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도기_이야기] 35번째 - 대화는 통합도 분리도 아니다.
1. <통합> 과학주의자들은 과학 아래 종교를 통합해 넣으려는 입장을 갖는 반면, 창조과학자들은 종교 아래 과학을 통합해 넣으려 합니다. 종교가 폐기되어야 한다는 도킨스의 주장도 엉뚱하지만, 반대 극단에 있는 창조과학은 창조라는 신앙과 과학을 엉뚱하게 통합해서 만든 괴물입니다.
2. 젊은지구론이든 오랜지구론이든 지적설계든 진화적창조든 간에 신앙과 과학을 막무가내로 통합하려고 하면 괴물이 탄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괴물을 만드는 두가지 작용이 있습니다.
첫째는 성경을 과학교과서처럼 읽어서 그 내용을 과학에 적용하려고 할 때 일어납니다. 시편을 잘못 해석해서 성경은 지구가 움직일 수 없다고 가르친다고 주장했던 지동설-천동설 논쟁 시절의 기독교인들이 그랬습니다. 루터나 칼빈도 흑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2-1. 창조기사를 과학적 묘사나 설명으로 잘못 읽는 젊은지구론자들은 지구나이가 6천년이라고 주장합니다. 오랜지구론자들 중에서는 6일창조는 문자적 의미가 아니라고 보지만 6일의 순서만큼은 과학적 묘사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각기 종류대로 창조되었다는 성경의 표현은, 생물이 진화되지 않았다는 뜻이라고 읽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2-2. 진화적창조의 입장을 가진 사람들 중에도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 3절에 나오는 빛의 창조를 우주배경복사라고 주장한다거나 우주팽창이 성경에 나온다고 주장하는 등, 성경이 현대과학을 예측하고 있다거나 성경이 현대과학과 일대일로 잘 드러맞는다고 주장하면 다들 괴물로 가는 길을 걷는 셈입니다.
3. 과학과 신앙을 잘못 통합해 괴물로 만드는 두번째 작용은 과학으로 성경을 증명하려고 할때 발생합니다. 그랜드캐년은 노아홍수를 증명한다고 주장하는 젊은지구론자들이 대표적입니다. 나사에서 컴퓨터로 연구해 보니 지구역사 중에 하루가 비더라는, 그 빈 하루가 여호수아가 해와 달을 멈춘 기적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근거없는 찌라시로 성경을 증명하려는 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3-1. 진화적창조의 입장도 괴물로 갈 수 있습니다. 가령, 빅뱅우주론이 무에서 유로의 창조를 증명한다는 식의 주장은 과학과 신앙을 잘못 통합해 괴물로 만드는 작용이 될 수 있습니다.
4. 즉, 성경에서 과학을 끌어오거나 과학으로 성경을 증명하려는 식의 노력은 둘다 과학과 신앙의 통합이 아니라 오히려 괴물을 만들어 내는 지름길입니다. 젊은지구론이냐 진화적창조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성경과 과학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괴물이 될 수도 있고 건강한 길로 갈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5. <분리> 반면에 분리론자들도 있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신앙은 신앙이고 과학은 과학이지 굳이 두개를 통합시킬 필요는 없다는 입장입니다. 신앙과 과학을 통합하려는 시도가 종종 괴물을 만들기 때문에 거기서 상처받고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오히려 반동적으로 그런 분리주의 입장을 갖는지도 모르겠습니다.
6. 과학과 신앙 (혹은 신학)은 분명이 분리되는 면이 있습니다. 과학은 자연세계의 작동원리를 다루고 신앙은 그 의미와 목적을 다룹니다. how와 why의 문제는 다른 질문입니다. 작용인과 목적인을 묻는 건 서로 다른 탐구입니다. 선물받은 시계가 작동하는 방식을 파악하는 것과 왜 그 시계를 선물했을까를 묻는 건 서로 다른 질문이고, 시계를 선물한 이유와 시계가 작동하는 방식은 서로 섞이지 않습니다. 분리된 질문입니다.
7. 분리론의 입장을 갖는 사람들은 종종 창조과학이든 진화적창조이든 신앙과 과학을 연결하려는 시도를 보기만 하면 죄다 괴물을 만들어내는 통합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창조과학자들이 성경과 과학을 통합시켜 괴물을 만들어내었듯 진화적창조론자들도 성경과 현대과학을 짬뽕시켜 괴물을 만들어내는 거라고 삐딱한 시선을 보내기도 합니다.
8. 글쎄요. 창조과학은 세대주의자였던 헨리 모리스를 중심으로 안식교인이던 프라이스의 홍수지질학과 세대주의 신학을 통합해서 만들어낸 집단적 노력이었습니다.
9. 하지만 진화적창조의 입장은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창조과학처럼 그런 통일된 입장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성경에서 진화의 개념을 찾아내겠다거나 반대로 현대과학으로 성경이나 신앙을 증명하겠다는 식의 접근도 아닙니다.
