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고민하다/기독교 서적

기독교는 성서의 종교가 아니다

별아저씨의집 2021. 1. 2. 18:52
기독교는 성서의 종교가 아니다

2020년에 읽은 가장 인상깊었던 책 중 하나가 더글라스 존 홀의 [그리스도교를 다시 묻다]입니다. 이 책을 번역한 이민희 선생님이 선물로 주신 책입니다. 주옥같은 내용들이 담겨있습니다. ‘부정 신학의 눈으로 바라본 그리스도교’라는 부제가 달려있는 이책의 각 장에 달린 부정의 제목들이 몹시 흥미롭습니다.

모태신앙부터 근본주의와 복음주의 지역교회와 선교단체를 거치며 한국기독교의 교회 문화 속에서 자라온 저의 신앙은 대학원공부와 유학생활, 그리고 과학과 신학에 대한 공부를 통해 또한 한국 사회의 현실 속에서 기독교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끝없이 던지는 긴 과정을 통해 서서히 변해왔습니다. 어쩌면 이 책의 내용은 긴 여정을 통해 현재엑 이르게 된 저의 신앙의 에센스를 보여주는 느낌입니다. 나는 무엇을 믿는가, 내가 신앙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물으며 답이 아닌 것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가는 부정의방법으로, 과거에는 선명했지만 우상이었던 것들을 벗어나 흐릿하지만 오히려 더 명쾌해진 현재의 제 신앙과 공명하는 듯 합니다. 깊이 공감되는 내용들이 이 책에 풍성하게 담겨있습니다.

뭔가 체계를 만들어내는 조직신학자들의 시각은 언제나 저에게 엉성하다는 느낌을 줍니다. 그만큼 신과 인간과 창조세계에 관한명확한 그림을 그리는 일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그러하듯 오답들을 제거하는 방식은 언제나 지혜로운 길입니다. 모두에게 일독을 권할 뿐만 아니라, 이 책이 진지하게 곱씹으며 한국의 기독교를 다시 묻는 귀한 재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이 책의 2장은 기독교가 ‘성서의 종교가 아니다’라는 과격한 제목으로 시작합니다. 이 제목을 보고 꽤나 불편할 분들이 많겠습니다. 제가 ‘무크따’에 기독교는 예수를 믿는 종교이지 성경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는 내용을 넣었습니다. 코란처럼 해석도 없고 마치 주술서처럼 성경의 문자들을 외우고 숭배할 것이 아니라 성서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 주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창조과학자 이재만 선교사나 창조과학회 회장은 제 책의 본문에서 한줄을 싹 잘라와서 제가성경을 믿지 않는다는 증거로 사용하는 모습을 보고 경악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자는 근본주의를 통해 유행하고 주류처럼 되어버린 성서숭배주의를 비판하면서 성서는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에 이르게하는 매개임을 분명히 선언합니다. 인용된 리차드 니버의 글이 정확히 짚어 줍니다.

‘성서의 권위는 교회의 오만한 권위를 깨트리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성서는 인간의 교만을 세우는 또다른 수단이 되었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19세기 말에서 20세기에 새로 등장한 근본주의 문자주의는 새로운 흐름입니다. 성경을 열심히 연구한 종교개혁 시대로 그 근원을 돌리지만 사실 종교개혁자들의 관점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종교개혁자들은 교부들과 중세시대의알레고리적인 해석에서 벗어나서 성경의 본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탐구했다는 점에서 문자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흐름은 20세기 근본주의의 문자주의와는 명확히 차별됩니다. 종교개혁자들에게 성서는 새로운 영감을 통해 카톨릭의 전통과 오류를 벗어나는 도구였다면, 근본주의자들에게 성서는 자신들의 교리와 오류를 방어하기 위해 편집적으로 사용하는 수단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유럽이 아니라 북미를 중심으로 근본주의와 결합한 성서주의가 발현된 이유를 5가지로 제시합니다.

1. 북미에서는 신학 연구와 성서 주석 연구보다 경건과 도덕성처럼 직설적이고 단순한 가르침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했다.

2. 선호하는 가르침에 따라 교파가 다양해지는 상황에서, 성서가 가르치는 실제 내용에는 관심이 없고, 특정 성서본문을 선택해서 자신들의 교리나 입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찾는데 주력했다.

3. 설교에서 성서주해를 배제하는 대신에 점점 더 대중이 관심 갖는 주제나 평범한 도덕적 가르침을 다루게 되었다.

4. 대중이 매료 당한 새로운 과학이론들이 등장하자, 진화론 같은 과학에 격렬하게 저항하고 오히려 성서의 진리를 드러내는 과학 등의 객관적인 학문을 추방하려고 애쓰게 되었다

5. 그리스도교는 미국주의(Americanism)과 동맹을 맺어 기독교가 문화-종교의 정치적 역할을 감당하게 만들었다. 성서의 미묘하고 복잡한 내용들은 무시하는 대신 대중이 원하는 단순한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미국의 대중종교 전통이 자리잡았다.

6. 텔레비젼을 비롯한 현대의 언론이 기독교 신앙을 단순 축소화시켜 사람들에게 주로 감동을 주는 방식으로 작동했으며결국 기득권의 이익을 대변하는 언론은 복잡한 문제에 대해 조잡하고 편향된 메세지를 대중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저자는 주로 북미의 성서주의 문자주의가 생성된 배경을 논했지만 한국교회의 문자주의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국의 복음주의/근본주의에 크게 영향받은 한국교회의 모습도 그대로 이 다섯 가지의 문제를 앉고 있습니다.

어쩌다 지역교회들을 방문해서 설교를 들어보면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구체적인 가르침은 없고 그저 교장선생님 훈화처럼 비유와 예시가 수놓은 도덕적인 교훈들이 설교에 담길 때가 많습니다. 그나마 그 도덕적이라는 설교가 가부장적 가치에 편향되거나 혐오와 배제를 담는 설교가 아니라면 다행입니다.

성서를 전체적으로 균형있게 가르치지 않고, 목회자가 교회나 교단에 상황에 필요한 이야기를 하려고 성서의 내용 중에 선택적으로 뽑아 사용하는 경향은 한국교회의 심각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보다 대중이 원하는 주제를 선택하는 일은 목회자가 교세확장에 눈이 멀거나 청중의 인기에 영합하려는 유혹에 빠지는 것입니다. 특히 교회를 지키겠다는 허망한 명목으로과학을 배격하는 십자군적 태도를 보이는 것은 오히려 교회를 망하게 하는 길입니다.

미국의 교회들만 미국주의와 동맹을 맺은 것이 아닙니다. 태극기부대로 드러나는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성조기를 휘날리는 동맹의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미국이 천국도 아니요, 미국적 정치에 함께 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미국주의는 한국교회의 뚜렷한 색깔이 되었습니다. 텔레비젼과 라디오 등의 매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위 복음주의 설교자라는스타목사들이 텔레비젼 설교로 막대한 이익을 남기며 대중을 우민화시키는 일에 대한 비판은 한국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저자의 지적이 가슴 깊이 다가옵니다. 한국 교회의 미래를 생각할 때, 성서주의 문자주의를 벗어나야 합니다. 2장의 뒷부분 내용은 다루지 않겠습니다. 그 대신 여러분께 정독을 권합니다. 저자는 기독교는 성서의 종교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한편 성서를 가까이 해야한다는 결론을 잊지 않습니다.

‘분명 그리스도교는 성서의 종교가 아니다. 그러나 성서 없는 그리스도교에는 미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