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종학의 글과 칼럼

수학적으로 가능한 것은 모두 물리적으로 가능한가?

별아저씨의집 2019. 5. 6. 20:15

수학적으로 가능한 것은 모두 물리적으로 가능한가?

 

강영안 교수님과 함께 쓴 곧 출판될 책에서 작년 5월의 베리타스 포럼 강연 원고를 2배로 불려서 존재와 진리에 대한 과학자의 질문들을 담아 봤습니다.

 

무엇을 안다는 것, 실재에 대한 지식은 많은 경우, 경험에서 나옵니다. 만남을 통해 실재 (그것이 역사든, 인간이든, 사랑이든, 신이든 간에)를 경험하고 그 실재에 대해 질문하고 답하며 알아갑니다.

 

경험은 우리 눈과 귀에 들어오는 정보들을 하나의 해석의 틀을 가지고 인지한 내용입니다. 해석된 경험이라고 할까요. 해석되지 않은 경험은 없습니다. 어떤 데이타든 그것을 뇌가 받아들여서 어떤 내용으로 인지하는 과정은 결국 인식론의 문제입니다. 과학이라고 다르지 않고, 신학적 작업이라고 다르지 않고, 우리 일상의 경험이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의 인지, 혹은 인식, 즉 실재와의 만남이라는 경험이 진리를 알아가는데 매우 중요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궁금한 것은 우리가 이성으로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 우주에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과학으로 표현하면 수학적으로 가능한 모든 것들이 물리적으로 존재하는가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지요.

 

경험과학자인 저로서는 부정적인 답변을 갖고 있습니다. 수학적으로 정합한 이론을 만들어 낸다고 해서 그런 것들이 우주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보장을 없습니다. 우주가 어떤 모습인지는 구체적으로 경험을 통해서 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폴킹혼의 [양자물리학과 기독교]를 다시 읽다가, 흥미로운 한 대목을 만났습니다. 번역이 매끄럽지 않아 살짝 수정해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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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의 교리는 이러한 질서의 특성이 하나님께서 자유로이 선택한 것임을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 질서는 이전에 미리 존재하는 어떤 종류의 설계도에 의해서도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령, 플라톤의 사고에서는 그런 설계도를 가정했다). 결론적으로, 우주 질서의 본질은 단지 생각에 의해서 발견될 수 없다. 마치 인간 스스로가 창조자가 따라야 하는 합리적 제약에 대하여 순수 인식적 영역을 연구해도 우주 질서의 본질이 발견될 수는 없다. 세계의 패턴은 관찰과 실험을 통하여 분별된다. 관찰과 실험이란 하나님께서 실제로 취했던 형식을 알아내기 위하여 필연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의 성공을 위해 필요한 것은 질서에 대한 '수학적 표현'과 자연의 실제 속성들에 대한 '실험적 연구'의 일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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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물리학자였던 폴킹혼의 생각이 저와 일치하는 것은 아마도 저도 물리과학을 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흔히 이론을 중심으로 하는 이론과학자들은 반대로 수학적 표현이나 수학적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두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때가 종종 있는데, 진정한 이론과학자는 아마도 오히려 경험 즉 데이타에 더 무게를 두게 될 수 밖에 없다 싶습니다.

 

폴킹혼은 이런 연구방식을 상향식 (bottom-up)이라고 부릅니다. 결국 아래서부터 위로 데이타들을 종합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주의 실재 모습을 파악해 가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폴킹혼은 신학적 작업도 마찬가지로 상향적 특성을 가진다는 점을 강조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햐향식 연구도 함께 병행되지만 말입니다.

 

이 책은 2009년에 번역되었네요. 폴킹혼의 [쿼크, 카오스, 기독교]를 제가 번역한 것이 2009년이었는데 그 후에 번역되었나 봅니다. 이 책에서는 예수의 이중성과 부활에 관해서 상당히 많은 논의를 진행합니다. 물론 양자역학의 발전과정과 유비를 통해서 과학과 종교가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의 유사성을 흥미롭게 전개하고 있지요.

 

여러 영감을 받을 수 있는 책이 아닐까 합니다. 내용이 그리 새롭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제 사유 안에 이미 폴킹혼이 많이 녹아들어 있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