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창조_이야기 - 첫번째
6일 창조는 시간일까, 무시간일까? - 아우구스티누스
올해부터는 종종 과신대 그룹에 창조에 관한 이야기들을 올려볼까 합니다. 무크따 출판 이후에는 무크따 시리즈를 올렸고 과도기 출판 이후에는 과도기 시리즈를 올렸습니다. 이번에 새로 시작하는 글들은 창조신앙_시리즈라고 부를까 합니다. 처음 몇번은 제 담벼락에도 동시에 올리고 점진적으로 옮겨갈까 합니다.
오늘은 7년 전에 썼던 글을 살짝 수정해서 올립니다. 원 글 링크는 댓글에 달겠습니다.
"6 이라는 숫자의 완전함 때문에, 같은 날 여섯 번 반복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성서는 창조가 엿새 동안에 이루어진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렇다고 하느님이 동시에 모든 것을 창조하지 못하여 적절한 운동에 따라서 시간이 흘러가는 것처럼 하느님께 시간의 간격이 필요했다는 말은 아니다. 그보다는 여섯이라는 완전수를 통해 창조 사업의 완점함을 상징한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 11권 30에서)
신국론을 읽어보면 6일 창조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생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순식간에 혹은 동시에 우주 전체를 창조를 할 능력이 없어서 6일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을까라고 되묻고 있습니다. 반대로 시간이 필요할 정도로 하나님이 무능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시간이 영원전 부터 존재했고 그래서 어느 한 시점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도 아니라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그는 오히려 하나님이 시간을 창조하셨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자 세계가 시간 속에 존재하기 시작했다" (신국론 11권 4)
시간도 창조물의 일부이고 하나님이 창조하자 창조세계는 시간을 경험하기 시작한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시간과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철학적 논의는 흥미롭고도 까다롭습니다. 전통적인 개념 중에서 하나님이 시간에 초월하다는 개념이 있습니다. 시간에 초월하다는 말은 하나님은 시간을 순서대로 경험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시간에 초월한 하나님은 시간을 경험하는 인간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게 불가능해 보입니다. 성서를 보면 하나님도 인간처럼 시간을 경험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역사 혹은 시간 안에 하나님도 존재하는 것처럼 기술되어 있습니다.
다양한 철학적 견해 중에서 흥미롭고 설득력있는 입장 중 하나는 이렇습니다. 창조 전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고 하나님은 무시간적(atemporal)이었습니다. 하지만 창조의 시점 (태초)에 그는 시간 안으로 들어오시고 그 이후로는 시간을 경험하신다는 입장입니다. 케노시스의 입장도 이와 비슷합니다.
신과 시간에 관한 복잡한 현대의 논의에 비추어 봤을 때, 시간도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공간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즉 시공간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개념은 매우 놀랍습니다. 이는 현대우주론에서 말하는 빅뱅에서 시간과 공간이 시작되었다는 개념과 놀랍도록 유사하기 때문이다. 물론 다중우주론과는 다르겠습니다.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시간과 하나님의 관계는 철학적 사유를 기반으로 논의되어 왔으나 현대에는 과학도 그 논의도 일부가 되고 전통적으로는 성서가 그 논의의 주요한 데이터가 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2장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화두였습니다. 특히 창세기 1장의 1,2절이 관련이 있습니다.
하지만 창세기 1장 1,2절을 이해하는 일이 난해함을 표명하며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조언합니다.
"참으로 심원한 내용을 담은 대목이므로 각자가 마음 내키면 받아들이도록 할 것이며, 읽는 사람들의 지적 훈련에 따라서, 신앙의 규범에 상충하지 않는 범위에서 많은 의견을 내놓을 수 있겠다" (11권 32)
참으로 지혜로운 조언입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기사가 담은 풍성한 신학적 의미와 심원함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읽는 사람의 지적 수준에 따라 다양하게 읽힐 수 있음을 아우구스티누스는 인정해 주는 듯 합니다.
특히 현대과학과 창세기1장을 비교하면서 조화시키려고 하는 입장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창조과학자들은 현대과학을 수용하는 저나 진화적 창조의 입장에 있는 과학자들에 대해서 성경과 과학을 조화시키려고 성서해석을 타협한다고 비난합니다.
하지만 진화적 창조의 입장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과 과학을 조화시키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조화주의는 창조과학이 취하는 입장입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과학을 버리는 입장이니까요. 진화적 창조의 입장은 성경을 과학교과서로 읽지 않기 때문에 현대과학 가령 빅뱅우주론과 창세기1장을 조화시키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우구스티누수의 조언처럼 다양한 해석을 수용합니다. 결국 창세기 1장은 창조의 방법이나 기간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 아니라 창조주가 누구이며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를 다루는 신학적 서술이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