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종교 이슈

[칼럼] 장신대 신학자에게 듣는 ‘과학시대의 창조신학’

별아저씨의집 2017. 10. 2. 10:01
창조과학에 관해서 장신대의 신학춘추에 좋은 글 2개가 실렸습니다. 하나는 서울대 지구과학교육과 최승언 교수님의 글이고 다른 하나는 장신대 조직신학인 윤철호 교수님의 글입니다. 꼭 읽어봐야할 좋은 글입니다. 퍼옵니다.

장신대 신학자에게 듣는 ‘과학시대의 창조신학’

윤철호 교수

먼저 나는 최승언 교수님의 경험을 충분히 이해한다. 오늘날 세계관 전쟁이 기독교와 세속문화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교회 안의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기독교와 세속문화 사이에서 일어나는 유신론적 창조 신앙과 무신론적 과학 사이의 전쟁 못지않게 교회 안에서의 신앙과 과학의 관계에 대한 상충된 이해로 인한 갈등도 매우 심각하다. 어렸을 적부터 유년주일학교에서 창조신앙을 배우고 성장한 청년들 가운데 학교에서 배우는 과학이 신앙을 위협한다고 생각하는 청년들이 적지 않다.

미국의 근본주의와 복음주의의 영향을 받은 한국의 보수적인 개신교 교회 안에는 빅뱅이론과 진화론을 배격하는 것이 무신론으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지키는 길이라고 믿는 지도자들과 교인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또한 어렸을 적부터 쥐라기 공원과 같은 영화를 보며 트라이아스기, 쥐라기, 백악기로 이어지는 중생대 시기(2억 3천만 년 전-6천 5백만 년 전) 동안 지구상에 살았던 거의 모든 공룡의 이름을 외우며 성장하고 학교에서는 오늘날의 천체물리학, 지질학, 진화생물학 등을 공부한 대부분의 청년들은 교회가 우리가 살고 있는 과학적 세상에서 점차 멀어지고 있다고 느낀다. 교회에서 배우는 세계관과 학교에서 배우는 세계관의 차이로 인해서 적지 않은 젊은 기독교인들이 예전에 최 교수님이 경험한 것과 같은 이중성으로 인한 갈등을 경험하고 있다.

또한 나는 최 교수님의 견해에 온전히 공감한다. 우리는 갈릴레이 시대에 교회가 우주에관한 과학의 이해를 거부함으로써 역사적으로 지울 수 없는 오류를 범했음을 잘 알고 있다. 그 당시에 교회는 갈릴레이의 지동설이 성서의 세계관과 충돌한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오늘날 일부 보수적인 교회들과 기독교인들이 오늘날의 과학이론들에 대하여 보여주는거부감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들은 오늘날의과학계에서 정설화 된 이론들이 성서와 충돌한다는 이유로 거부한다. 그들이 과학이론과 성서가 충돌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한편으로는 성서에 대한 그릇된 해석에 기인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이론에 대한 무지나 오해에 기인한다.

특히 창조과학론자들은 이 두 가지 모두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를 보여준다. 그들은 근본주의적인 문자주의적 해석에 근거한 성서의 권위에 기초하여 과학의 언어를 성서의 언어 로 환원시키고자 한다. 그들은 문자주의적으로 이해된 성서의 권위에 의지하여 교회가 과학적 진리를 과학자들보다 더 정확무오하게 소유하고 있다고 믿고 갈릴레오를 재판했던 중세교회의 오류를 재현하고 있다.

창조과학론은 근본주의적 배경을 가진 캐나다의 안식교도 조지 멕크레디 프라이스 (George McCready Price)와 미국의 남침례교도 헨리 모리스(H. M. Morris)에 의해 시작되었다. 20세기 전반기에 프라이스는 성서에 대한 문자적 해석에 기초하여 지구의 역사가 6천년 밖에 안됐으며, 노아의 홍수 때 모든 지층이 형성되었다는 홍수지질학을 주장하였다. 모리스는 1970년대에 미국 샌디에이고에 창조과학연구소를 설립해 창조과학론을 확산시켰다. 우리나라의 창조과학 운동은 모리스의 영향을 받아 1980년대 초에 시작되었다. 창조과학론자들은 성서가 초자연적 영감에 의해 기록된 문자적으로 무오하고 정확한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영적, 신학적으로뿐만 아니라 역사적, 과학적으로도 무오하다고 믿는다. 따라서 이들은 성서가 과학 교과서로 사용될 수 있으며, 성서에 기록된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가 과학에 의해 입증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성서가 과학적 증거 위에 있다고 믿으면서, 동시에 성서에 대한 문자적 이해를 과학적 증거에 의해 입증하고자한다.

창조과학론자들은 창세기 1:1-2:4의 창조 이야기에 대한 문자적 해석에 기초하여 창조 시 하루가 24시간으로 6일 동안 일어났다고 믿으며, 오늘날 과학의 지배적 이론인 우주의 나이가 약 138억년이라는 빅뱅 우주론을 거부하고 창세기의 족보를 근거로 창조가 대략 6천 년 전에 일어났다고 하는 젊은지구론을 주장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젊은지구론을 과학적으로 입증하기 위해, 성서에 나타나는 노아 홍수 사건에 대한 문자적 해석에 기초한 자신들의 홍수지질학을 통해 오늘날의 대부분의 지구의 지층과 화석이 전 지구적인 노아홍수 때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이들의 주장이 세상에서 얼마나 큰 비웃음과 조롱거리가 되는지는 최근 박성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자 사건으로 분명히 드러났다. 박 교수는 지구의 나이가 6000년이라는 교회의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신앙적으로는 그렇게 믿고 있다고 대답했다. 이 무슨 해괴한 대답인가? 이런 비논리적인 사고구조를 가진 사람이 대학교수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른바 지성인들을 포함해서)에게 있어서 교회의 언어가 세상의 언어로부터 단절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이다.

성서의 창조 이야기들은 현대적 의미에서의 과학적 설명으로 읽혀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고대의 세계관 안에서 기록된 성서의 창조 이야기로부터 오늘날의 과학의 천문학적, 지질학적, 생물학적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듣고자 해서는 안 된다. 성서의 하나님의 창조이야기와 오늘날의 천체물리학과 진화생물학은 단순히 동일시될 수도 없지만 상호 배타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서도 안 된다. 성서의 언어와 과학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다. 전자는 (하나님에 의한) 창조의 목적과 의미에 관심을 갖는 반면, 후자는 창조의 방법과 메커니즘에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또한 그 둘은 단지 상호보완적인 관계 안에서 분리된 채 머물러 있지 말고 상호적인 대화를 통한 공명의 가능성을 추구해야 한다. 아인슈타인의 말을 빌리면, “종교가 없는 과학이 절름발이라면, 과학이 없는 종교는 장님이다.” 고대의 바벨론 문명의 세계관을 배경으로 쓰인 성서는 오늘의 과학적 세계관 안에서 새롭게 이해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신학도들은 열린 마음으로 과학과 대화함으로써 신학과 과학의 진리를 함께 아우르는 통전적인 창조신학을 수립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