10. 물론 진화적창조 입장에는 진화생물학 등의 과학에 절대적 지위를 부여하거나 과학의 권위 아래 신앙을 통합시키려는 입장을 가진 사람들도 있겠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유신론적 진화론자라고 창조과학자들이나 분리론자들이 주장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1. <대화> 그러나 진화적 창조의 입장은, 통합도 아니요, 분리도 아닌 대화의 입장입니다. 잘못된 통합은 괴물을 만들어내지만, 잘못된 분리는 우리를 이원론자로 만들뿐입니다.
12. 물론 과학자들 중에는 유신론자도 있고 무신론자도 있고 불가지론자도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성경을 증명하기 위해서나 내 신앙과 과학을 통합하기 위해서 과학을 하지는 않습니다. 과학자들은 그저 과학을 열심히 할 뿐입니다. (물론 수많은 그리스도인 과학자들이 하나님의 창조를 연구한다는 거룩한 동기로 과학을 해왔고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과학과 신앙은 분리된 작업입니다. 저도 이 점을 분명히 [무크따]에서 다루었습니다.
13.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그럼 과학이 밝힌 내용에 대해서 신앙적인 숙고를 할 필요가 없는건가? 과학은 과학자들에 맡기고 과학이 뭘 밝히든 관심을 꺼야 하는가? 그건 아닙니다. 창조주를 믿고 고백하는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과학은 독립된 학문으로 과학의 결과를 내지만 그 결과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과학이 알려주는 결과와 성경이 알려주는 내용을 함께 종합해서 이해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노력입니다. 종종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과학의 내용과 성경의 내용을 함께 묶어 보다 통합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지성의 활동입니다.
14. 이해는 합니다. 과학과 신앙의 통합이 주로 괴물을 낳아왔기 때문에 분리론이 심정적으로 편하고 깨끗하지요. 따로따로 국밥처럼 과학은 과학대로 신앙은 신앙대로 내버려두면 갈등도 없습니다. 매우 편합니다.
15. 그러나 그 둘을 분리해서 두는 것은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과학이 던지는 결과들에 대해서 과학 그대로 수용하지만 그러나 그 의미가 무엇인지 그것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고민하고 탐구하는 것은 당연한 활동입니다.
16. 반대로 성경을 성경 그대로 믿고 신앙을 고백하지만 그 내용이 구체적인 모습에 관해서 우리는 궁금합니다.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신 것을 성경을 통해 읽고 신앙으로 고백하지만 우리는 그 과정이 궁금하고 과학을 통해서 들여다 볼수 있습니다. 그리고 과학을 읽으며 하나님이 이렇게 창조하신 것이구나 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17. 분리론은 답을 주지 않습니다. 과학과 신앙을 분리해 버리는 태도는 편하고 안전할 수 있지만 지적인 게으름이며 두려움입니다. 과학과 신앙을 연결해서 던지는 질문들이 갈등을 가져올 수 있고 또 잘못하면 그 둘을 잘못 통합해서 괴물을 만들어 낼 위험을 소지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둘을 함께 이해하려는 노력은 피할 수 없습니다.
18. 이것이 바로 대화론의 관점입니다. 통합도 아니고 분리도 아닌 과학과 신앙의 대화를 추구하는 관점입니다. 사실 통합이나 분리는 손쉬운 해결책입니다. 성경아래 과학을 통합하거나 과학아래 신앙을 짚어넣는것처럼 쉬운 방법도 없습니다. 더 쉬운 것은 분리론이죠. 과학과 신앙을 따로따로 절대로 서로 침범하지도 않고 서로 질문하지도 않는 것처럼 간단명료한 방법도 없습니다.
19. 그러나 최소한 저는 만족이 되지 않습니다. 천문학을 통해 우주의 역사를 알아가고 그 작동원리를 배워가지만, 이 우주의 의미에 관해서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창조주을 고백하지만 그 창조주가 만들어낸 창조의 역사의 구체성에 관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대는 쉬운 길이 아닙니다. 통합과 분리의 중간 즈음, 외줄타기와 같은 균형을 잡으며 실천적 이원론자가 되지 않으면서 괴물제작자도 되지 않으려는 노력은 쉽지 않습니다.
21. 진화적 창조든 오랜지구론이든 지적설계든, 그 내용을 가지고 판단할 것들도 많지만, 태도를 가지고 깊이 생각해 볼 점도 많습니다. 통합, 분리, 대화가 모두 창조주를 고백하는 기독교의 태도입니다. 물론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자들에게는 3가지 태도가 다 똑같겠습니다만, 기독교 안에서도 대화의 입장을 가진 사람은 통합론자들과 분리론자들 양쪽으로부터 종종 비난을 받습니다.
22. 그래도 어쩝니까. 대화의 길을 가야지. 왜 항상 저에게는 흑백이 아닌 칼라로 세상이 보이는지 모르겠습니다. 흑과 백의 중간 어디, 건강한 길을 찾는 노력은 쉽지 않지만 가치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