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고민하다/손가락 가는 대로

세상이 교회를 걱정해야 하는 시대

별아저씨의집 2020. 8. 15. 12:43
교회가 세상을 걱정해야 하는데 세상이 교회를 걱정해야 하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망할까 두려워 몸부림을 치는 듯한 모습을 드러내는 대신에 교회는 한 알의 밀알이 썩어져야 한다는 성서의 가르침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득권을 잃을까 노심초사하고 저항하는 모습 대신에, 교세가 줄고 헌금이 줄고 영향력을 잃어도 복음을 지켜내며 망하는 모습이 오히려 백 배의 열매를 거둘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염려하며 먼저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야 복음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그리스도는 왕위를 찬탈하여 힘으로 세상을 구원한 것이 아니라 처절한 죽음으로 자신을 희생하며 구원의 길을 열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걸리지 않게 우리만 보호해 주신다거나, 사탄의 영이 차별금지법을 찬성하게 한다거나 하는 이야기들은 복음의 능력이 아니라 이단적 발상입니다.

코로나 확진자가 갑자기 크게 증가하는 상황입니다. 최근에는 교회를 통한 코로나 감염이 30% 정도 된다는 방역당국의 지적도 있었습니다. 30% 이외에 70%는 교회가 아닌 다른 곳을 통한 감염이니 교회만 탓하는 것은 물론 올바른 접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교회들은 더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 신천지가 그랬듯이, 이단으로 규정된 교회나 이단적 행보를 하고 있는 교회들이 사실 더 문제입니다. 전광훈씨의 교회는 증상이 있어도 코로나 검사를 받지 말고 감기약을 먹으라고 했답니다. 광복절 집회에 사람들을 동원하기 위한 조치였겠습니다. 어떻게 이런 정치집단이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구원의 길이 열렸음을 복음으로 제시하는 '교회'일 수 있겠습니까?

과학자들은 2022년에도 오프라인으로 국제대회를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습니다. 2022년에 열릴 학회들을 기획하면서 여전히 온라인 대회를 염두에 둘 정도로 국제 여행은 오랫동안 제한될 전망입니다. 미국은 하루 사망자가 하루 천명대 수준으로 계속 증가하고 있고 일본의 새로운 확산 소식도 만만치 않습니다.

두달 쯤 이어지는 듯한 장마는 국지적 집중호우를 보이며 홍수라는 재난을 가져다 주고 있습니다. 단지 매년 찾아오는 장마가 아니라 온난화로 인해 촉발된 기후 위기라는 것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감지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교회의 메세지는 어쩜 그렇게 지엽적이고 의미없는 얘기들이 되고 말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교회는 진화론 때문에, 동성애 때문에, 이슬람 때문에, 공산주의와 좌파들 때문에 세상이 망한다고 염려하지만, 오히려 세상은 교회가 더 걱정됩니다.

반지성주의와 가부장적 교회의 권위와 기득권을 놓치 않으려는 정치경제적 종교이기주의가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모습으로 비춰집니다. 어쩌면 교회는 우리사회에서 가장 개혁이 필요한 적폐의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수백명의 신학교 교수들이 차별금지법을 반대한다는 성명서를 냈습니다. 물론 서명하지 않은 많은 신학교 교수들이 있다는 사실도 분명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성명서에 서명한 분들에게 한국교회와 한국사회를 염려하는 진정성이 있음을 의심하거나 폄하할 필요는 없습니다.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지켜야 한다고 판단한 가치들을 위해 행동하고 연대한다는 동기를 의심하며 싸잡아 비난하는 것도 옳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어쩜 그렇게 주변적이고 의미없게 들리는 걸까요. 어쩜 그렇게 뮝미?(irrelavant) 한 허망한 느낌을 주는 걸까요?

창조질서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분들이 하나님의 형상인 인류의 미래와 생명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지구의 종말에 관해, 기후의 위기에 관해, 탐욕스런 인간의 소비적 삶에 관해 깊은 관심을 갖고 교회부터 먼저 반성과 돌이킴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냈더라면, 아니 작은 관심이라도 보였다면,

인간을 남녀로 창조하셨으니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믿는 분들이, XY염색체를 가진 남성이나 XX염색체를 가진 여성이 아니라, XXY와 같은 중간 성을 가진 수많은 간성인들이 태어난다는 과학적 사실에 관심이 있거나, 1000명 당 한두명의 비율인 간성인의 존재를 이해하려는 신학적 노력을 보였거나, 차별로 고통당하고 죽음을 선택하는 수많은 성소수자들의 아픔과 고통에 공감하였거나 반응하였더라면,

코로나19의 위기와 이로 인해 전망되는 불투명한 한국교회의 미래에 관해서 지역교회들이 방역에 힘쓰도록, 우리만 코로나에 안걸린다는 거짓된 가르침을 가르치지 않도록, 경제적 위기에 처한 작은 교회들에 복음의 희망을 주는 메세지로 격려했다면, 아니 공동 기도회라도 열어서 한국교회의 위기 앞에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구하는 자리를 만들었더라면,

한국교회는 망해도 복음의 씨앗은 백 배의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성서의 가르침을 드러냈더라면,

그랬더라면 이렇게까지 허망한 느낌을 주거나 교회가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고 몸부림친다는 의심을 주지는 않았을 겁니다.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교회는 이미 주변화되었습니다. 사회는 교회가 하는 이야기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목회자들의 가르침은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 예배당에서만 크게 울리는, 심지어 교인들에게조차도 예배당 밖에서의 삶에는 커다란 영향을 주지 못하는 나약한 가르침이 되어버렸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길을 묻습니다.

내가 속한 지역교회 하나라도 바르게 서도록 힘을 써야 하는지, 다단계 회사처럼 되어 버린 가망없는 교회에서 섬기고 봉사하나 채움을 받지 못하는 청년들에게 교회를 탈출하도록 조언을 해야 하는지, 늘어나는 가나안 성도들에게 어떤 대안이 있을지, 그저 교단으로 정치화된 구조에 묶여서 그안에서 가능한 것만 해야하는지, 막강한 경제력을 자랑하는 대형교회들이 세습과 불법으로 잘못을 해도 끌려갈 수 밖에 없는 개신교에 종교개혁을 일으켜야 하는지, 골방에서 조용히 기도만 해야 하는지...

교회가 세상을 이끌 수는 없더라도, 세상이 교회를 염려하지는 않도록. 교회의 머리되신 주의 영광을 드러내기는 커녕, 그 이름이 짓밟히지는 않도록.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