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고민하다/손가락 가는 대로

갈림길

별아저씨의집 2005. 2. 6. 17:00
미로찾기라든가 장기같은 게임에서는 항상 선택의 순간이 온다. 이번에 이길로 갈 것인가 저 길로 갈 것인가에 따라 전혀 다른 옵션이 다음단계에 주어진다. 그리고 그 다음 수에서는 그로말미암아 더 동떨어진 길들이 열린다. 그러니까 이번에 저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그쪽으로 놓여진 길들을 걸어볼 기회는 완전히 놓치게 되는 셈이다.

그렇게본다면 선택이라는 행위는 더 많은 기회들을 제거하고 한가지 옵션을 고르는 것이다. 물론 어차피 한 길을 갈수 밖에 없고, 잠시 쉬었다 갈수는 있더라도 갈림길 앞에 주저앉아버릴수는 없으니 선택이란건 불가피하다. 문제는 과연 나의 선택이 과연 옳은(?) 선택이냐는 것. 미래의 불확실성속에서 인간은 그렇게 고뇌한다.

이러한 고뇌의 근본은, 갈림길에서 한쪽을 선택했을때 그 길이 결국 막힌길로 판명이 나지는 않을까, 유리할 거라고 생각했던 한 수가 결국 외통수를 허용하여 장기에 지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과 궤를 같이 한다. 한마디로, 게임의 패배에 대한 불안감이다.

그러나 과연 인생은 이겨야하는 게임일까? 거기에는 찾아야할 탈출구와 이겨야할 적이 있는 것일까? 막다른 골목길에서 게임이 끝이나거나 적의 공격으로 게임을 잃는 것이 가능한가? 오히려 우리의 인생에선 이런 게임이 끝나지 않는게 아닐까? 미로를 찾다가 장기를 두다가 중간에 시간이 다 되어서 자리를 일어서야 하는, 게임의 승패와 같은 확연한 구별은 애초부터 없는게 아닐까. 결국 우리는 죽음이 오기까지 주어진 시간동안 게임에 임하고 있는건지도 모른다.

현재의 시간에 제한된 우리의 인생, 그리고 고작해야 우리의 지성이 어느정도 가늠해볼수 있는 물질적 세계의 지평을 넘어서서 더 커다란 being의 의미들을 짚어본다면 우리의 인생에서 '게임의 패배'같은건 없다. 누가 인생의 승자이고 누가 패자인가? 아마도 그런 관념은 청소년기에 빠져들던 외설같은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갈림길앞에서 미래의 불확실성이 던져주는 고뇌는 좀더 복잡하다.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특히나 더 현대인들에게 그것은 게임이 끝나는 마지막 순간에 대한 걱정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번의 선택이 가져오게될 다음 단계들의 질(quality)에 대한 염려다. 그들에게 정의되는 게임의 승리는 오히려 얼마나 게임을 즐겼냐는 것이다. 매번의 선택을 통해 얼마나 더 좋은 질의 게임이 보장될것이냐가 바로 선택의 기준이 된다. 그들은 인생이 마감되는 순간에 관심이 없다. 이번의 선택을 통해 다음 단계의 삶의 질이 얼마나 더 풍성해 질것이냐, 선택의 실수로 혹 그것을 놓치지는 않을까하는 안달함이 바로 그 고뇌의 본질이 된다. 결국 주어진 시간동안 게임을 하는 거라면 그렇게 인생을 사는 거라면 더 신나고 풍성하게 즐기며 값지게 사는 것이 관건이다. 그리고 그 '행복'을 위해 고뇌한다. 아니, 그 '행복'을 놓칠까봐 고뇌한다.

그렇다면 삶의 질이란건 무엇인가? 더 풍성하게 산다는 건? 더 신나게 즐기며 산다는 건? 더 값지게 산다는 건? 도대체 삶의 질은 누가 정하나? '웰빙'이라는 말이 던져주는 그런 뉴앙스가 진정 삶의 질이란 말인가? 일하는 시간보다 놀 시간이 많아진다거나 쓸 돈이 많아진다거나 상류사회에 진출한다거나 하는 세상적 기준에 충분히 딴지를 걸어보아야 한다. 결국 '엔터테인먼트'라는 우상의 보다 철저한 숭배자가 되는 것을 삶의 질이 좋아지는 것으로 볼수는 없다. 비록 우리가 그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하더라도.

소위, 그의 영광과 그의 나라라는 소명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패턴의 갈림길과 고뇌(?)가 존재한다. 물론 거기에는 소명에 보다 충실하려는 전략적 판단이 고뇌를 대신한다. 어느 길을 선택하는 것이 더 그의 나라에 유익하겠는가하는 그런 혀 짧은 전략적 판단말이다.

물론 한 개인의 갈림길에서는 소명-그러니까 보다 진정한 의미에서 삶의 질을 높이는-이라는 맥락과 세상적 의미의 삶의 질이 포괄적으로 고려된다. 그리고 많은 경우 소명에 대한 전략적 판단과 세상적 삶의 질이 같은 방향을 제시하기도 한다. 흔히 그것은 고지론의 맹점이기도 하지만, 종이 한장 차이인것 같은 이 하나님나라를 추구함과 자신의 세상적 삶의 질을 추구함의 미묘함은 개인의 삶과 단체, 교회, 국가를 비롯한 모든 인간의 삶의 영역에서 여지없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것은 하향적인 삶을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종이 한장 차이를 어떻게 구별하고 기울지 않는 외줄타기를 할 것인가가 관건이 되어야 한다. 인간의 노력이라는 면에서 테크니컬하게는 소명을 지향하는 것과 세상적 삶의 질을 추구하는 것이 거의 똑같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세상과 구별될수 있을것인가, 어떻게 거룩할수 있을것인가가 바로 던져야 할 질문이다.

그리고 이 질문은 선택의 기로에서 조심스럽게 던져야할 질문인게다. 때로는 교묘하게 세상적 삶의 질을 추구하는 것을 소명을 지향하는 것으로 합리화 할수도 있고, 세상적 삶의 질을 추구하는 것 같은 죄책감(?) 때문에 오히려 소명에 불성실할수도 있다. 아, 여기에는 명료한 이성적 사고만으로는 가늠되지 않는 두 영역의 오버랩과 우리의 의지를 휘어잡고 마는 죄된 본성이 있기에 우리에겐 깨어있는 영성이 필요하며 그렇게 포도나무에 로그인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갈림길에서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는 묘미는 이 모든 복잡한 생각과 싸움과는 별도로, 떡 하니 길을 열어주시는, 그것도 선택의 여지가 없게 한 길을 명확히 열어주시는 데에 있다. 물론 그것은 조심스런 성찰과 기도를 통해 깨닫게 되는 것일수도 있고, 영적으로 바닥상태에 있음을 불쌍히 보시고 다른 길들을 막아주심으로 자연스레 보여주시는 것일수도 있다. 다만, 욕심에 눈이 멀어 엉뚱한 길을 그 길로 보는 어리석음만 범하지 않는다면 그분의 인도하심은 사뭇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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