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종학의 글과 칼럼

[209호 과학칼럼] 좁디좁은 우물 안을 박차고 나와라 - 복음과상황 08년 3월호

별아저씨의집 2008. 3. 1. 04:40
[복음과 상황 209호 과학칼럼] 좁디좁은 우물 안을 박차고 나와라

선택효과

영국의 유명한 천체물리학자인 아서 에딩턴 경은 이런 얘기를 했다. 어떤 어부가 10센티미터 간격으로 짜여진 그물을 깊은 바다에 던졌다. 끌어올린 그물에는 10센티미터 보다 큰 고기들이 가득했다. 만족스런 얼굴로 고기들을 내려다보던 어부는 이렇게 결론내렸다. 깊은 바다에는 10센티미터 보다 작은 고기는 살지 않는다고.

이 얘기는 어떤 현상을 연구할 때 꼭 점검해 보아야하는 소위 '선택효과(selection effect)'의 위험성을 잘 보여준다. 그물망이 10센티미터니까 그보다 작은 고기들은 그물 밖으로 빠져나갔을 뿐인데, 작은 고기들이 없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심각한 오류다. 과학에서 이런 일은 종종 일어난다. 특히 새롭게 발견된 현상이라든가 아직도 우리의 이해가 부족한 대상들의 경우에는 모종의 선택효과로 인해 잘못된 결론이 내려졌다가 차후에 그 오류가 밝혀지기도 한다.

우주의 다양한 대상을 연구하는 천문학에서도 이 선택효과는 매우 중요하다. 블랙홀의 예를 들어볼까? 블랙홀들은 주변의 가스를 빨아들이면서 엄청난 에너지를 뿜어내는데 특히 고에너지에 해당하는 엑스레이 선이 많이 방출된다. 그래서 엑스레이를 볼 수 있는 엑스레이 망원경으로 우주의 구석구석을 탐사해서 블랙홀을 찾아내기도 한다. 그런데 어떤 과학자가 이렇게 엑스레이 망원경으로 찾은 블랙홀들을 연구해서 내린 결론을 일반화시켜서 모든 블랙홀에 적용했다면 거기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엑스레이를 내지 않는 블랙홀들도 분명 존재하는데 그런 블랙홀은 전혀 다뤄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선택효과를 고려하지 않은 이런 논문의 심사가 내게 맡겨진다면 바로 탈락이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선택효과는 항상 존재한다. 새로운 옷을 입고 출근을 했다고 하자. 주변 사람들이 옷이 멋지고 잘 어울린다고 말한다. 그러나 칭찬하는 사람들이 주로 말을 하기 때문에, 부정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의 의견은 상대적으로 듣기 어렵다. 정말 옷이 어울리는 지를 알아보려면 말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한번쯤 물어야 한다. 어떤 실망스런 답이 나올지도 모르지만.

선택효과, 편견, 일반화, 그리고 우물 안 개구리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새로운 영어교육 방침으로 나라가 시끄럽다. 미국에서 오렌지라고 하니까 못 알아듣고 오린쥐라고 하니까 알아듣더라, 그러니까 영어발음 향상을 위해 외래어표기법을 바꿔야 한다고. 가끔은 개그콘서트보다 재밌는 일들을 뉴스채널에서 볼 수 있음을 실감하면서 그 정도는 웃어줄 만도 하겠다. 하지만 쏟아지는 새 정책들을 보면서 도대체 이 분들은 깊은 바다에 어떤 고기들이 있는지 과연 조사해보고 결론을 내린걸까 하는 의구심도 짙어진다. 10 센티미터 간격의 그물 하나만을 가지고 수행한 조사는 하지 않은 것만 못하다. 영어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은 길이길이 해야겠지만 내가 놀랐던 것은 제시된 정책이 담고 있는 좁디좁은 시각, 그리고 반대 의견을 알아듣지 못하는 그 먹통스러움이다. 진중권 교수가 지적한대로 도대체 한국말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이분들은 영어지상주의라는 우물 안에서 결코 한발자국도 나가지 않겠다고 결심한 듯하다.

십년에 가까운 세월을 미국에서 보내는 동안, 미국은 이런가 혹은 저런가에 대해 질문하게 될 때가 많았다. 현명한 친구들로부터는, 미국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자란 동네는 이렇다라는 식의 대답을 듣곤 했다. 워낙 나라가 넓고 지역에 따라 문화 차이가 있어서 자신이 경험한 좁은 우물 안의 이야기를 미국 전체의 이야기로 일반화시키지 않으려는 조심스런 태도이다.

흔히, 우물 안에 갇혀있는 사람들은 우물 벽을 지키기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전투적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들은 여러모로 무섭다. 한국 우물에서 미국 우물로 갈아탄 사람은 더 무섭다. 자신이 우물 밖에 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유럽이나 아시아의 여러나라에 갈 때마다 나 스스로에게서 발견되는 것이기도 하다.

