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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성경해석을 성경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벗어나라



최근 페북에서 오간 논쟁/논의들을 보면 성경과 과학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중 몇가지 생각해 볼 만한 것들은 이렇습니다.


* 성경은 진리이지만 과학은 변하기 때문에 진리가 아닐 수도 있다.

* 과학으로 성경을 재단하는 것은 과학을 성경 위에 두는 것이다. 


자 어떻게 생각해 볼 수 있을까요? 


1.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로서 완벽하지만 성경을 인간이 완벽하게 이해할 수 는 없습니다. 성경의 권위를 높이 두는 분들에게서 흔히 관찰되는 점은 자신의 성경이해 (혹은 우리의 성경이해)와 성경 자체를 동일시 한다는 점이죠. 우리가 읽어내는 성경이해가 완벽하지 않다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2. 두번째는 성경뿐만 아니라 자연도 하나님이 주신 책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과학은 하나님이 주신 자연이라는 책을 읽어 내는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성경과 자연은 하나님이 주신 두가지 책이고 하나님과 창조세계에 관해 서로 다른 목적과 메세지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성경읽기 혹은 성경해석과 자연읽기 혹은 자연해석인 과학은 실재에 근사하는 하나의 모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때문에 성경 읽기와 자연 읽기 사이에서 모순처럼 보이는 일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즉, 성경해석과 과학은 종종 충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과 자연은 저자가 동일하고 모순되지 않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성경과 과학을 직접 대비시킵니다. 그러나 사실 격이 좀 맞지 않습니다. 성경과 자연을 대비시켜야 하고 성경을 읽어내는 한 입장과 자연을 해석한 과학을 대비시켜 비교해야 격이 맞습니다. 창조과학은 근본적으로 자신들의 성경해석을 성경자체와 동일시하고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지요. 성경에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옳지만 자신들의 성경해석에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성경과 성경해석 사이에 있는 영원한 간극을 보지 못하는 오류입니다. 최근 페북논쟁을 보면 창조과학지지자들이 성서신학자들을 가르치려 하는 모습을 목격합니다.


성경은 진리이지만, 성경 해석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 한 단계 나간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성경이해를 성경 자체와 동일시하는 실수는 넘어설 수 있죠. 최근 논쟁되는 댓글들을 주욱 보면 성경과 과학을 대립시키는 대부분의 댓글들은 그 실수를 넘어서지 못합니다.




3. 그렇다면 두 개의 다른 성경해석이 있을 때 어떻게 해야하는가를 질문하는 분도 있습니다.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에 관해 성경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물어 온 역사가 사실 2000 년 교회사입니다. 창세기 1장의 경우, 근대과학의 성립이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새롭게 등장한 것이고 현대과학이 발전하고 있는 시점에 여전히 해석의 차이들에 대해서 의견들이 오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점은 위에서 2번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성경이라는 책 뿐만 아니라 자연이라는 책도 하나님의 책이라는 점입니다. 자연이라는 책과 성경이라는 책을 비교해서 봐야 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자연이라는 책을 읽어 해석해 보면 어떤 내용은 성경이라는 책을 해석한 내용과 다를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성경해석도 불완전하고 자연해석도 불완전하기 때문이죠. 이 때는 분명 자연에 대한 해석인 과학과 성경에 대한 해석인 성경읽기 (혹은 신학)을 돌아봐야하는 것입니다. 일방적으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과학은 세속적인 것이라고 보는 이원론적 관점을 갖고 있으면 결코 성경과 자연 두 책을 종합적으로 보는 시각을 기를 수 없습니다. 


4. 한 포인트를 더 이야기해야 겠네요. 과학은 계속변하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다는 뉴앙스를 풍기는 댓글들이 있는데 과학이 변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과학이 변덕스럽게 변하는 것은 아니죠. 오늘은 우주의 나이가 138억년이었다가 내년에는 만년이 되고 그런식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과학은 자연이라는 실재에 대한 근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성경해석도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주어진 성경(계시)은 불변하지만 성경에 대한 해석은 계속 변해왔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성경읽기는 하나님의 특별계시라는 실재에 대한 영원한 근사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대로 있고 과학은 변해는 것이니 성경은 믿을 수 있고 과학은 믿을 수 없다는 뉴앙스는 별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과 나의 성경이해 사이에는 간격이 있기 때문이고 나의 성경이해도 계속 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나 성경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바뀌는 것입니다.


과학이 변한다는 과학의 가변성은 오히려 과학의 장점입니다. 그만큼 실재에 다가간다고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성경해석이 변하는 것도 좋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성경이 원래 의미하는 메세지에 더 가까이 간다는 것을 의미하니까요. 그것은 성숙을 의미합니다. 

