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원고를 넘기면 편집주에서 수정을 합니다. 그런데 잘라내고 붙이는 일을 하면 글의 호흡과 운율이 엉망이 되어버립니다. 이번엔 1751자에 맞춰 1글자 오버했는데 200자나 잘렸습니다. 원글을 올립니다.
[매경 사이언스플라자] 2013년 11월 20일 칼럼
이중잣대와의 싸움
우종학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
내가 하면 로멘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이 있다. 같은 사건에 대해 다른 기준을 적용하는 이중잣대를 칭하는 말이다. 이중잣대가 흔한 영역은 정치분야가 아닐까. 야당시절에 만든 법을 여당이 된 후에는 위헌이라며 폐기하려는 정치인들이 대표적이다. 대통령의 이름을 불렀다며 석고대죄하라는 어느 정당은 과거에 자신들이 대통령을 모욕했던 기억을 안드로메다로 보냈나 보다. 선거공약에 대한 정치인들의 태도는 선거 전과 후에 하늘과 땅 차이로 바뀐다. 이중잣대 일화를 쏟아내는 정치기사는 씁쓸함과 분노로 소비되고 정치에 대한 불신으로 이끈다.
사법부는 어떨까? 같은 살인교사죄를 범해도 누구는 감옥에 가고 누구는 돈으로 버무린 진단서로 호화로운 병원생활을 즐긴다. 민생범죄는 단호히 처벌하는 반면 죄질이 더 무거운 기업비리나 경제사범은 느슨하게 처벌하는 법원의 이중잣대는 무전유죄라고 비판받는다. 피의자는 서면조사하고 참고인은 소환조사한다는 검찰의 불합리한 발상도 정치적 이중잣대라는 논란을 일으켰다.
경제분야에선 이중잣대의 부조리가 피부로 체감된다. 같은 휴대폰이지만 누구는 공짜로, 누구는 제 값을 다 주고 구입한다. 발품을 덜 팔았다며 정보력 차이라며 억울한 소비자를 탓할 수 있을까? 종교도 별반 다르지 않다. 북의 독재자를 악으로 규정했던 개신교는 군사독재 시절, 모든 권력은 신에게서 나온다며 독재를 옹호했다.
국제분쟁에서도 이중잣대 현상은 첨예하다. 일제시대 중국 상하이에서 폭탄을 던져 다수의 사상자를 낸 사건을 우리는 독립운동이라 부르고 일본에서는 폭탄테러라고 한다. 최근 국사교과서의 역사서술도 이중잣대 논란을 일으켰다.
이중잣대는 흔히 정치경제적 이익 때문에 발생한다. 자신에게 유리한가 불리한가에 따라 다른 판단기준을 적용하는 일은 부조리하고 불합리하다.
경험적 데이타를 중시하는 과학은 원칙적으로 이중잣대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나 데이타를 해석하는 일은 인간이 하기 때문에 과학도 이중잣대로부터 자유롭지는 않다.
논문 심사를 예로 들어보자. 과학논문은 동료심사 제도에 따라 같은 분야 학자들이 심사한다. 그런데 저자의 소속기관이나 배경 등을 토대로 이중잣대가 적용되기도 한다. 초짜 대학원생이 쓴 논문은 일단 의심한다거나, 유명한 교수의 논문은 일단 믿고 허술하게 심사하는 일도 생긴다.
이런 폐해를 막고자 제안된 것이 이중익명제도(double blind system)다. 논문심사자가 누군지 밝히지 않는 것처럼, 심사자에게도 논문저자를 알려주지 않는 제도다. 저자를 모르면 저자에 대한 선입견에 의해 생기는 이중잣대가 해결되지 않을까? 반면 저자들의 선행연구나 전문성 등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저자를 알려줘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거꾸로, 심사자가 누군지 밝히는 공개심사제도도 제안되었다. 이 경우에는 심사자가 부담을 느껴 심사를 꺼리거나 익명심사에 비해 오히려 공정하지 못할 수 있다는 반론도 있다. 완벽한 심사제도를 만들기는 어렵겠지만 연구윤리를 세우려는 일련의 노력은 과학을 더 과학답게 한다.
이중잣대에 익숙한 사회는 불행하다. 차별을 넘어 성숙한 사회로 가려면 이중잣대와 싸워야 한다.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이중잣대의 피로감이 걱정이다. 이런 사회에서 자라는 세대에게 어떤 기준을 심어주고 교육시켜야 할까.
이중잣대에 면역이 된 세대가 사회에 나가면 악순환이 될 것은 분명하다. 과학도 귀에 달면 귀걸이 코에 달면 코걸이가 된다고 생각할까봐 염려스럽다. 정치 경제 과학 모든 분야에서 우리는 오늘 나 혹은 내가 속한 집단에게 올 이익보다는 미래에 우리사회가 겪을 폐해에 주목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