선택효과와 과학교육

매년 겨울에 열리는 미국천문학자들의 연례학회에는 크리스천 과학자들이 함께 점심을 먹는 기회가 있다. 게시판에 붙여놓은 메모를 보고 한번 와봤다는 대학원생들을 비롯해서 벌써 십년째 꼬박꼬박 이 모임에 참석하는 교수들도 있다. 나도 이 학회에 갈 때마다 이 점심 모임에 가곤 하는데 지난 1월에도 삼사십 명 정도의 크리스천 과학자들이 그렇게 점심을 함께했다. 그 자리에서 마틴 교수는 재밌는 얘기를 풀어냈다. 매학기 교양과목을 가르치는 그는 수업을 통해서 학생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반기독교적 냄새를 물신 풍기는 교수에게 수업을 듣는 것과 마틴과 같은 크리스천 교수에게 수업을 듣는 것은 현격한 차이를 드러낸다. 특히 대학을 막 들어온 20세 전후의 젊은이들의 경우, 과학이라는 막강한 권위를 쥔 교수가 기독교를 어떻게 취급하냐에 따라 심각한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마틴 교수는 첫 시간에 나눠주는 과목소개 복사물을 통해 자신을 크리스천이라고 소개하는데, 때로는 그 소문을 전해들은 학생들이 기독교에 대해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교수가 가르치는 과목을 취소하고 자신의 수업으로 이전해 오기도 한단다. 얼마 전에는 한 학기 내내 조용했던 한 학생이 마지막 수업시간에 낸 강의평가서에 이렇게 적었다. 수업을 통해 얻은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자신이 신을 믿게 된 것이 가장 큰 소득이라고. 물론 마틴 교수가 수업시간에 복음을 직접 소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학생들을 위한 그의 기도를 통해, 그리고 매 수업시간에 성실히 임하는 자세와 신앙과 과학을 조화롭게 보는 그의 세계관을 통해 성령 하나님이 일하신 것이리라.

어떤 학생은 대학에 들어와 첫 학기부터 무신론자인 과학자에게 수업을 들으며 신앙이 흔들린다. 몇 학기 계속 그런 교수들을 만나고 비슷한 부류의 친구들 틈에서 지내다보면 어느새 무신론자가 되어있기도 한다. 마치 기독교를 믿는 것 자체가 지적으로 불성실하다고 믿는 우물 안에 사는 개구리가 되는 것이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 근본주의적 신앙의 가정에서 자란 학생들은 부모들로부터 대학에 가면 진화이론을 가르치는 생물학 같은 과목은 아예 피하라는 조언을 받는다. 학기 초, 과학수업 시간에 다룬 내용을 부모님께 얘기했다가 그 과목을 철회하라는 조언을 받기도 한다. 극단적이긴 하지만 이렇게 과학과목을 계속 피하는 경우, 과학은 신앙의 적이라는 결론을 철석같이 믿는 우물 안 개구리의 인생을 피할 수 없게 된다. 한쪽의 얘기만 선택해서 듣다보면 좁디좁은 우물 안에 갇힐 수밖에 없음은 당연하다.

함께 점심을 먹는 크리스천 천문학자들이 종종 화두로 꺼내는 문제는 어떻게 하면 제대로된 과학교육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반기독교적 정서가 팽배한 대학사회에서 무신론적 과학이 아닌 과학, 그리고 반과학적 정서가 팽배한 크리스천 학생들에게 반기독교적 과학이 아닌 과학, 이런 제대로된 과학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는 매학기 고민해야 할 문제다. 그래서인지, 마틴 교수는 학기가 시작할 때 쯤이면 이메일리스트를 통해 과학교육의 중요성을 우리들에게 되새겨주곤 한다.

좁은 우물을 벗어나 과학의 세상으로

과학에 대한 크리스천들의 편견은 대부분 선택효과에 기인한다. 특히 진화-창조 논쟁에 관련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한마디로 말해 다른 이야기를 들어 볼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가령, '진화이론은 과학이 아니다. 가설일 뿐이다'라는 얘기는 기독교의 편견으로 중무장된 우물의 벽 안에서만 돌고 도는 얘기일 뿐이다. 신앙과 과학에 대해 강의를 하거나 기타 여러자리에서 대화를 나누다 보면 진화이론에 대한 크리스천들의 부정적 견해는 놀라울 정도로 일치한다. 그러나 정작 깊이 들여다보면 진화이론의 탄탄한 과학적 증거들에 대해 제대로 들어봤거나 공부해 본 경우는 별로 없다. 대부분 진화론을 반대하는 창조과학의 시각들을 (본인이 원한 것은 아니라고 해도) 선택적으로 들어봤을 뿐이고, 오랜 반복학습을 통해 강화되고 굳어진 그러나 과학적으로는 불충분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견해를 당연스레 받아들이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10센티미터 보다 작은 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굳게 믿는다. 물론 이렇게 선택효과가 발생하는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창조과학회 분들이 열심히 활동하시는 반면 진화이론을 과학적으로 잘 설명해주는 크리스천 과학자들의 저술이나 활동은 거의 전무하고 번역물이나 기타 자료들도 매우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기독교적 입장 밖에서 쓰여진 훌륭한 책도 많지만 이런 책들은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에게 결코 선택되지 않는다.