Posted by 별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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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패치아담스. 2015.02.17 18: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종학 교수님 안녕하세요. 이렇게 블로그를 통해서 처음 인사를 드리고 글을 남기게 되네요. 저는 무크따가 출간된 이후로 더 관심있게 유신진화론과 창조과학의 비판에 대해서 지켜보고 있는 사람 중에 한명입니다. 전부터 복음과 상황에서의 유신진화론에 대한 논의, 양승훈 교수님,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책을 통해서 창조과학의 창조신앙 문제점에 대한 이야기들을 읽고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일단 저의 경우 기존의 창조과학의 창조 신앙이 결코 건전한 신학적 바탕위에서 세워진 신앙이라고 할 수 없고, 분명히 과학으로서도, 신학으로서도 제대로 검증이 안 된 부분이 있다는 점에는 동의를 하는 바입니다. 또한 창조과학의 창조신앙이 성경을 왜곡해서 성경이 과학의 모든 것을 설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 대한 우려 역시 공감합니다. 이런 부분은 앞으로 한국 교회에서도 계속 검증하고 풀어야할 숙제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유신진화론을 주장하시는 분들이 입장을 살펴봐도 저의 신학적인 입장에선 분명히 문제가 있어보이기에 몇 가지 질문을 드립니다. 저는 전통적인 개혁주의 신학(칼빈주의)의 바탕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저도 이런 부분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는데 창조신앙에 관한 논쟁을 지켜보면서 내가 어떤 신학적 관점에서 신앙을 하고 있는 지에 대한 고민을 할 수 있었고, 그것을 통해서 제 신앙을 점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단 윗 글에서 말씀해주신 내용 중에 동의 할 수 없는 부분은 특별계시인 성경과 일반 계시인 자연을 동등한 권위선상에서 하나님을 설명하는 책으로 보고 있다는 점입니다. 일반계시는 철저히 특별계시를 보조하는 수단이지 결코 특별계시와 동등된 권위로 인정할 수 없는 게 개혁주의 신학에서의 입장입니다. (cf.개혁주의란 크게는 로마 천주교에 대하여 반대한 신학적 쇄신을 가르치고, 좁고 분명한 의미로 할 때는 `칼빈주의` 또는 `장로교`를 의미합니다. 우린 거기에 소속되어 있습니다.-박영선 목사) 칼빈은 일반계시를 통해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의식, 종교의 씨앗, 양심이 주어졌지만, 이것만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거나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식에 이를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물론 특별계시가 성령의 감화로 한 개인에게 임한 후에 일반계시의 영역이 특별계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일단 두 가지 책이라는 이 부분에서 분류가 잘못 되다보니 책읽기의 분류(성경해석 & 과학)에서도 문제가 보입니다. 과학은 분명히 말씀하신대로 그 자체로는 가치 중립적인 면이 많다고 보여집니다.(사실 온전히 가치 중립적이다라고 보기엔 우리의 부패한 지성이 가지는 한계로 인해 인정하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가치중립적이라는 데이터들이 창조주를 인정하는 가치로 해석되어 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학이 바탕이 되어야합니다. 왜냐하면 자연현상을 해석하는 과학이라는 책읽기가 자연 그 자체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닌, [신이 존재하는 것을 해석하기 위한 책읽기]로 전환될 때에는 반드시 특별계시를 통한 책읽기인 신학이 관여를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자연을 자연이란 객관적인 대상, 사물로 보지 않고 일반계시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이미 창조주를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럼 그 창조주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어떠한 분인지에 대해서 일차적으로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계시되어진 특별계시인 성경과 그것을 해석한 신학을 배제하고 동등한 권위에서 자연과 과학을 놓고 유신론적 책과 책읽기를 말할 수 있을까요? 오직 자연 그 자체에 대한 해석을 돌아보기 위해서는 당연히 신학을 참고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해석을 돌아보기 위해선 반드시 바른 신학 안에서 그 해석이 수용되어져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말씀하신 성경과 자연, 성경해석과 자연에 대한 해석(과학)을 동등한 권위에 두고 창조주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간단하게 문제점을 말씀드리자면, 유신진화론을 주장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신학이며 신앙이라는 점입니다. 교수님이 분류해두신 것처럼 따로따로 볼 수 없다는 것이지요. 어디까지나 특별계시 안에서 일반계시가 존재할 수 있으며(그렇지 않은 일반계시는 일반계시가 아니고 그냥 무신론자들이 생각하는 양심, 자연, 종교일 뿐이겠지요), 유신론적 자연 읽기 역시 신학 안에서 엄밀하게 논의되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사실 창조과학의 문제점은 과학의 과학되지 못함보다 창조신앙의 창조신앙되지 못함이 더 큰 문제가 아닐까요? 마찬가지로 창조과학을 비판하시면서 유신진화론을 주장하신다면 유신진화론적인 창조신앙이 진짜 창조신앙으로 고백되어 질 수 있도록 이런 신학적인 검증이 꼭 필요하다고 보여집니다.

