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그렇겠지만 가끔씩은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버겁고 무거운 일들이 겹치면 인간의 몸은 세포까지 그 무게에 눌리는 건지도 모른다.
눈을 감고 귀를 막아 버리고 싶도록 이 땅엔 불의와 폭력이 가득하고 이제는 사사로운 개인의 공간까지 밀려드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무한히 감지되는 악. 그것을 벗어나는 일은 지구를 떠나는 수 밖에 없는 듯.
그사이 슬쩍 돌아 본 내 삶엔 끝없이 남과 비교하는 상대적 박탈감과 허전함이 엄습한다. 충분히 가졌음에도 더 가진 자들의 비웃음이 눈에 선하고, 충분히 행복함에도 행복의 지수적 증가를 추구하는 죄성엔 몸둘 바를 모르겠다.
청춘을 바쳐 바람의 방향을 바꾸려는 노력은 끝없이 몰려드는 왜곡과 비난과 몰지각한 태도들 앞에 소귀에 경읽기 같고 아무리 봄을 기다려도 빼앗긴 땅은 녹지 않을 듯 하다.
사람들 앞에서 뭔가를 열심히 쏟아내는 작업으로 내 소임을 다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 일대 다수로 만나는 대중과의 만남 뒤엔, 강단에 섰을 때와는 다르게 인격과 나눔에 대한 욕구에 허탈과 허전함을 겪는다. 대중 앞에 서지 않을 때 나는 누구인가? 끝없는 소통의 욕구는 자신을 잊기 위한 존재론적 조건반사일지도 모른다.
포장된 나는 언제나 위선이며 드러낸 나는 언제나 남 앞에 설 수 없다. 그 모순의 간격을 뛰어넘고 앞에 서는 자들은 영에 휩싸였거나 지독한 다중인격자일지도 모른다.
요 며칠 밤을 부여잡고 어둠의 무게 아래 쪼그리고 앉아있는 나는 아마도 우주적 시간의 의미를 모른 채 미래는 없다는 듯 현재에만 갇혀 있는지도 모른다.
문득 전화를 걸어 불러낼 친구가 있던 청년 시절이 그리운 이유는 한발짝도 쳇바퀴를 벗어날 수 없는 피로사회의 열렬한 일원임에 대한 자각이며, 공인이 되버린 상황에 대한 거부감이며, 그만큼 사람들을 사랑하진 못했다는 자책감이며, 그리고 인간은 결코 서로 신뢰할 수 없다는 존재론적 회의다.
이 깊은 무력감을 벗어나는 길은 말씀하지 않는 그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말씀하신 때를 기억하는 것이며 이 땅에 봄이 올거라고 믿었던 때를 떠올리는 것이며 설혹 위선을 담고 있더라도 용기를 내어 뭔가를 외치던 내 속의 열정을 추억하는 것이다.
(2016.1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