그러나 좁디좁은 우물 안에서나 회자되는 과학에 대한 비과학적 주장들을 가지고 세상을 섬길 수는 없다. 과학의 논리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그만큼 우리가 과학을 알아야한다. 크리스천들이 갖는 과학에 대한 편견을 보면서 세상사람들은 복음도 같은 수준으로 취급한다. 과학을 이해하는 수준이 그 정도면 그들이 말하는 복음이란 것도 별 볼일 없을 것이라고. 우리의 지적불성실함이 복음이 전해질 창구를 막아버린다면 그건 전적으로 우리의 잘못이 아닌가.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세계를 편협하게 만들어서는 안된다. 크리스천이라면 그리고 진화-창조 논쟁이 심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최소한 과학과 신앙의 관계를 다루는 입문서 한 권은 꼭 읽어야 한다. 과학과 신앙에 대해 폭넓은 시각을 배워야 한다. 영어읽기가 가능한 분들에게는 인간 게놈 프로젝트의 책임자인 프란시스 콜린스 박사의 'The Language of God (하나님의 언어)'라는 책을 권하고 싶다. C.S 루이스를 흠모하는 콜린스 박사의 이 책은 자신이 무신론자에서 크리스천으로 변해간 과정을 자전적으로 다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 과학계의 최전선에 서 있는 한 사람의 생물학자로서 진화이론에 대한 최신의 과학 증거들을 잘 제시하고 있다.

과학에 대한 크리스천들의 편견을 어떻게 깰 수 있을까? 그것은 좁디좁은 시각으로만 과학을 보는 선택효과를 부수어야만 가능하다. 많은 크리스천들을 우물에서 탈출시키기 위해서는 각종의 그물이 필요하다. 촘촘한 그물을 써서 잡아올린 작은 고기들을 눈 앞에 보여주어야 한다. 선택효과로 인해 잘못 도출된 과학의 결론들도 물론 그렇게 수정되어 왔다. 자, 누가 촘촘한 그물을 짤 것인가? 누가 다양한 고기들을 보여 줄 것인가?

지난 1월에 한남대에서 열린 창조론 오픈 포럼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지구의 나이가 만년이 아니라 과학이 보여주는 것처럼 훨씬 오래되었다는 주장이 몇몇 분들에 의해 공식적으로 제기되었다. 지난 30년의 한국창조과학회의 흐름을 보았을 때 이것은 우물 벽을 깨는 획기적인 일이라 평가된다. 그러나 갈 길은 멀다. 지구의 나이가 만년이 아니라 수십억 년임을 인정하는 일은 기독교가 뒤집어 쓰고 있는 반지성과 무지의 비난을 이제 겨우 한풀 벗겨내는 일에 불과하다.

과학 뿐만 아니다. 내가 가진 것이 최고요 전부라는 착각은 크리스천인 우리 삶의 전반에 깔려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독선과 무례함의 우물 벽이 높이높이 쌓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복음의 진리는 분명하나 기독교의 모든 사회문화적 요소가 세상의 규범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라는 종교적 울타리, 그 좁디좁은 우물을 깨뜨려야 한다. 넓은 세상에 사는 일, 다원화된 사회를 직면하는 일은 쉽지 않다. 여러가지 의견을 들어보고 하나를 선택하는 일은 본질적으로 피곤하다. 그래서 우물 안 개구리의 삶은 훨씬 안락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안락한 우물 안에 임하지 않는다. 그의 통치는 그가 창조한 다양한 세계 안에 이루어질 것이다. 그의 나라를 우리의 편향된 우물 안에 가두는 일은 멈춰야 한다.

좁디좁은 우물 안을 박차고 나와라.

필자 소개
예일대 천문학 박사. 캘리포니아 대학 산타바바라의 물리학과에서 거대블랙홀에 대해 연구 중이며 국제학술회의/국제학술지 논문발표, 논문 심사, NASA 우주망원경들의 프로포잘 리뷰 등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한국에서는 IVF와 기독교학문연구소를 섬겼고 미국에서는 코스타를 섬기고 있다. 기독과학자들의 모임인 American Scientific Affiliation의 멤버. 복상과는 98년부터 필자로 관계를 맺었고 창조—진화 논쟁과 지적설계 논쟁, 그리고 신앙과 과학에 관련된 글들을 기고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