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고민하다/손가락 가는 대로

일관성, 모순, 이중성 (2019.05.12)

별아저씨의집 2019. 5. 30. 22:44

일관성, 모순, 이중성

 

우리의 이성은 일관된 것을 좋아합니다. 남녀가 싸우는 걸 지켜보던 사람이 남자에게 당신이 옳다고 말한 뒤에 여자에게도 당신이 옳다고 말한다면 그 말은 모순된다고 다들 생각할 겁니다.

 

하나가 옳으면 다른 것은 틀린 것으로 보는 것이 일관성입니다. 일상의 경험도 그렇지만 과학도 일관성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일관성의 깨짐을 그리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인간은 그리 일관적인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사랑하면서 미워하고, 선을 좇으나 악을 행하고, 남의 잘못은 비난하지만 나의 잘못은 단순 실수로 여기는 일관되지 못한 삶이 우리의 삶입니다. 완벽하게 일관된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 그런 말도 있습니다.

 

과학에도 일관성이 무너지는 듯한 영역이 있습니다. 오늘 설교에서 윙어 총장은 닐스 보어의 말을 인용하면서 참된 명제 반대에는 거짓된 명제가 있지만, 심오한 진리 반대에는 또 다른 심오한 진리가 있다는 말을 전해 주었습니다.

 

양자역학의 대가였던 보어는 양자세계에서 마주치는 일관적이지 않아 보이는 현상들에 대해 진리와 비진리로 나누기 보다는 진리와 또 다른 진리로 나누는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빛이 입자라면 빛은 파동이 아니어야 하고, 빛이 파동이라면 빛은 입자가 아니어야 합니다. 그러나 빛은 입자다 라는 명제는 빛은 파동이다 라는 명제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심오한 진리 반대 편에는 또 다른 심오한 진리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나와 남을 규정하고 경계를 설정하고 내가 옳고 너는 그르다며 전쟁을 일삼는 우리는 자기를 죽으려는 사람들까지 포용했던 예수의 가르침처럼 평화의 길을 걷는 구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설교의 결론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너도 나도 다 옳으니 싸우지 말고 입다물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참과 거짓은 존재하고 정의와 불의는 나누어집니다.

 

질문시간에 그렇게 물었습니다. 불의를 당하고 고통을 당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평화를 이루라는 메세지가 오히려 그들의 고통과 아픔을 묻고 그저 앞으로 전진하라는 말이 될 수 밖에 없지 않냐고. 교회는 어떻게 평화를 가르쳐야 하냐고.

 

끝나고 윙어 총장의 남편과 대화하는 가운데 그런 얘기를 농담처럼 들었습니다. 평화를 가르치는 교회는 두 종류가 있다고. 하나는 peace-quiet 평화를 말하며 입다물라 하는 교회이고, 다른 하나는 peace-justice 평화를 말하며 정의를 세우는 교회입니다. 둘 중의 어느 교회가 되어야 할지는 분명해 보입니다.

 

세월호를 비롯한 한국사회의 다양한 이슈들을 생각하면서 던진 질문이었지만, 먼저 질문한 분이 요더에 대해서 (어쩌면 적절하지 않은 질문으로) 물었기 때문에 제 질문도 요더와 피해자에 대한 질문으로 여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요더 문제가 터졌을 때 메노나이트 내부에서는 피해자의 이야기를 듣고 정의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평화를 추구했다는 얘기를 답변으로 들었습니다. 그 과정에 깊숙이 관여했던 이 분은 그 일로 많은 신뢰를 얻었다고 합니다.

 

삶은 참 복잡합니다. 일관되어 보이지 않는 우리 삶과 우주, 그리고 신앙과 신. 서로 옳다 싸우는 이 잃어버린 땅에 평화가 봄처럼 오는 일은 언제일까요. 그때까지 평화를 좇으며 살아야 할 우리가 부딪히는 수많은 모순과 이중성, 그 무게들을 다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