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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위한 독서칼럼] 새로운 세계로의 여행 - 우종학

별아저씨의집 2014. 3. 22. 13:05

2014년 초에 국립어린이도서관에 기고한 글입니다. 

출처는 

http://www.nlcy.go.kr:8089/column/column/view.dio?year&month&page=1&pagelistno=1&seq=151&search_title&search_value


새로운 세계로의 여행 

우종학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 

학창시절을 돌아보면 나는 그리 싸움을 잘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원래 내성적인 성격에 말주변도 없어서 친구도 많지 않았다. 반면 모험을 좋아했고 새로운 세계를 동경했다. 옥상에 누워 뭉게구름들을 보면서 저 하늘을 뚫고 올라가면 어떤 세계가 펼쳐질까 상상하기도 했고 외국어를 쓰는 먼나라를 활보하며 이국적인 삶을 사는 꿈을 꿔보기도 했다. 제한된 나의 현실에서 벗어나 무한한 상상의 세계로 나를 데려가 준 것은 바로 책이었다. 

책을 좋아하게 된 몇가지 일화가 있다. 친누나가 어느 퀴즈 프로그램을 보러 방송국에 갔다가 입상을 해서 소설과 전기를 비롯한 몇몇 전집을 받아온 일이 있었다. 스마트폰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 혼자서 집에서 시간을 보내던 나에게 그 책들은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담임선생님 추천으로 어린이도서관 겨울방학 프로그램에 참가한 일도 있었다. 사직공원에 있던 어린이도서관은 내가 가 본 첫번째 도서관이었다. 개가식 열람실에는 내가 좋아했던 SF공상과학소설책이 책장 가득 꽂혀 있었고 명작추리소설이나 과학백과사전 등등 새로운 세계로 손짓하는 책들이 넘실거렸다. 열람실을 훝어가며 감탄사를 쏟아내던 그 때의 훙분을 아직도 어렴풋이 기억한다. 그 후 틈만 나면 도서관에 놀러가서 이 책 저 책 을 꺼내들고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는 재미를 만끽하곤 했다. 

입시에 찌들던 고교시절에도 가끔씩 고전을 읽었다. 자습시간에 톨스토이의 ‘전쟁과평화’를 읽다가 들켜 압수당한 기억도 있다. 대학시절엔 정말 많은 책을 읽으려고 노력했다. 대학 도서관은 말그대로 보물창고였다. 열람실마다 천장까지 닿는 책꽂이에 온 세상의 지식과 경험들이 차곡히 담긴 책들이 가득했다. 이 책들을 다 섭렵하리라, 뭐 그런 야침찬 다짐도 했고 대학시절 동안 최소한 고전이라 불리는 책들은 다 읽겠다는 목표도 세웠다. 

특히 소설을 좋아했다. 거기엔 나와 다른 삶의 궤적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일상이 펼쳐진다. 나는 그들의 삶 한복판에 뛰어들어 어느새 그들의 일부가 되어버린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의 형제들’ 을 읽으면서 나는 러시아 상류사회를 누비는 귀족이 되었고 존 스타인백의 ‘분노의 포도’를 읽으면서 캘리포니아 포도농장에서 일하는 농부가 되었다. 책의 주인공에 빙의되어 찐한 사랑을 하기도 하고 배신과 고독을 맛보기도 했다. 청년의 사랑과 열정, 중년의 성공과 풍요, 그리고 고독을 경험하며 나는 인생이 과연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했다. 

마치 평행우주에 사는 또 다른 내가 존재한다는 얘기처럼, 나는 현실과 책이라는 두 개의 시공간에 동시에 존재했다. 20세기 서울에 갇혀 있던 나와는 달리, 책 세상 속의 나는 화성과 블랙홀을 마음껏 여행했다.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거나 만주벌판을 달리기도 했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심심하게 반복되는 나의 일상에 비하면 책 세상은 흥미진진하고 가슴벅찬 세계였으며 때로는 가슴아프고 아련한 세계였다. 두 개의 시공간을 살고 경험하는 만큼 내 인생은 몇배로 풍요로와졌다. 

지금도 나는 ‘공휴일에는 책 한 권’이라는 모토를 갖고 있다. 종종 하루 종일 책에 홀딱 빠지져 있기도 한다. 책이 열어준 세상을 통해 성장해 온 것처럼 앞으로도 나는 책이 열어주는 세상을 잃고 싶지 않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나의 세계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 그리고 한국을 넘어 지구촌과 우주까지 넓어지도록 지평을 열어준 것은 바로 책이었다. 책은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는 스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