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고민하다/손가락 가는 대로

부활절 메세지 - 죽는 것과 열매 맺는 것

별아저씨의집 2009. 4. 17. 06:38
이번 부활절 예배의 메세지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가르침이었다. 

긴 여행 뒤에 골골한 몸을 붙들고 꼭 해야 하는 일들을 처리하다 보니 메세지에 대한 묵상도 늦어버렸다. 7월 말이면 십년 동안의 미국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가야한다는 생각에 모든 메세지들이 그 컨텍스트에 맞추어 귀에 들어온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수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은 사실,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을 빗대어 말한 것이라고 한다. 죽음을 앞에 두고 그 길을 가야만 모든 사람들에게 영생의 길이 주어진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 말씀을 전하신 그분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 길은, 예수님이 결국 걸어내신 그 길은 그의 제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요구되는 길이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 

이 가르침에서 생각해 볼 만한 재밌는 것은 죽는 것과 열매를 맺는 것의 주체가 다를수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죽어서 내가 열매를 맺을수 있다면 그것은 해 볼만하다. 죽는 일을 하나의 치뤄야 할 과정으로 여기고 댓가를 치르고 나중에 수많은 열매를 맺을수 있다면 그건 누구라도 해 볼만 하지 않은가? 그러나 역사를 돌아보면 땅에 떨어져 죽는 사람 따로 있고 그 희생을 통해 열매를 맺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경우가 많다. 복음의 씨앗은 그렇게 수많의 죽음을 통해 뿌려졌었고 그리고 그것이 나중에 귀한 열매로 나타났다. 

현대사회에서 누가 땅에 떨어져 죽는 씨앗의 역할을 좋아할까? 누구나 다 열매를 맺는 일을 하고 싶어한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씨만 뿌리고 죽어가는 역할은, 대중매체가 보여주는 현대인의 삶에 방식에는 별로 들어맞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가 알아주지 않아도 역사가 제대로 밝혀주지 못해도 진정한 위대함은 바로 씨를 뿌리는 자들에게 있다. 자신이 열매는 맺지 못하더라도 죽음으로 씨를 뿌리는자들, 그들이 진정한 역사의 주도자들이다. 

자신이 맺은 열매로 평가되고 미래가 보장되는 경쟁사회에서 씨를 뿌리고 죽는 일, 정확히 말해서 씨를 뿌리고 죽었다가 나중에 열매를 맺는 일이 아니라, 씨만 뿌리고 죽는 일, 열매 맺는 영광은 다른 사람에게 돌리고 씨만 뿌리고 죽는 일을 위대하게 여기고 격려하는 메세지는 별로 들을 수 없다. 설교를 들으면서 나는 너무나 오랜만에 나 자신이 희생의 댓가를 받지 않고 그저 희생만 하는 일에 대해 생각해 봤다. 씨만 뿌리고 죽는 일, 열매는 다른 사람들이 맺을 수 있게 희생하는 일.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복음적인 메세지이며 사실 역사의 위대함이겠으나 그런 생각이 내 삶에서 그토록 부재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우리의 눈은 항상 아카데미 시상대 위에 쏠려 있다. 역사의 진정한 위대함은 교과서에 이름 실리는 자들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여러 학교들에 지원하면서 한국의 한 대학에도 지원을 했었다. 미국의 경제 위기로 인해 많은 학교들이 교수채용을 연기시키거나 취소시킨 반면 한국의 대학에서는 오퍼가 왔다.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면 연구의 폭과 깊이에 많은 제한이 있을 것이라는 걱정과 반면 나름대로 내가 이바지할수 있는 많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항상 그랬듯이 딱 하나 열어 주시는 길을 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한국에서 교수로 일할 것에 대해 생각하면서 나에게는 미국에서 해 왔던 것 만큼의 열매를 맺을수 있을까가 주된 관심사였다. 그러나 부활절 메세지를 들으며 전혀 생각지 못했던 부분을 깨닫는다. 열매는 내가 맺지 못하더라도 씨를 뿌리는 일. 한국으로의 부르심은 열매를 맺는 일보다 씨를 뿌리라는데 있는 것은 아닐까. 부활절 메세지로 인해 주님의 인도하심을 좀 더 명확히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