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종학의 글과 칼럼

[215호 과학칼럼] 명품의 환상에서 깨어나라 (복음과상황 2008년 9월호)

별아저씨의집 2008. 8. 29. 04:56
월간 복음과상황 [215호 과학칼럼] 명품의 환상에서 깨어나라

우종학 (천문학 박사, UCLA)

우리의 일상은 사고파는 일의 연속이다. 노동을 팔아 자본을 사고 자본을 팔아 의식주를 산다. 경제활동을 포함한 대부분의 의사결정에는 사고파는 원리가 적용된다. 가능하면 적은 투자로 좋은 물건을 사는 것이 그 핵심이다. 회사는 같은 월급을 주면서 더 나은 인재를 뽑으려 하고 구직자는 같은 양의 일을 해야 한다면 보다 좋은 조건의 회사를 원한다. 싱글들은 경제력이나 미래의 가능성이 더 나은 배우자를 얻으려 한다.

적은 투자로 좋은 물건을 사는 원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로 명품이다. 물론 명품은 정의하기 나름이다. 나도 명품을 좋아한다. 내가 좋아하는 명품은 좋은 질이 보장된 물건이다. 싸구려 물건보다는 괜찮은 브랜드의 상품을 사는 것이 장기적으로 봤을 때 더 경제적이다. 그러나 소위 명품이라는 것들은 물건의 질에 비해 훨씬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거기에는 물건 자체 이외에 브랜드가 가져다주는 다른 가치들이 포함된다. 가령, 어느 브랜드의 명품을 소유함으로써 부유한 사회계층이라는 이미지를 부여받거나 내 수준이 이 정도는 된다는 과시욕을 채우기도 한다. 명품을 소유하면 왠지 자신도 명품이 되는 거라고 사람들은 착각한다. 그래서 물건의 질보다 더 비싼 대가를 주저 없이 지불한다. 유투브와 디카의 시대에 텔레비전과 영화를 비롯한 강력한 대중매체들은 명품·성형·패션·착한 몸매 등으로 ‘나’라는 상품을 포장하여 브랜드 가치를 높이라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내뱉는다.

명품을 소유한다고 해서 내가 명품이 되는 건 아니다. 왕자와 거지가 옷을 바꾸어 입어도 둘의 신분은 바뀌지 않는다. 싸구려 물건만 쓰라는 얘기가 아니다. 명품이라는 이미지 뒤에 숨겨진, ‘높아지려는 나’라는 우상의 존재를 직시해야 한다. 세상을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여 그 뜻에 맞게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은 끊임없이 너 자신을 숭배하라고 꼬드긴다. 우리의 가장 큰 적은, 무례한 사람들이 가끔 목을 자르는 불상이나 단군상 같은 것들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라는 우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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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의 삶도 별다르지 않다. 자신의 과학을 팔기 위해 과학자는 연구계획서에 온갖 정성을 쏟는다. 이 연구가 왜 중요한지, 다른 분야에 어떤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섹시한 프로포잘 (proposal)을 써서 심사위원들의 마음에 쏙 들게 하는 일은 교수나 연구자들의 주 업무이다. 연구계획서가 채택되어야 연구비를 받을 수 있고 그것으로 실험 장비를 사거나 대학원생들을 고용할 수 있으며 그래야 연구결과인 논문이 나올 수 있다. 그렇게 논문 출판이라는 업적이 쌓이면 다음 연구계획서를 세일즈 한다. 이렇게 순환구조를 갖는 시장 경제의 논리에서 두세 번 미끄러지면 좀처럼 따라잡기가 어렵다. 연구계획서가 실패하면 연구비가 끊기고 연구비가 끊기면 연구 활동에 지장을 받고 결국 논문이라는 결과물이 줄어든다. 그러면 빈약한 업적 때문에 다음 연구계획서도 성공하기가 어렵다. 결국 경쟁과 자본이 지배하는 과학 연구의 장에도 빈익빈 부익부의 현상이 생긴다.

그래서일까. 과학자들도 자신의 연구를 명품으로 포장하는 일에 익숙하다. 소위 우주의 비밀을 풀어내는 중요한 연구라며 과대포장하거나 혹은 연구자 자신을 훌륭한 과학자로 치장하는 일도 흔하다. 내 연구가 남의 연구보다 훌륭해야만 이길 수 있는 경쟁사회에서 명품 브랜드로 이미지를 굳히려는 바동거림은 어쩌면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경쟁과 자본이 지배하는 과학의 장에서 크리스천 과학자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세상과 똑같이 자신의 연구를 명품이라 선전하고 자기 자신의 브랜드를 끊임없이 높여야 하는 것일까? 혹은 그저 겸손하게 그저 누가 주는 떡이나 받아먹고 있어야 할까?

