대로 과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이루어져야 한다.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보다 깊이 과학을 이해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고 평신도들에게 과학을 보는 눈을 교육해야 한다. 과학을 수학의 증명문제 푸는 것처럼 생각하는 나이브한 과학관을 벗어나 과학적 지식이 생산되는 과정, 경험적 증거와 해석이 어떻게 종합적으로 어우러져서 과학자들의 합의를 이끌어내는지, 21세기 과학이 제시하는 자연세계에 대한 총체적 그림이 과연 어떤 것이며 그 그림이 얼마나 엄밀한지 등, 과학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또한 과학과 과학적 무신론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하며 과학을 부정하지 않고서도 과학적 무신론의 맹점을 비판하고 기독교 신앙을 변증할 수 있어야 한다. 과학에 대한 매우 얄팍한 이해를 가지고서 건전한 창조신학을 교육할 수는 없다.

 

첫째, 이를 위해서는 기독인 과학자 스스로의 노력이 절실하다. 무한경쟁의 연구로 내몰리는 대학이나 연구소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결과를 내는 일을 넘어서서 그 결과들을 기독교적으로 해석해 낼 수 있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과학과 신학에 관련된 기본적인 공부와 소양이 요구되며 이를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해야 한다. 기독인 과학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맹목적으로 과학을 수용하거나 비판하는 일이 아니라 일반계시로서 과학을 끌어안으면서도 창조의 관점에서 그 과학을 해석해 내는 일이다. 


 둘째, 과학자와 신학자의 공동노력이 필요하다. 과학과 신학의 전문성이 한데 어우러져야 보다 건전하고 균형 잡힌 창조의 모델, 창조신학이 나올 수 있다. 창조과학이나 지적설계운동의 문제는 그 비과학성에도 있지만 더 큰 문제는 건전한 신학이 뒷받침되지 못한다는 점이 일반적인 비판이다. 가령, 신학자들의 도움을 통해 자연신학의 한계를 극복하는 새로운 방향을 찾을 수 있다면 훨씬 바람직한 운동이 될 가능성이 있다. 창조신학을 주제로 다양한 신학자들과 과학자들의 대화가 이루어지는 장이 마련되어야 하고 적극적인 활동이 일어날 필요가 있다.


셋째, 주일학교 교육을 개선해야 한다. 교회교육에서는 상당히 반과학적인 방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진화론을 반대하는 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우주의 나이도 문제가 되고 생물진화도 문제가 된다. 젊은지구론을 가르치는 것은 꽤나 심각한 문제다. 왜냐하면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과 교회주일학교에서 배우는 내용이 모순되기 때문이다. 두가지 상반된 내용을 병행해서 갖고 있던 아이들이 지적으로 성장하면서 한쪽을 버린다. 신앙이 좋은 학생은 과학을 버리고 맹목적이 되기 쉽고, 이성적인 아이들은 과학의 논리를 택하고 신앙을 버리기 쉽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교회교육에서 올바른 과학관과 건전한 창조신학을 가르쳐야 한다. 이것은 기독인 과학자들이 신학자들과의 공동노력을 통해 해결해야 하는 시급한 과제이다. 


보다 긍정적으로 과학의 결과들을 수용하되 그 내용을 창조주의 역사로 해석해 주는 교육이 필요하다. 창조과학회의 접근법처럼 과학이론들이 틀렸다는 부정적인 방식을 피하고 오히려 과학내용을 하나님의 것으로 설명해 주어야 한다. 학교에서는 단순히 인과관계만을 설명하지만 주일학교에서는 그 인과관계가 바로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해석해 주어야 한다. 우주의 나이가 오래되었으며 백억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우주의 구조가 진화되었다는 천문학의 내용을 학교에서 배운다면, 주일학교에서는 그것이 바로 창조주가 우주를 창조한 방식이라고 설명해 주는 것이다. 과학에 대한 전문성이 터무니없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과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내용을 틀렸다고 주일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엄청난 오만이며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대한 모독이다. 어릴 때부터 마술사적인 창조주의 모습만을 가르치게 되면 하나님의 창조를 넓게 볼 수 있는 시각을 기를 수 없으며 그런 좁은 창조관은 과학적 무신론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건전한 주일학교 교육을 위해서는 신학자와 과학자가 함께 협력하여 교육 커리큘럼이나 교제, 프로그램 등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또한 성인들을 위한 과학교육, 건전한 창조신학 교육을 위한 자료와 프로그램들도 함께 마련되어야 한다.맺는말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밝혀내는 과학은 우리에게 창조주와 그의 나라를 이해하는데 새로운 풍성함을 더해준다. 하나님이 어떻게 자연세계를 운행하시는지, 그 초월과 내재의 신비를 과학을 통해 목도하면서 우리의 창조신학은 더욱 더 풍성해질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인들에게 과학은 복음의 장애물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건전한 창조신학과 올바른 과학교육의 부재에 기인한다. 기독인 과학자들은 학문의 전문성을 통해 잘못된 과학관을 바로 잡아 과학이 하나님나라의 풍성함을 더하도록 변혁해야할 책임을 갖는다. 기독인 과학자들은 과학과 신학의 문제를 공부하여 과학의 결과들을 창조의 관점에서 바르게 해석하고 기독교공동체에 제공해 주어야 한다. 건전한 창조신학이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신학자와의 공동으로 노력해야 한다. 또한 주일학교교육에서 과학이 올바르게 가르쳐질 수 있도록 커리큘럼을 개발하고 제공하는 일을 통해 교회를 섬겨야 한다. 


주1) . 2012년 숭실대 지식인선교포럼에서 발표한 글.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신학캠프 2011에 발표한 '과학, 신학과의 소통을 기다린다'에서 일부 발췌 수정하였음. 


주2) 과학을 통해 완벽하게 자연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던 19세기의 낭만적 과학관은 20세기로 넘어오면서 폐기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과학이 시간이 지나면 폐기되어 버릴 어떤 잠정적인 이론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과학의 가변성은 분명 존재하지만 과학이 실재를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이며, 그러므로 무분별한 과학만능주의의 입장을 취하거나 과학에 진실은 없다며 과학을 너무 상대화시키는 입장은 둘 다 바람직하지 않다. 보다 바람직한 태도는 존 폴킹혼의 비판적 실재론(critical realism)처럼 과학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과학이 밝혀주는 자연세계에 대한 지식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과학을 보는 필자의 입장은 여기서 출발한다.


 주3) 여기서 주의할 것은 자연적인 인과관계를 통한 창조는 이신론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자연의 인과관계를 통한 창조(비개입론)는 마치 완성된 시계처럼 하나님 없이 저절로 돌아가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비개입론에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차원 (가령 양자적 수준)에서 창조주의 섭리가 담겨있다. 창조주는 자연세계를 창조한 뒤에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그 자연세계를 운행한다. 창조주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자연법칙이 전 우주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다. 즉, 창조주는 인과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듯이 보이는 모든 만물을 '붙들고 (sustain)' 있으며 자연세계는 신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신과 자연세계의 관계에 대해서는 고전적 유신론뿐만 아니라 신 안에 자연세계가 존재한다고 보는 범재신론(panenthesim) 다양한 논의가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