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고민하다/손가락 가는 대로

야만의 시대

별아저씨의집 2019. 11. 16. 14:58
야만의 시대 (19.10.15)

1. 중학교 때, 키가 작아 앞에서 두번째 줄에 앉았던 나는 첫째 둘째 줄에 앉은 키 작고 싸움 못하는 아이들이 덩치큰 일진들에게 시달리며 매일 100원씩 뺏기는 걸 목격했다. 내가 100원씩 뺏기지 않은 이유는 단지 우리반 1등이라 담임과 친했고 일진과 붙었던 싸움 잘하는 녀석과 친하다는 걸 그들이 알았기 때문이었다.

2. 고등학생 때, 이한열, 박종철 대학생들의 죽음을 계기로 87민주화 운동이 성공을 거두고 전두환이 지맘대로 선정한 꼭두각시 선거인단이 체육관에 모여 대통령 몰아주기 하던 시대가 끝내고 대선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김대중 후보는 대선에서 떨어졌다.

고3때 국어선생님이 수업시간에 했던 말을 나는 지금까지도 잊지 못한다. 김대중이 다리를 저는 걸 흉내내던 그는 대통령이면 외교정상들도 만나고 사열도 받야야 하는데 다리를 저는게 어떻게 나라를 대표하는 대통령을 할 수 있냐고 했다. 다리를 전다는 이유로 대통령 자격이 없다니, 그건 김대중이 빨갱이고 그가 대통령이 되면 나라가 적화통일된다던 아버지의 얘기보다 더 충격이었다.

3. 대학시절 김영삼 후보는 대통령이 되기 어렵다는 판단아래 3당 합당을 했다. 어떻게 광주학살을 일으킨 5공 세력과 함께 같은 편이 되겠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던 평범한 대학생들도 데모를 많이 했다. 3당 야합이라고 비난했던 우리들에게 어느 친구의 부모님은 야합이 얼마나 나쁜 말인데 야합이라고 하느냐며 우리를 나무랐다. 그건 야합이 아니었던가. 야만의 시대에 야합이 어울리지 않았던가.

4. 노무현을 처음 알게된 것은 한 편의 영상 때문이었다. "이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혼자 이의 있다고 외치고 입막힘을 당하고 짓눌려졌던 한 사람의 모습을 영상으로 접하는 순간 전율이 왔다. 거대한 힘에 맞서는 그는 누구인가? 야만의 시대에 홀로 외치는 자는 누구인가?

5. 그 영상을 본 것은 긴 시간이 지나 노무현이 대통령 후보가 되었을 때였다. 그는 대통령이 되었고 나는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며 종종 한국소식을 들었다. 검사들과 대통령이 대화하는 자리가 있었다. 대학을 나오지 않은 대통령에게 그 검사라는 자들은 몇학번이냐고 물었다. 말 그대로 대통령에게 막가자고, 맞먹자는 검사들을 보며, 역대 대통령들처럼 검찰의 권력을 이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노무현 대통령을 보고 그런 생각을 했다. 야만의 시대에 도대체 어쩌겠다는 걸까? 야만의 시대에도 순수가 통한다는 나이브함일까?

6. 고등학생때 다니던 교회 같은 고등부 학생 누군가가 남의 집에 들어가 도둑질을 하다가 잡혔다. 장로였던 아버지가 도와주려 뭔가 노력했던 듯 하다. 그때 담임목사님 아들이 부장검사였던가 그랬다.집으로 오신 목사님이 아버지와 얘기하는 걸 들었다.

이 일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검사가 기소를 유예하는 것이라고 한다. 담당검사에게 자기 아들이 잘 부탁해서 기소를 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청탁이다. 그대신 그 검사가 나중에 자기 아들에게 뭔가 부탁을 할때 들어줘야 한다고 한다. 빚을 지는 셈이었다. 무슨 건으로 부탁할지 모르기 때문에 위험한 거래일수도 있지만 그래야 이 학생을 살릴 수 있다고 그렇게 하자고 했다.

죄를 지어도 경찰에 잡혀도 검사가 기소를 하지 않으면 재판도 받지 않고 책임도 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게되었다. 더군다나 기소를 유예하도록 검사에게 청탁을 하고 나중에 그 검사가 어떤 부탁을 하면 나도 기소를 하지 않는 식으로 주고받기가 가능하다는 사실에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중학교때 일진과 싸운 친구 때문에 매일 100원씩 뺏기던 힘없는 아이들 중에서 열외를 받았던 기억이 어렴풋이 겹쳤다.

