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호 과학칼럼] 한 방향으로만 가면 결국 골로 간다
우종학 (천문학박사, UCLA)
오랜 기간 조금씩 친해진 사람이 있다. 속 깊고 배려심 많은 사람으로 나랑 가깝게 지내고 싶어 한다. 그런데 딱 하나 걸리는 것은 그가 독실한 기독교인이라는 점이다. 기독교인들과는 사귀지 않겠다는 생각이 이명박과 그의 지지자들 때문에 더욱 굳어졌는데 어떡할까? 계속 거리를 두어야 하나?
아내가 애용하는 어느 카페에 올라온 글이었다. 그 얘기를 듣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기독교인이라는 점 때문에 마음을 주어야 할지 망설여진다니….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어느 수준인지를 확연히 보여주는 글이었다. 그 글에 달린 댓글들의 내용은 그래도 점잖았다. ‘교회다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일단 조심해야 하지만 그래도 가깝게 한번 지내보라는 것이 대체적인 내용이었다.
한 주 동안 어느 대형수련회에 다녀왔다.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뜨겁게 찬양하고 열광하는 시간에 내 머리 속에는 아내에게 들은 그 얘기가 자꾸 떠올랐다. 여기 이 사람들과 그 얘기에 나오는 그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오버랩되었다. 과연 이 둘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나와 우리는 어떻게 해야 그렇게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아닐 수 있을까?
복음을 위해서 받는 고난은 영광스럽지만 자기 잘못으로 받는 고난은 부끄럽다. 문제는 복음을 위해 받는 고난과 자기 잘못으로 받는 고난을 많은 사람들이 혼동한다는 점이다. 개신교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앞으로 더 큰 어려움을 당할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복음 때문에 생길 고난인지 혹은 자기 잘못으로 생길 고난인지는 깊이 자문해야 한다.
어쩌다가 교회는 세상 사람들이 꺼려하는 교인들을 만들어내고 있을까?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자기들끼리 지지고 볶는 교회가 싫다며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를 등진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많은 이유 중에는 권위의 문제와 소통의 문제가 포함된다. 꼭 청년들에게만 해당하는 문제는 아닐 수 있지만 청년들의 경우에 특히 문제가 되는 이 두 가지를 짚어보자.
성경의 권위, 목사의 권위
청년들이 교회를 등지는 이유 중 하나는 내용보다는 권위에 의존하는 교회의 구조 때문이 아닐까? ‘아버지가 하는 말이니까 들어!’라고 윽박지른다고 그 말에 순종할 젊은이들이 얼마나 될까? 물론 그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순종하는 척 할 수는 있겠다. 허나 권위를 통해 강요하는 복종은 진정한 힘을 가질 수 없다. 권위를 세우기보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 지를 가르쳐 줄 때 자녀는 오히려 손쉽게 순종한다. 한국의 교회들은 그런 점에서 약하다. 목사의 말이니까, 교회 어른의 말이니까, 그리고 성경이 그렇게 명령하니까 순종해라. 권위에 의존하는 가르침은 탈 권위의 시대에 사는 젊은이들의 순종과 헌신을 결코 끌어내지 못한다.
