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도기_이야기 3. 창조과학과 종교적 경험
코스타에 왔습니다. 작년 한번 걸렀더니 꽤 낯섭니다. 작년에 올 수 없었던 이유를 포스팅했었는데 그 글이 폭발력이 있어서 많은 분들께 메세지를 받았었습니다. 결국 창조과학 때문이었습니다.
어찌되었건 올해는 초청이메일이 와서 과학과 신앙 세미나 강의를 하러 왔습니다. 오늘 첫 강의입니다. 세미나 1과 2를 연강으로 진행합니다. 내일도 한번 더 반복됩니다.
아침을 먹으며 여러 지인들과 창조과학과 종교적 경험에 관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랜드캐년을 가거나 창조과학 강의를 통해서 교인들이 만나는 경험은 창조의 신비와 창조의 아름다움, 창조세계를 통해 느끼는 창조주입니다. 창조과학으로 은혜받았다고 하는 분들은 이런 종교적 경험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함께 대화한 분들도 창조과학 비디오를 보고 창조의 신비를 느꼈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계기가 되었다는 에피소드들을 나누었습니다. 지금은 창조과학에서 벗어났지만, 신앙을 갖게된 여러 힌트들 중의 하나가 창조과학이었던 경험을 가진 분들이 있는 것이죠.
창조과학에 대한 비판을 불편하게 느끼는 사람들은 창조과학이 거짓이면 창조과학을 통해 자신이 경험했던 그 놀라운 종교적 경험도 무너지는 게 아닐까라고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창조의 신비를 느끼고 창조주에 주목하게 되는 그런 종교적 경험은 창조과학의 논리의 세세한 내용이나 과학적 사실성에 좌우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그랜드캐년을 가서 직접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창조의 위대함을 느끼고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 종교적 경험은 사실 지구의 연대가 만년이라는 창조과학의 논리적 설명을 통해서 그 결과로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세계를 마주하면서 일반계시안에 담긴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만일 창조과학이 아니라 정통 지질학을 다루며 46억년의 지구연대를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의 창조를 설명해도 동일하게 창조의 신비를 느끼는 종교적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창조과학이라는 통로를 걸어가서 종교적 경험을 만났다고 해도 그 종교적 경험은 창조과학의 설명이 과학적인지 비과학적인지와는 별개의 체험일 수 있습니다.
20년쯤 전에 기독대학원생 수련회에서 우주론에 관한 글을 발표하면서 창조과학을 비판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날 밤 뜨거운 열기의 수련회 장소에서 한 자매가 저에게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IVF의 추구자 수련회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그때 창조과학 강의를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그것이 결정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을 열어준 여러가지 힌트 중의 하나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렇게 말을 꺼내는 자매 앞에서 저는 떨렸습니다. 혹시 창조과학이 과학적으로 넌센스라는 저의 비판이 이 자매의 신앙을 무너뜨린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때는 창조과학이 자신에게 도움을 준 다양한 내용중의 하나였지만 지금 자신의 신앙이 창조과학에 의존하지는 않는다고 말입니다. 즉 자신의 신앙의 성숙했고 복음에 대한 확신은 창조과학이 옳으냐 그르냐에 달려있지 않기 때문에 제가 창조과학을 비판한 내용도 수용할 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과학을 전공하는 학생으로서 과학적 진리에 침묵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해서 과학적 설명이 다른 사람에게 신앙적 어려움을 주면 어쩌나라는 걱정이 있었는데 그렇지는 않았던 겁니다.
사실 그녀가 경험했던 것은 창조세계의 신비로움과 창조주의 위대함이었습니다. 즉 종교적 경험이었던 것이지요. 비록 창조과학의 설명이 비과학적이고 넌센스이지만 그것은 손가락에 불과한 것이고 그녀는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보았던 것입니다. 나중에 창조과학 논리적 비약과 엉성함을 깨닫고 창조과학을 버리게 되어도 그 종교적 경험은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아이가 나는 어떻게 태어났어?라고 묻는다면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세포분열을 통해 태어났다는 과학적 설명이 가능하고 엄마와 아빠가 서로 사랑해서 그 사랑의 열매로 귀한 생명으로 너가 태어났다는 형이상학적 설명이 가능합니다.
아이가 부모의 사랑으로 자신이 태어났다는 설명을 듣고 자신의 존재 의미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게 되는 것을 종교적 경험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만일 부모가 무지해서 정자와 난자가 만나 세포분열을 일으키는 과정으로 아이가 태어난다는 과학적 설명을 제대로 못하거나 혹은 틀리게 설명하더라도, 여전히 아이는 자신이 부모의 사랑의 열매라는 가치를 흔들림없이 쥐고 있을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창조를 통해서 만나는 것은 창조의 신비와 종교적 경험입니다. 그 경험이 창조과학을 통해서 왔더라도 그리고 창조과학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버리더라도 창조주의 위대함이라는 종교적 경험은 고스란히 남습니다. 창조과학을 비판하고 생각을 바꾼다고 해서 창조의 신비나 창조주의 위대함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김동호 목사님과의 대화에서도 이 부분이 더 주목되어야 하겠습니다. 과학적 설명과 종교적 경험은 두개의 서로 다른 범주입니다. 범주오류가 과학과 신앙의 문제의 가장 큰 걸림돌이지요. 목회자들이 걱정하는 것은 창조과학비판이 그동안 교인들이 경험한 종교적 경험을 무너뜨리게 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점입니다.
아닙니다. 성경을 잘못해석하고 잘못 읽어서 은혜받고 목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오늘 아침을 같이 드신 한 분의 증언이랍니다.^^) 목사가 된 후에 성경을 제대로 읽어보니 그때 자신이 성경을 잘못 이해했음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때 받았던 은혜와 자신에게 목사의 소명이 주어진 과정이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종교적 경험을 일으키는 하나의 촉매제였지만 잘못된 성경해석은 버려야 하는 것이고, 버린다고 해서 종교적 경험이 가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창조과학을 버리기 불편해 하시는 분들은 창조과학을 통해 경험한 종교적 체험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창조과학을 버린다고 해서 창조주를 만난 종교적 체험이 무의미하게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창조과학말고 자연세계를 제대로 보고 과학을 통해서 더 놀라운 종교적 경험을 할수 있습니다. 창조과학 수준의 유사과학적인 내용으로도 창조의 신비와 창조주의 놀라움을 경험하는 촉매제가 될 수 있었다면 과학을 통해 자연세계를 제대로 조명하고 들여다 보면 얼마나 더 크게 창조의 신비와 창조주의 위대함을 경험하게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