몇 년 전 마르퀴즈 후즈후 (Marquis Who’s Who)라는 출판사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새로 출판될 인명사전에 수록될 과학자들의 후보명단에 들었으니 몇 가지 자료를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마르퀴즈 후즈후라는 이름을 들어 본 기억이 있어서 한글로 검색을 해보니까 어느 기관의 누구누구가 세계 3대 인명사전 중 하나인 마르퀴즈 후즈후에 등재되었다는 기사들이 떴다. 세계 3대 인명 사전이라… 박사과정 때 출판했던 논문 중에 인용횟수가 높은 논문이 하나 있는데 아마도 그것 때문일까? 신문 기사에도 이름이 나겠네.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출판된 논문 목록 등 간단한 보충자료를 보냈다. 몇 달 후, 새로 출판된 인명사전에 내 이름이 등재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물론 기분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 후 내 이름이 마르퀴즈 후즈후 인명사전에 실렸다는 신문 기사는 보지 못했다. 신문에 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실망하는 자신을 보면서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인명사전에 이름이 실리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가, 아니면 그것을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이 더 의미 있는가?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면 그것은 내 자신이 잘 나가는 명품이 되고 싶어 하는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한번 ‘뜨고’ 싶어 하는 내면 깊숙한 욕망을 나는 확실히 확인했다.

마르퀴즈 후즈후에 누가 등재되었다는 과학기사는 사실, 등재된 사람이나 그가 속한 기관에서 먼저 언론에 알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세계 3대 인명사전에 우리 기관, 누구의 이름이 등재되었다는 기사가 나면 개인에게는 명예가 되고 그가 속한 기관이 홍보되는 유익함이 있기 때문이다. 충분히 중요한 연구를 하고 있다면 그 자체가 의미 있겠지만 기왕이면 대중의 관심을 끄는 것이 도움이 된다. 과학연구에 사용되는 연구비는 대중이 낸 세금에서 오는 것이고 적극적인 홍보는 결국 과학 연구에 보탬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새로운 연구결과를 홍보하는 프레스 릴리즈(press release)에 열심이고 언론의 인터뷰에도 적극적이다.

그러나 이런 긍정적인 동기의 이면에는 ‘잘 나가고 한번 뜨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이 동시에 존재한다. 과학연구를 위한 긍정적 동기와 자신이 명품이 되려는 이기적 동기를 확연히 분리하는 건 쉽지 않다. 이런 양면성은 대부분의 일에 그대로 적용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는 비전과 내 자신이 인정받기 위해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는 욕심은 분리하기 어렵다. 어떤 사역을 하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위한 것인지 나 자신이 인정받기 위한 것인지를 완벽하게 나눌 수는 없다. 우리의 죄성을 생각할 때 100퍼센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동기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리의 욕심을 채우려는 동기가 섞여있을 수밖에 없다고 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게으른 청지기가 될 수는 없다. 이기적 동기를 깨뜨리고 하나님께 복종시키는 끝없는 영적 싸움을 하면서 동시에 탁월함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본질이 아닐까.

한국 신문기사들이 떠드는 것처럼 마르퀴즈 후즈후가 정말 공신력 있는 세계 3대 인명사전일까? 미국에서도 마르퀴즈 후즈후를 세계 3대 인명사전으로 취급하는지, 누가 거기 등재되었다는 것이 기사거리가 되는지를 뒤져봤지만 별 내용이 없었다. 오히려 허영심을 자극하는 비즈니스라는 비판적 시각들도 있었다. 인명사전에 등재되었음을 알려온 이메일에는 비싼 가격의 인명사전을 할인해 준다는 내용과 등재 내용을 크리스탈 장식품이나 액자 등등에 넣어 할인해서 판매한다는 내용이 함께 있었다. 한마디로 인명사전에 등재된 사람들의 허영심에 호소해서 장사를 하는 셈이다. 이런 마르퀴즈 후즈후에 누구누구가 등재되었다는 내용이 종종 신문기사로 등장한다는 사실은 어쩌면 명품에 집착하는 우리사회의 가벼움을 반증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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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 사이언스와 네이처

사이언스와 네이처는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양대 과학저널이라는 말이 있다. 한국에는 사이언스와 네이처에 실린 논문들을 다른 전문 저널들에 실린 논문들보다 더 우수하게 여기는 잘못된 풍토가 있다. 과연 사이언스와 네이처가 그 정도일까? 그 권위는 누가 부여했을까?