한국교회의 양적부흥을 경험한 구세대와 지금의 젊은 세대는 권위에 대한 문화적 코드 자체가 다르다. 군사부일체로 대표되는 유교적 문화에서 대통령을 각하라 부르고 선생님들 앞에서는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던, 권위에 복종하던 세대, 오랜 독재와 반민주주의의 시대 동안 권위의 힘 앞에 무력했던 구세대에게는 젊은 세대의 사고방식 자체가 낯설다. 대통령을 감히 넘볼 수 없는 권위의 대상으로 보기 보다는 그저 특별한 역할을 맡은 국민의 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젊은이들의 관점이다. 권위가 아니라 기능이 다른데 주목한다는 말이다. 선생님들의 경우도 그렇다. 구세대가 경험했던 선생님들의 권위는 한국 역사에서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탈 권위의 시대에 사는 젊은이들에게 아직도 권위에 기대어 복종을 요구하는 구조를 가진 곳이 바로 교회가 아닐까.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니까, 목사의 말이니까 믿으라는 식의 설교는 구세대에게는 설득력이 있을지 몰라도 젊은이들에게는 어림도 어렵다. 권위를 없애자는 뜻이 아니다. 권위가 안 먹힌다는 말이다. 단지 성경과 교회의 권위에 기대어 뭔가를 주장하는 것은 별로 영향력이 없다. 왜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는지 왜 교회는 그렇게 주장하는지 그 내용을 가지고 승부를 걸어야 한다. 성경에 나온다는 사실에 의존하기 보다는 그 내용이 왜 합리적이고 설득력이 있는지를 증거 해야 한다. 권위로 눌러 복종을 끌어내려고 하지 말고 감동과 논리적인 설명으로 순종을 유도해야 한다.
<칼라 오브 프리덤>(The Color of Freedom) 이라는 영화가 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차별 문제와 그에 대항한 넬슨 만델라를 소재로 한 영화다. 만델라를 지켜온 백인 교도관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어느 날 가족과 함께 시내에 나갔다가 폭력의 현장을 목격한다. 갑자기 들이닥친 백인경찰들이 통행증이 없다는 이유로 흑인들을 마구잡이로 때리고 체포하기 시작했다. 아기를 안고 도망치던 어느 젊은 여성이 곤봉에 맞아 쓰러지면서 아기를 바닥에 떨어뜨리고는 경찰에 끌려간다. 그 장면을 본 교도관의 어린 딸은 충격에 휩싸인다. 집에 돌아와서까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 딸은, 엄마를 빼앗기는 아기를 보면서 자신의 아빠가 왜 가만히 있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교도관은 딸에게 그 흑인들은 통행증이 없어서 잡혀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딸은 아빠에게 묻는다. 그러면 우리는 통행증이 있냐고. 엄마는 흑인들만 통행증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것이 신의 뜻이라고. 신의 뜻은 묻지 말고 순종해야 한다고 (We don’t question God). 신의 뜻이란다. 백인과 흑인의 불평등이 신의 뜻이란다. 신의 권위에 기댄 그 대답에 딸은 더 이상 아무런 질문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불만과 답답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과연 그것이 신의 뜻인가? 권위보다는 내용의 정당성이 중요하지 않은가? 내용에 설득력이 없기 때문에 결국 권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닌가? 역사의 수많은 잘못이 신의 뜻이라는 핑계 하에, 신의 권위를 방패로 삼은 인간의 욕심 때문에 저질러지지 않았던가? 나는 현대의 젊은이들이 같은 맥락의 의문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 그런지 충분히 설명하고 설득하지 않고 그저 성경과 교회의 권위로 복종을 강요하는 일이 여전히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과학은 대단한 권위를 갖는다. 가령, 미국산 쇠고기의 안정성 문제에 대해 과학은 막강한 권위를 갖는 듯하다. 그러나 안전하다 혹은 위험하다는 주장 자체는 별로 의미가 없다. 어떻게 그런 주장이 나왔는지 그 내용이 결국 중요하기 때문이다. 과학의 권위는 사실 그 내용에서 태어난다. 과학이 주장하는 내용이 정말로 설득력이 있기에 그 내용을 대표하는 과학이라는 이름에 권위가 부여된다. 거꾸로, 과학에 권위가 있기 때문에 과학자가 말하는 내용이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아무리 탁월한 과학자의 주장이라도 그의 명성 때문에 그 주장이 권위를 갖는 건 아니다. 그 내용 자체가 얼마나 설득력 있고 그럴듯한가를 판단하는 작업을 거치고 나서야, 그의 명성을 높이 인정해 주거나 혹은 콧방귀를 뀌는 일이 가능하다. 내용이 아니라 권위에 의존하는 주장은 그것이 과학이든 혹은 설교이든 결코 설득력이 없다.
