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예수의 가르침은 참 놀라운 것들이 많습니다. 대학시절 성경을 제대로 읽고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만났던 본문들은, 날 때 부터 교회에서 자란 셈이라 너무나도 익숙하던 구절들을 새롭게 보게 해주었고 무한한 질문의 연속으로 빠져들게 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오늘 설교에서 두려움에 대해 들으며 그 고민이 떠올랐습니다. 대학시절부터 시작된 그 고민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하는 반감같은 혹은 자조적인 댓구가 속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무엇을 먹을지 마실지 입을지 고민하지 말라는 그 가르침은 매일 끼니를 걱정하고 마실 물을 걱정해야 했던 갈릴리 사람들이나 예수를 좇아 다니며 생존에 필요한 물질을 채워 줄 것으로 기대했던 사람들에게는 훨씬 놀라운 가르침이었을 겁니다.
옷장에 걸려있는 옷들을 보며 입을게 없다고, 새옷을 좀 사야겠다고, 그런 걱정을 하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패션에 신경쓰지 말고 검소하게 살라는 말도 아닙니다. 그 당시의 사회문화로 돌아가보면 옷은 몸을 보호하고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도구였습니다.
좀더 맛있는 음식, 좀더 좋은 와인, 술, 유기농 채소 등에 신경쓰며 걱정하는 우리시대의 염려와는 차원이 다른, 밑바닥의 염려가 그들의 염려였고, 그 염려를 하지 말라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입니다.
과연 그것이 가능이나 한가? 저축도 보험도 노후대비도 하지 말라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드는 건 당연합니다. 들의 백합화처럼 그냥 살라는 얘기인가, 하는 투정도 생깁니다.
오늘 우리에게 아마도 더 큰 문제는 의식주 중에서 집에 대한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어디에 집을 살까 염려하지 말라는 가르침은 없으니 염려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건 성경을 제대로 읽지 못한 셈입니다.
전세 계약이 끝날 때 즈음 되니, 다시 집걱정, 꼭 걱정이랄 수는 없지만, 집에 대한 생각들이 온통 마음을 휘졌습니다. 딱 그 문제를 염려하는 시점에, 딱 그런 설교를 주시는 군요.
뭔가 비본질적인 것에 시간과 에너지를 빼앗기는 것이 무척이나 싫기 때문에 돈을 많이 버는 일에도 그닥 큰 관심이 없습니다. 증권이든, 부동산이든, 뭔가를 사고 파는 일에 꽤나 자신이 있지만, 거기에 시간과 에너지를 빼앗긴다는 것이 과연 잘하는 일인가에 대해서는 항상 부정적인 답변이 나옵니다.
꼭 그런 투자가 아니더라도, 직업을 이용하여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강의를 하러 다닐 수도 있고, 책을 마구 써낼 수도 있겠습니다. 돈벌기에 적합한 아이텀들도 살짝 보입니다. 하지만 약 팔러 다니는 장사꾼이 될 수는 없다는 게 평소 생각입니다. 꼭 필요한 일만 하자는 그 선을 지키지 못하면 아마도 정체성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약은 다양한 종류가 있습니다. 그걸 팔아 돈을 벌 수도 인기를 벌 수도 권력을 벌 수도 있겠습니다.
지난 한 주, 연구와 글과 독서가 밀린 상황에서 황금같은 저녁 시간들을 집걱정에 빼앗겼다는 생각이 드니 마음이 무겁습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옳고 필요한 일을 하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금이 간 느낌이어서일까요.
게을러서는 안됩니다. 하늘에서 뚝딱 뭔가 떨어지기를 바라는 안일한 자세는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긴 인생의 여정에서 끝없이 맞닥뜨리는 걱정과 고민의 밑바탕에는 결국 무엇에 가치를 두는가라는 인생에 대한 조망이 놓여있습니다.
좋은 집과 좋은 차, 좋은 옷과 좋은 네트워크, 그리고 그 안에서 핵인싸가 되는 일. 그 모든 일이 다 무엇을 위함입니까?
한평생 잘 먹고 잘 살았다는 목표를 넘어, 부동산과 자식에게 물려줄 유산과 대중의 평판과 떵떵거릴 권력을 넘어, 우주적이고 아름답고 숭고한 그 무언가에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붓는 일.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도가 가리키는 방향일 것입니다.
서늘한 바람이 다사로운 햇살을 실어 집안으로 흘러드는 주말 오후, 또 다시 묻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가르침의 뜻은 과연 무엇이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