사이언스와 네이처는 대중적 잡지에 가깝다. 엄밀히 말하면 저널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 두 잡지는 분야를 뛰어넘는 넓은 독자층을 갖는다. 물리학자가 생물학 저널을 보거나 생물학자가 물리학 저널을 보는 일은 별로 없지만 이 두 잡지는 다른 분야의 과학자들이나 일반들에게도 널리 읽힌다. 그래서 거기 실리는 논문은 짧고 쉬운 용어로 쓰인다. 또한 대중의 관심을 끌기 좋은, 새로운 발견이라든가 획기적인 업적들이 주로 실린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이 두 잡지에 실리는 논문들은 평균적으로 인용횟수가 높다. 반면, 새로운 발견이나 획기적인 결과들은 나중에 틀린 것으로 판명나는 경우도 많다. 편집자에게 보내는 레터(letter) 형식으로 쓰이는 논문들은 길이가 짧기 때문에 (최소한 천체물리 분야를 본다면) 도대체 어떻게 구체적으로 그런 결과가 나왔고 그 결과가 얼마나 신빙성 있는지를 판단하기도 쉽지 않다.

재밌게도 한국에서는 사이언스와 네이처에 실린 논문을 다른 전문 저널들에 실린 논문들보다 더 높게 평가한다. 가령, 한국의 대학에서 교수임용을 하거나 업적을 평가할 때 사이언스나 네이처에 실린 논문에 훨씬 높은 점수를 준다. 그 이유는 소위 영향력 지수 (impact factor)가 높기 때문이란다. 영향력 지수라는 것은 저널에 실린 논문들이 다른 연구자들에 의해 얼마나 많이 인용되었는지를 계산한 평균값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저널 자체를 평가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영향력 지수가 높은 저널은 대략 인용이 많이 되는 좋은 논문들이 실리기 때문에 그만큼 좋은 저널이라고 할 수 있다. 사이언스나 네이처는 다른 전문저널들 보다 영향력 지수가 높다.

물론 인용이 많이 되는 논문이 훌륭한 논문이라는 것은 객관적 평가다. 문제는 평균적으로 인용횟수가 높은 논문들이 실리는 저널이라고 해서 거기 실리는 모든 논문들의 인용횟수가 높은 건 아니라는 점이다. 인용횟수가 중요하다면 그 논문 자체가 얼마나 많이 인용되었는지를 평가하면 되는 일이지 논문이 실린 저널의 평균적 인용횟수가 왜 중요하다는 말인가? 영향력 지수가 높은 사이언스나 네이처에 실린 논문이 (그 논문이 실제로 얼마나 인용되었는지는 보지도 않고) 영향력 지수가 낮은 저널에 실린 (그러나 더 많이 인용되었을 수도 있는) 논문에 비해 훨씬 높은 점수를 받는다는 것은 정말 우스꽝스럽다. 이런 획일적인 기준은 사이언스나 네이처라는 명품 브랜드가 찍혀있으면 상품의 질과 상관없이 무조건 높이 평가하는 명품 집착증의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사이언스나 네이처에 논문 하나 내지 못한 주제에 그런 비판을 한다고 누군가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맞다. 나는 사이언스나 네이처에 논문을 낸 적이 없다. 앞으로도 별로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 두 잡지에 논문을 내겠다는 목표를 가진 적도 없고 그 두 잡지에 낸 논문이 없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우리 분야 최고의 전문저널에 계속 논문들을 내고 있고 그리고 그 중에서 몇 편은 사이언스나 네이처 논문들의 평균 인용횟수보다 더 많이 인용되었기 때문이다. 사이언스나 네이처에 논문을 내려고 바동거리는 많은 과학자들은 한국에서 그 두 잡지를 높게 평가하니까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명품에 눈먼 사회는 명품을 좇는 사람들을 만들어 낸다. 명품이라는 모래 위에 허울 좋은 명품 집이 세워진다. 자자손손 지속될 것 같다.

우리가 싸울 싸움은 그분이 내 삶의 주인 되심을 고백한 뒤에도 끊임없이 그분의 자리를 찬탈하려는 자신과의 싸움이다. 세상은 고급스런 명품들로 우리의 오감을 유혹하며 명품을 소유하라, 명품이 되라며 우상숭배를 부추긴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유혹의 힘은 강력하다. 그러나 명품이 만들어내는 세계는 환상에 불과하다. 신이라는 명품을 버리고 허접한 인간이 되신 예수를 기억하라. 날마다 명품과의 싸움에서 참 명품 되신 그분께 의지해야 한다. 명품의 환상에서 깨어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