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이야기/과학칼럼 & 과학에세이

한 여름밤의 추억

별아저씨의집 2011. 10. 24. 02:49
지난 여름, 현대자동차이던가, 어느 사보에 한 여름밤에 관련된 추억 이야기를 짧게 써달라고 원고청탁을 받았더랬습니다.

귀찮기는 했지만 일단 '짧은 글'이라는 유혹에 넘어갔지요. 물론 방학때라 여유도 좀 있었구요. 천문학을 알릴수 있는 기회는 최대한 이용해야한다는 사명감도 있었나 봅니다.

사보는 벌써 나왔을텐데, 한권 보내주지도 않는군요. 어떻게 편집했고 어떻게 레이아웃이 들어갔는지 궁금했는데 말입니다.

어쨌거나 오늘 집에서 작업을 하다가 원고를 발견해서 여기 올립니다.




한 여름밤의 추억

 

우종학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교수. ‘블랙홀 교향곡의 저자)

 

여름방학을 맞아 멀리 시골 외갓댁에 내려온 어린 마음이 들떴던 탓일까요? 모두 잠든 깊은 밤, 소년은 홀연히 잠이 깼습니다. 자장가처럼 들리던 할머니의 코고는 소리를 뒤로 하고, 소변끼를 느낀 소년은 눈을 비비며 대청마루를 지나 앞마당으로 내려왔지요.

 
마당 끝, 돼지 우리 옆에 있던 으시시한 변소를 갈 생각을 하니 몇 발짝 내딛던 걸음이 힘을 잃습니다. 무척이나 깜깜한 시골의 밤은 마치 이 세상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듯한 묘한 느낌을 줍니다. 멀리 가로등 불빛이 아른거리고 어슴푸레 보이는 감나무, 밤나무가 거대한 괴물 모양으로 보이자, 움츠러든 소년은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봅니다. 고요한 세상, 마치 시간이 얼어버린 듯 합니다.


 
문득, 하늘을 쳐다봅니다. 누군가 저 위에서 손짓하는 것 같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갑작스레 눈에 들어온 광경은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합니다. 잠들어버린 세상과는 대조적으로 저 하늘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습니다. 붉게, 푸르게, 노랗게, 하얗게 각기 다른 색깔로 깜빡거리는 별들이 아지랭이처럼 하늘하늘 흔들거리고 있습니다. 구름처럼 보이는 은하수가 촘촘하게 박혀있는 별들 사이를 지나 강물이 흘러가듯 유유히 밤하늘을 가로질러  흐릅니다.

 
우두커니 서서 별들을 만나던 소년은 갑작스레 위대한 인간이 됩니다. 자신을 넘어 우리 동네를 넘어 그리고 지구를 넘어, 위대한 우주의 일부가 된 소년. 그 정지한 시간에 별과 맞닥뜨린 소년에게 우주는 무한한 상상력과 새로움을 내려주기 시작합니다. 무한히 멀지만 손에 잡힐 듯이 빛나고 있는 별들을 만나러, 소년은 매일 밤 대청마루를 건너 앞마당에 나옵니다.



우주에 대한 동경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 초등시절 어느 여름방학에 엄마를 따라 내려갔던  시골 외갓집에서 만난 밤하늘의 별들. 그 잊혀지지 않는 기억은 내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 경이로웠던 경험은 저 바깥 세상에 대한 끝없는 동경을 뿜어냈습니다.

 
그 후로 추운 겨울에도 옥상에 올라가 밤하늘의 별자리를 보는 것이 버릇이 되어버렸고 망원경을 사달라고 조르는가 하면 과학백과사전을 달고 살았습니다. 못생기고 싸움도 못하던 나를 별은 저 무한한 우주공간으로 데려가 주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우주의 비밀을 품고 거대한 우주의 일부가 되어 사는 어린 마음은 정말 위대한 마음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오늘, 우주가 끝없이 주었던 에너지 탓이었는지, 나는 별과 블랙홀을 연구하는 천문학자가 되었답니다. 서울 하늘에 별로 별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쉽지만 오늘도 나는 밤하늘의 별들을 올려다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