일방통행은 어디로 가는가?
청년들이 교회를 등지는 둘째 이유는 소통의 일방성으로 이것이 더 문제다. 수백 아니 수천 명의 사람들을 앉혀놓고 정기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는 것은 엄청난 권력(?)이다. 그래서인지 소위 강단권이라고 하는 설교의 기회를 많은 목사들이 절대 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특히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주일예배 시간은 더 그렇다. 그러나 목사가 회중에게 말할 기회는 있지만 회중이 목사에게 말할 기회는 별로 없다. 교회 안에는 별로 소통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진정한 소통을 위해서는 양방향의 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교회에 대한 젊은 세대의 불만은 바로 자신들의 생각이 표출될 창구가 없다는 점이 아닐까? 물론 ‘교회가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할 수 있다. 다수가 싫어해도 성경의 내용을 설교해야 하고 다수가 반대해도 주님의 뜻을 실천해야 한다. 교회는 결국 하나님의 뜻에 의해 움직여야 하니까.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성경의 내용과 주님의 뜻이라는 것이 한두 사람에 의해 결정되는 구조자체는 여전히 문제다. 성경을 해석해서 가르치는 설교자의 설교내용에 대해 질문하고 피드백을 줄 수 있는 건강한 구조를 과연 교회가 갖고 있는가? 설교자 한사람에게만 그 작업을 맡기고 나머지는 그가 잘 할 수 있도록 기도만 하라는 것이 과연 설득력이 있는가?
좋다.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것은 목회자의 전문영역이라고 치자. 하지만 성경이 가르치는 내용을 넘어서서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피력하고 별로 전문성을 갖지 못하는 영역까지 함부로 다루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사실을 어떻게 봐야 할까? 독재정권 시절에는 대통령과 권력은 결국 하나님이 세우시는 것이라며 침묵하다가, 진보적인 정권이 들어섰을 때는 정치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며 정부를 비판하고, 기독교인이 대통령이 되어 국민들의 비난을 받을 때는 예수님도 환영받지 못했다며 대통령을 옹호하는 한국교회와 목사님들. 부끄럽다.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일방적으로 외쳐대는 교회에 과연 생각 있는 젊은이들이 남아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한국사회의 여러 시끄러운 이슈들의 바탕에는 국민의 뜻을 들으려는 의지가 없는 정부의 일방성이 있다는 지적이 있다. 한국사회의 민주주의 시계는 벌써 긴 시간을 흘러갔는데 지금의 정부는 왠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에서 온 것 같다. 혹시 그들은 아직도 일방통행의 소통구조만을 갖고 있는 교회라는 외계행성에서 온 사람들이라서 그런 것은 아닐까?
과학의 소통, 과학적 합의
과학이라는 학문이 높이 평가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빠른 시간에 이루어지는 합의 때문이다. 지난 칼럼에서 다룬 것처럼 과학은 단지 객관적 사실들만을 토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거기에는 많은 과학자들의 개인적 의견이 포함된다. 그러니까 단기간으로 보면 과학은 얼마든지 오류와 주관성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그 오류와 주관성을 찾아내고 고쳐나가는 합의의 과정 때문이다. 위대한 과학자가 연구한 내용이 바로 진리가 되지 않는다. 주관적 판단이 얼마든지 포함되어 있을 그 내용 자체를 철저히 점검하는 과학자들 사이의 소통, 양방향의 의견교환이야 말로 과학의 내용을 올바르게 고치고 완성시키는 주요 동력이다. 이 작업을 통해서 오류는 밝혀지고 과학적 결론은 완성도를 갖게 된다.
