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고민하다/손가락 가는 대로

정년퇴임식...

별아저씨의집 2021. 6. 19. 14:25

지난 주말에 이어 이번 주말도 박사학위 논문 심사로 시간을 보냅니다. 그래도 지난 주말엔 책 한 권도 함께 감수하느라 주말의 반을 보냈는데, 이번 주말엔 박사학위 논문 하나라서 그나마 낫습니다 ^^

 

원래 아침잠이 많은 편인데 요즘 새벽에 자꾸 깨서 하루를 일찍 시작합니다. 오전 9시가 아직 안 지났는데 꽤나 진도를 나갔습니다.

 

어제는 과에 정년퇴임식이 있었습니다. 학과장으로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신경이 쓰였지만 행정실 직원들이 성심껏 열심히 준비해 주어서 큰 탈 없이 잘 끝났습니다. 제가 보직을 맡는 동안 3분이 정년퇴임합니다. 물론 신임교수도 2명을 더 뽑아야 합니다.

 

천문연구원 원장을 3년 하시고 학교로 돌아오신 이형목 교수님의 정년퇴임입니다. 존경할만한 분입니다. 학문적으로도 그렇고 교수나 과학자로서도 그렇고 인간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선생으로서는 잘 모릅니다. 제가 수업이나 강의를 들어 본 일이 없습니다.

 

여러 분의 송별사를 듣고나서 퇴임사를 들었습니다. 한 과학자의 인생을 스스로 돌아보는 이야기는 많은 생각을 던져주었습니다. 특히 과학자로서 전환점이 되었던 두 가지 이야기가 가슴에 남습니다.

 

부산대에 10년 가까이 재직하다가 서울대로 오셨는데 그때 일본에서 AKARI 아카리라는 적외선 우주망원경 프로젝트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한국이 참여한다면 매우 좋은 기회였지요. 일본의 우주항공국에 파견을 요청했더니 서울대에서 허락을 안 해주었다고 합니다. 서울대로 온 지 1년 밖에 되지 않았는데 외국으로 파견이라니 당시만 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겠지요. 그래서 휴직을 하고 일본으로 갔답니다. 휴직은 말 그대로 월급을 받지 않고 어떤 지원도 받을수 없는 상태입니다.

 

이런 불합리한 일이 있나, 연구하겠다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위해 이 좋은 기회를 활용하려는데 승인을 안 해주다니... 그렇게 불평하고 포기했을 법합니다. 그런데 그래도 가겠다고 휴직을 하셨다니...

 

제가 서울대로 올 때 이 분이 학과장이셨습니다. 서울대로 와서 보니 아카리 우주망원경에 서울대가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저도 아카리 데이타로 몇가지 연구를 했습니다. 과연 어떻게 시작되었나, 막대한 연구비를 지불한 것도 아니고, 일본 학자들과의 인맥으로 가능했던 건가, 싶었는데 이제야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물론 국제적으로 친구가 많은 분이지만 1년 휴직으로 일본우주항공국에 가서 그들과 함께 연구하고 참여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습니다.

 

그때 4명의 학생을 일본에 데리고 갔답니다. 그들이 지금은 중요한 역할을 맡고있습니다. 작년에는 미우주항공국 나사에서 쏘아 올리는 SPHEREx 망원경 프로젝트에 천문연을 중심으로 한국이 참여하도록 주역을 하기도 했습니다. 스피어엑스는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한번 포스팅해야겠습니다만 한국이 주도하는 사이언스 임무도 개발되어 있고 매우 흥미로운 결과들을 얻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또 하나의 전환점은 한국에서 중력파 연구를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형목 교수님은 프린스턴에서 이론연구로 학위를 받으셨고 중력 관련 일을 하셨으니 중력파를 알고는 있었지만 구체적으로는 잘 몰랐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포츠담에서 초청을 받고 학회에 참석하면서 새롭게 시각이 열렸고 그 이후 한국에서 중력파 연구를 시작했답니다. 그때까지 중력파를 연구하는 한국 학자는 한명도 없었지요.

 

그 오랜 선구적 작업이 최근에 빛을 봤습니다. 몇년 전에 중력파가 처음으로 검출되어 아인슈타인의 중력이론을 또 한번 검증했고 그 이후에 노벨상 수상도 이어졌습니다. 한국의 중력파 연구그룹 단장으로 연구를 이끌어 오신 그 역할은 높이 평가해야 합니다. 그 계기는 바로 어느 학회에 참석한 일이였지요.

 

두가지 일화 모두 전환점에 관련됩니다. 자신이 하던 연구가 아니라 새로운 분야에 뛰어든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실패해서 자신만 손해를 보면 괜찮은데, 학생들에게까지 피해가 갈까봐 염려했지만 다행이 그렇게 큰 피해가 가지는 않은듯 하다며 제자들의 표정을 살피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학생들까지 염려하기 전에 자신의 연구 커리어가 마감될 수도 있는 전환점에서 과감한 터닝을 했다는 그 결정이 의미심장합니다.

 

천문연 원장으로 3년간 근무하면서 천문학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셨다는 생각입니다. 내부 이야기를 들어보면 연구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대학에 비해서 연구력이 밀리는 연구소가 아니라 활발히 연구하는 연구소로 전환되는 과정이 아닐까 합니다.

 

인생에는 자신 만의 노력으로 되는 일은 없다며 모두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지나가는 이야기도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하지만 인생의 전환점, 그리고 운명과 개척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됩니다. 좋은 아이디어와 놀라운 기회가 찾아왔을때 다른 것을 포기하거나 위험을 감수하고 뛰어들 수 있는 자세가 결국 그 인생의 길을 멋지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선택효과가 작동합니다. 그렇게 뛰어든 많은 사람들이 사실 실패했을 것이고 이런 자리에 서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로 성공한 예만 보고 듣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도전하지 않으면 실패나 성공할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정년퇴임식이 있었지만 더 활발히 연구하실 듯 합니다. 이제는 영원한 연구년이라며 단풍구경 벚꽃구경도 가겠다지만 연구에 대한 의지가 분명해 보였습니다. 학과에서 잘 도와드리고 혹시 또다른 전환점이 올지도 모르니 관심있게 지켜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