7. 현실적인 영화를 좋아한다. 슈퍼맨, 히어로 같은 영화들은 대작이라고 해도 내 관심을 끌지 못한다. 특히 거대한 권력과 싸우는 한 개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를 무척 좋아한다. The Firm, 펠리컨 브리프.... 그런 영화들이 좋았다. 야만의 시대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이 어쩌다가 야만과 맞붙는 이야기. 초능력을 가진 영웅들이 끌지 못하던 내 관심은, 두려워하고 동시에 분노하며 싸우는, 종종 실패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충분히 끌렸다.

8. 기억력이 그리 좋지는 않다. 친하게 지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아 당황할 때가 있다. 중요하지 않은 건 기억에서 지워버려야 새로운 기억이 두뇌를 차지할 수 있게 되는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했던 폭력은 잘 잊혀지지 않는 법이다. 이름도 모르는 타인이 어느 시공간에서 나에게 가했던 물리적, 언어적, 인격적 폭력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10년이 지나도 꿈에 나타나던, 도 병장이 가했던 폭력, 어느 골목길에서 이름 모를 운전자가 비웃음으로 던졌던 언어적 폭력, 중학교때 전교 5등 밖에 못했다고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고 맞았던 매, 정신병자 같은 선생님의 지랄맞은 농담에 크게 웃었다고 끌려나가 맞았던 따귀.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학생부 선생님들이 들이닥쳐 두발자유화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머리를 마구잡이로 잘라 모두들 황교안 스타일이 되었던 기억. 미국에서의 여러 경험들.... 나열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겠지만 어쩜 그렇게 야만의 기억들은 선명한걸까.

9. 몇달간 언론의 모습은 말 그대로 야만이었다. 알권리를 위해 열심히 보도했다는 그들의 변명은 전혀 먹히지 않는다. 마녀사냥의 주체는 언론이었고 검찰이었다. 조국 장관 가족과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그저 야만이 싫었다. 몇개 글을 썼을 뿐인데 야만의 시대 한복판으로 내몰렸다. 그래봐야 언어폭력을 조금 당하는게 뭐 그리 대수이겠는가, 이 야만의 시대에.

10. 어제 조국 장관 사퇴 소식을 들으며 잘 소화가 안되었다. 많이 아팠으리라. 아침에 듣자하니 정겸심 교수는 뇌경색과 뇌종양 판단을 받았다고 한다. 사퇴하면서 발표한 글을 읽어보니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한 인간의 마음이 다가왔다. 가장 힘든 시기에 가족과 함께 하지 못한다면 평생 후회할 것 같다는. 도대체 어느 누구가 검찰개혁이니 민주화니 적폐청산이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11. 검찰개혁과 조국수호가 함께 외쳐지는 것이 불편했다는 분들은 이제 조국수호를 빼고 검찰개혁만 외치면 되니 반드시 그렇게 외쳐주시리라 부탁한다. 그렇지 않다면 조국수호가 불편하다는 당신들의 말은 사실 검찰개혁이 불편했던 것임을 드러낼 밖에.

12. 검찰개혁 반드시 되돌릴 수 없는 수순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패스트트랙 범죄자들 소환없이 기소하라. 벌써부터 검찰개혁을 뒤바꾸겠다는 자한당의 움직임은 반드시 막아야한다. 자녀들의 입학비리 조사하고, 고발된 사건들 검찰에 수사하기를 촉구한다.

13. 우리는 야만의 시대에서 벗어났는가? 눈에 보이는 폭력이 사라졌다고 해도 이 시대는 여전히 야만의 시대가 아닌가? 한 가족을 그렇게 털만큼 중대한 권력형 비리 혐의가 있었던건가? 아니면 적법한 절차, 원칙대로 수사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폭력이었던가? 검찰대신 수사를 한 기자들과 기자대신 기사를 쓴 검찰은 야만의 주체가 아니었던가? 정쟁의 과정에서 반드시 점령해야할 조국사퇴의 고지를 향해 달려간 자한당의 행동은 야만이 아닐까? 그 흥미를 소비하고 몰래 즐겼던 모두는 야만의 책임에서 자유로울까.

14.. 조국이 이제는 장관도 아니니 맘껏 지지하려한다. 한 인간으로서, 남편과 아버지로서, 무엇보다 거대한 권력과 맞서는 평범한 사람으로서, 특히 이 야만의 시대에 우뚝 서서 몇달을 버텨준, 실패했을지 모르나 실패하지 않은 당신을 맘껏 응원해 보려한다.

15. 역사는 거대담론이 끌어가는 것일까? 나는 한 사람의 중요성을 여전히 믿는다. 야만의 시대를 버터내기 어렵지만, 야만의 시대가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에 맞서는 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 야만을 뭐라 판단하든, 오늘 내 일상에서 옳다고 믿는 것을 향해 한발씩 내딛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