    보신 적이 있으시겠지만 일전에 합신의 교수님들이 유신진화론의 문제점이라고 해서 배포한 내용을 보면 유신진화론이 기존의 개혁주의 신학에서 상당히 배치되는 내용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국 대부분의 교회들(장로교)이 개혁주의 신학을 근간으로 하고 있는 경우가 많기에 이 부분은 앞으로 사역을 하실 때 반드시 고려되어져야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올려드립니다.

    ------------------------------------
    유신 진화론’에 대한 합신 교수들의 입장




    유신 진화론은 현대 과학의 이론이 가정하는 진화론의 틀에 따라서 창세기 1장을 해석한다. 그러나 현대 과학의 이론이 가정하는 진화론의 틀이란 하나의 가설일 뿐 확정된 진리가 아니며, 그 가설을 따라 "하나님의 창조"를 주장하는 시도는 오류이다.

유신 진화론을 받아들일 경우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오류를 범한다.

    (1) 이분법의 오류: 유신 진화론은 성경을 단지 주관적 의미와 목적만을 말하는 것으로 보며, 객관적 사실은 과학이 말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신학적 사실과 의미조차도 성경의 정당한 해석에 근거하기보다는 오히려 진화론적 범례를 따르는 과학을 기초로 설명한다.



    (2) 이중진리의 오류: 유신 진화론은 동일한 진리가 한 편으로는 성경의 증거로, 다른 한편으로는 진화라는 과학적 증거로 제시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주와 인류의 기원에 관련해서는 진화론적 증거를 말하는 과학의 진리 인식이 성경의 증거보다 우월하다고 말한다.



    (3) 성경해석의 오류: 유신 진화론은 진화론에 따른 과학의 증거에 기초하여 기원을 설명해야 한다는 진리인식의 원리에 따라서 창세기 1장을 창조와 과정에 관한 역사적 사실의 기록으로 보지를 않는다. 단지 온 자연과 인간이 피조물이라는 의미만을 전달하는 문학적 기록으로 볼 뿐이다. 유신 진화론은 아담과 하와를 창조된 최초의 역사적 인물로 인정하지 않는다.



    (4) 창조와 섭리의 혼동: 유신 진화론은 창조와 섭리를 구분하지 않는다. 창조를 진화의 과정으로 환원시킨다. 그 결과 창조를 제 1원인이신 하나님의 직접적인 활동으로 보지 않으며, 단지 진화라는 제 2원인의 작용에 의한 것으로 해석을 한다.

    (5) 대표적인 교리의 오류들: 유신 진화론은 죄를 의지적 불순종으로 보지 않으며 성경적 죄의 개념을 부인한다. 모든 악은 자연의 본질적 상태로 이해할 뿐이다. 아담과 하와를 역사적으로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으로 여기므로 인간의 죽음이 그들의 타락의 결과로 인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으로 인한 구원도 연다고 주장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 진화하여야 할 정점에 는 오메가 포인트로 여겨질 뿐이다. 따라서 합신 교수들은 유신 진화론이 성경의 교훈에 어긋나는 그릇된 이론으로 판단한다.

    ---------------------------------

    마지막으로 교수님의 페북과 달리 이곳 블로그에는 창조과학회를 향한 직설적이고 노골적인 비판과 비난의 글들이 종종 보입니다. 비록 잘못되고 오류투성이인 창조신앙일지라도 아직 그런 부분을 충분히 숙지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런 점들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기도가 필요하고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고 보여집니다. 물론 창조과학회 학자들에게 교수님이 당하신 모욕이나 비난은 더 무례하고 더 노골적인 것 또한 인정합니다. 하지만 좀 더 믿음이 강한(이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넓은 시각과 데이터로 창조과학의 과학적 데이터를 비판하며 창조신앙을 논하신다는 관점에서) 우교수님께서 그런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을 잘 품고 겸손과 온유함으로 이 사역을 잘 감당하시기를 부탁드리며 기도드리는 바입니다.

