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경제 사이언스플라자 2013년 9월 11 일
우종학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
우리는 누구나 심금을 울리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따듯하고 감동적인 삶의 이야기는 커피 잔을 놓고 오가는 잡담에 담기기도 하고 오랫동안 뇌리에 남아 우리 삶을 새로운 방향으로 떠밀기도 한다. 과학기술과 문화에 관한 테드(TED) 강의를 가끔씩 시청한다. 흥미로운 이야기와 시각화된 아이디어들로 구성된 짧은 영상이 던지는 내러티브는 새로운 영감의 세계로 데려가기 때문이다.
최근 한 테드 강의에는 췌장암으로 지인을 잃은 15세 소년이 등장했다. 췌장암 환자 대부분이 생존율 2% 정도인 늦은 시점에 암 진단을 받아 사망한다. 그 이유가 부정확한 암 진단법 때문임을 알게 된 소년은 새로운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인터넷으로 췌장암과 관련된 정보를 뒤져 조기 암 진단이 가능한 단백질을 찾아냈고, 생물시간에 배운 탄소나노튜브를 응용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아이디어에서 의미 있는 결과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존스홉킨스대학과 국립보건원에 근무하는 교수 200명에게 이메일을 보내 도움을 청했지만 199명이 거절했다. 단 한 명이 관심을 보여 연구할 기회를 얻은 소년은 어려움을 극복하며 결국 췌장암 조기 진단이 가능한 3센트짜리 종이 검출기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조기 진단이 가능해서 100% 가까이 생존율을 올릴 수 있다는 새로운 암 진단법 개발 이야기에 가슴이 훈훈했다. 아이디어와 끈기를 가진 이 10대 소년의 인생 이야기는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까?
가수 박진영이 `놀 만큼 놀아 봤어`라는 곡을 냈다. 놀 만큼 놀아 봤다니 부럽다는 사람도 있겠고 `연구할 만큼 연구해 봤어`라는 비슷한 고백이 과학계에서 나올 수 있을지 상상의 나래를 펴는 사람도 있겠다. 이 노래에는 인생 후반기에 접어든 자기 삶이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그려갈지에 관해 두려움과 혼란이 담겨 있는 게 아닐까?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한 인생을 산다. 그리고 그 궤적이 그려내는 하나의 내러티브를 만들고는 세상을 떠난다. 그 내러티브는 의미 있고 감동적인 것으로 드러날까? 혹은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았다는 흔해 빠진 것이 될까? 이 질문은 10대 소년이나 중년 가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지고 가는 공통된 고민이자 삶의 무게이기도 하다. 과학자로서 지금까지 내 삶이 만들어 낸 내러티브는 과연 어떨까?
한 사람 인생은 사회와 동떨어질 수 없다. 내 삶은 수많은 다른 사람들 삶의 궤적들과 얽히고설켜 결국 우리라는 공동체를 구성한다. 과학자가 사회와 동떨어져 과학에만 매달린다면 그 과학은 부끄러운 것이 될 수도 있다. 자유로운 사고가 보장된 안정된 민주사회에서 학문과 과학이 함께 발전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요즘 들어 우리 사회에는 걱정스러운 이야기들이 늘어나고 있다. 국정원 대선 개입 문제가 가려지는 대신 공안정국을 형성한 내란음모 사건이 여론재판으로 몰리고 있다. 최근에는 대선 개표 결과 조작 의혹이 제기되어 선거관리위원회 관련자들이 검찰에 고발되었다. 일본 식민통치가 한국 근대화에 도움이 되었다는 친일 시각 교과서가 등장하는가 하면, 다큐멘터리 영화 `천안함 프로젝트`는 상당한 흥행이 기대됨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압력을 받아 상영이 중단되었다. 며칠 전에는 자본론을 가르친다는 이유로 어느 대학강사가 국정원에 신고되기도 했다.
진지한 소통 대신 색깔론이 짙어 보이는 이런 사건들은 우리 사회가 자유민주주의 사회로 성장하고 있는지를 되묻게 한다. 2013년 9월, 대한민국이 그려내는 내러티브는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우리 인생 이야기와 더불어 우리 사회의 내러티브를 함께 둘러보는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