    앞으로의 사역에 늘 그리스도의 향기가 가득하시길 바라오며, 어려운 일이겠지만 위에서 지적한 문제들 또한 계속 고민하시며 사명을 잘 감당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 별아저씨 2015.02.17 22: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쎄요. 페북과 제 블로그를 비교해서 블로그가 더 노골적이라니 재밌네요. 좀더 주의깊게 관찰을 하고 비교를 하셔야 겠네요. 시간에 따라 보세요. 블로그에는 직설적인 글을 쓰고 페북에는 다르게 쓰고 그런거 아닙니다. 최근에 블로그에 올린 글 중에 페북에 올리지 않은 글이 뭐 있나요? 제 블로그는 십년 이상 오래된 블로그입니다. 그때도 페이스북이 있었나요?

    유신진화론이라는 말을 정확히 어떤 의미로 사용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진화의 방법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보는 진화적 창조는 잘 알지만 많은 사람들이 비난하는 유신론적 진화론이란 말을 사람들이 어떻게 정의하는지 잘 모르겠네요.

    특별계시와 일반계시에 대해 얘기하셨군요. 오해를 하신것 같네요. 일반계시는 특별계시에 대해 보조적인 것이다라는 얘기를 하셨네요. 당연한 얘기죠. 하나님이 누구고 구원의 길이 무엇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이것은 당연히 특별계시를 보아야죠. 자연계시에서 찾을수 없습니다. 힌트만 얻을 수 있을 뿐이죠. 반면 어느 식물이 몸에 좋은지에 대한 답을 얻으려면 자연이라는 책을 봐야죠. 성경에는 답이 없습니다. 자연신학의 한계는 제가 블로그 글에서도 주장하고 있는 바죠. 그런데 윗글처럼 주장하시는 것을 보니 제 입장을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

    제가 어떤 주장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으시면 전체적으로 파악하셔야 합니다. 오리진이라는 책은 개혁주의 관점에서 쓰여진 책이죠. 한국에서 개혁주의라고 말하는 내용이 워낙 칼빈과도 달라서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오리진을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한국교회가 반지성주의와 성경해석의 오류와 도그마를 벗어나도록 계속 기도해 주십시요

  3. 길가던 나그네 2015.02.18 09: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윗님의 글을 보면서 느끼는 점은 한국에서 개혁주의 신학이 큰 영향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개혁주의 신학이 모든 믿음을 아우르는 단일 신학은 아니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예로 웨슬리 신학을 따르는 교단에서는 신앙과 과학의 관계를 다르게 설정하고 있죠. 최근에는 과학의 발견을 많이 수용하는 추세이기도 하고 유신진화론도 이해하고 수용하는 입장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만이 진리다라고 말하지는 않고 항상 열린 입장에서 생각하는 듯 하더군요. 결국 신학 입장에 따라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고 할 때 개혁주의에서 이렇게 생각한다라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다른 사람도 개혁주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약간 지나친 감이 있어 보입니다. 사실 이런 면에서 개혁주의가 비판받는 것이기도 하구요.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특별계시가 일반계시보다 앞서야 한다는 점에 동의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특별계시에 대한 해석권한이 신학자에게만 있다거나 목회자들에게 있다거나 개혁주의 신학에만 있다고 설명한다면 받아들이기 힘들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정신에 따라 특별계시는 모든 믿는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고 모든 믿는 사람들이 특별계시를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는 권리와 책임이 있는 것이죠.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영역주권을 주장하는 분들 중에 신학, 특히 개혁주의 신학이 모든 영역주권의 영역에서 전제가 되어야 한다라고 설명하는 분들이 있는데 여기서 해석의 차이가 발생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영역의 전제가 특별계시이지만 이 때 특별계시는 각각의 믿는 사람에게 주어진 믿음과 성령의 은사가 되어야 하고 그에 따라 각 영역이 발전한다고 할 때 신학, 또는 개혁주의 신학도 과학이나 정치, 예술과 같이 그 영역의 하나이지 그 모든 영역의 전제로 생각하기는 힘들다는 생각입니다. 따라서 성경해석도 하나의 영역으로 분류되어야 하지 다른 영역의 전제가 되야한다라는 것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해석도 하나의 해석과 해석의 합의가 이론이 되고 그 이론이 사실의 발견(새로운 사본의 발견 등)에 따라 변화되고 발전되는 것이죠. 근본주의신학에서 성서무오류를 주장할 때 사본의 무오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원본의 무오류를 주장하는 것이죠. 그런데 지금 원본은 없고 사본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원본에 얼마나 가까운지 해석이 필요하고 그에 따른 합의가 필요합니다. 신학의 사본만 3000개가 넘고 사본 사이의 차이가 많죠. 그래서 성서비평이 필요합니다. 이런 점에서 보수신학에서 성서의 편집을 주장하는 higher criticism을 비판하는 것이지 성서의 원본을 가리려는 lower criticism을 반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구약도 사본간 차이가 크지는 않다고 하지만 사해사본이 발견되기까지는 대략 초대교회 이후 몇 백년씩 지나서 제작된 사본이 사용되었고 구약 사본간에도 차이가 있기 때문에 항상 해석이 수반되고 그에 따른 합의가 필요하고 이것도 달라질 여지가 존재하죠. 이런 것들을 생각해 볼 때 히브리어나 헬라어로 된 사본을 번역한 영어를 비롯 각 나라의 성경은 이미 번역자의 신앙관이 이미 들어가 있는 것이고 그에 터해 발전한 신학도 모두 신학자들의 해석과 그에 바탕한 합의가 전제된 것이죠. 신학자나 목회자도 모두 성령의 은사에 따라 무오류의 특권을 받은 분들이 아니고 신학교에서 정해진 커리큘럼에 따라 일정한 해석의 교육을 받고 특정 학파의 해석을 받아들인 분들이라는 점에서 이 영역도 하나의 영역이 되어야 하지 특별계시를 독점할 수 있는 권한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성경해석의 훈련을 받은 분들은 그 영역에서, 과학해석의 훈련을 받은 분들은 그 영역에서, 각자의 은사를 활용해 가면서 하나님의 계시를 발견해 가는 것이 더 맞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점에서 100%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두개의 책 개념은 나름 유용하다는 생각이 들고 이런 논의들이 많이 나와서 서로 토론하고 비판해가면서 더욱 발전시킬 필요도 있을테구요.

    두서없이 너무 많이 썼네요. 다음에 생각나면 더 쓰겠습니다.

  4. 요헤이니 2015.02.18 17: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우종학 박사님~
    박사님의 주장에는 크게 신학적인 흠이 있습니다. 감히 서울대 박사인 나에게 너 따위가 도전해? 라는 시선으로 보지 말아 주시고..
    명확하게 답변 부탁드립니다.

    성경은 인간이 죄를 지어 타락되어 죽음이 이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박사님 말씀은 수많은 죽음을 통해 인간이라는 종자까지 진화되었다고 말합니다.
    로마서 5장16절과 정확히 반대되는 사실이죠.

    2.눅3장38절에 아담 위는 하나님이시라고 분명히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원숭이의 존재는 있지 않습니다. 만약 원숭이가 있는데 적혀 있지 않는다고 치자라고 해서 그렇게 전제한다면, 예수님의 믿음의 족보에 원숭이가 들어갈 수 있단 말입니까?

    저번에 물어봤으나
    묵살 당했기에 블로그에서 질문드립니다.

    • 별아저씨 2015.02.18 21: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는 서울대 박사가 아닙니다. 예일대 박사입니다. 저를 공격하시는 분들은 대부분 사실관계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네요.

      저는 천체물리를 공부했기에 신학적인 면에서 박사인 나에게 너 따위가 도전해 이런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지한 사람의 무지의 정도에 대해서는 소통을 위해 측정하는 편입니다.

      몇가지 질문을 하셨네요. 묵살 당했다고 하셨네요. 제가 물어보는 거 다 답하실 것도 아니면서 마치 제가 대답해야 될 책임이라도 있는 듯이 물어보셨네요. 남의 블로그에 와서 누군지도 밝히지 않고 궁금해서 묻는 것도 아니고, 예의를 갖추어 물어보는 것도 아니고, 제가 왜 대답을 해야하는지 잘은 모르겠습니다. 질문이 의미가 있으면 당연히 답을 해드리겠지만 말입니다. 묵살당하니 답답하신가요? 묵살당하는 저는 어떨까요?

      답을 찾을수 있는 길을 다 제시했는데 이렇게 물어보는 것은 사람들이 게으름이라고 부릅니다. 대답을 해 볼까요?

      하루살이는 몇째날 창조되었을까요? 잘 아시겠죠? 그렇다면 하루살이는 언제 죽었을까요? 아담은 창조된 날 바로 범죄했을까요? 아담 전에 생물의 죽음이 있었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게 알수 있습니다.

      죄로 인한 죽음의 의미는 신학적으로 다양한 해석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죽음을 의미하죠. '오리진'의 뒷장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원숭이에서 사람이 진화했다고 믿으면 무지하다는 소리를 듣게됩니다. 생물진화이론은 원숭이에서 사람이 진화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5. 진짜루 2015.03.04 21: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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