양방향의 의사소통에 익숙한 젊은이들을 교회는 어떻게 품어야 할까? 한 이슈에 대해 반대 입장을 취하는 양쪽의 의견을 (가령 ‘100분 토론’을 통해) 다 들어본 후에 자신의 의견을 결정하는 생각 있는 젊은이들에게 일방통행은 무기력하고 구시대적이다. 교회는 이들과 소통할 길을 찾아야 한다. 과학적 합의의 과정으로부터 배울 점이 있다면 그것은 교회 안에 다양한 소통의 구조를 세워야 한다는 점이다. 권위에 의존하는 난공불락 같은 설교도 다양한 피드백을 받아야 보다 나아질 수 있다. 복음에 대해 풀리지 않는 의문과 고민들을 받아 줄 창구가 필요하다. 성경공부를 인도하다 보면 교회에서 해결되지 않는 수많은 질문들에 막혀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경우들이 흔하다. 특히 사회문제에 대해 목회자와 교인들 간의 양방향의 의사소통이 이루어져야 하고 그것을 토대로 실천이 이루어져야 한다. 소통을 위한 창조적 아이디어는 오히려 젊은 세대로부터 나올 수 있다.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한국교회가 권위에만 의존하고 일방통행의 구조를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미래는 더욱 불투명하다. 젊은 세대들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해야 한다. 목사를 신처럼 떠받들고 그 권위 아래 아무런 목소리를 낼 수 없는 그런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나도 정말로 무섭다. 그렇게 한 방향으로만 가면 한국교회의 미래는 없다. 그것은 복음 때문에 받는 고난이 아니라 교회의 잘못으로 당연히 받는 고통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한 방향으로만 가면 결국 골로 간다.
우종학 (천문학박사, UCLA)
오랜 기간 조금씩 친해진 사람이 있다. 속 깊고 배려심 많은 사람으로 나랑 가깝게 지내고 싶어 한다. 그런데 딱 하나 걸리는 것은 그가 독실한 기독교인이라는 점이다. 기독교인들과는 사귀지 않겠다는 생각이 이명박과 그의 지지자들 때문에 더욱 굳어졌는데 어떡할까? 계속 거리를 두어야 하나?
아내가 애용하는 어느 카페에 올라온 글이었다. 그 얘기를 듣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기독교인이라는 점 때문에 마음을 주어야 할지 망설여진다니….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어느 수준인지를 확연히 보여주는 글이었다. 그 글에 달린 댓글들의 내용은 그래도 점잖았다. ‘교회다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일단 조심해야 하지만 그래도 가깝게 한번 지내보라는 것이 대체적인 내용이었다.
한 주 동안 어느 대형수련회에 다녀왔다.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뜨겁게 찬양하고 열광하는 시간에 내 머리 속에는 아내에게 들은 그 얘기가 자꾸 떠올랐다. 여기 이 사람들과 그 얘기에 나오는 그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오버랩되었다. 과연 이 둘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나와 우리는 어떻게 해야 그렇게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아닐 수 있을까?
복음을 위해서 받는 고난은 영광스럽지만 자기 잘못으로 받는 고난은 부끄럽다. 문제는 복음을 위해 받는 고난과 자기 잘못으로 받는 고난을 많은 사람들이 혼동한다는 점이다. 개신교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앞으로 더 큰 어려움을 당할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복음 때문에 생길 고난인지 혹은 자기 잘못으로 생길 고난인지는 깊이 자문해야 한다.
어쩌다가 교회는 세상 사람들이 꺼려하는 교인들을 만들어내고 있을까?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자기들끼리 지지고 볶는 교회가 싫다며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를 등진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많은 이유 중에는 권위의 문제와 소통의 문제가 포함된다. 꼭 청년들에게만 해당하는 문제는 아닐 수 있지만 청년들의 경우에 특히 문제가 되는 이 두 가지를 짚어보자.
성경의 권위, 목사의 권위
청년들이 교회를 등지는 이유 중 하나는 내용보다는 권위에 의존하는 교회의 구조 때문이 아닐까? ‘아버지가 하는 말이니까 들어!’라고 윽박지른다고 그 말에 순종할 젊은이들이 얼마나 될까? 물론 그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순종하는 척 할 수는 있겠다. 허나 권위를 통해 강요하는 복종은 진정한 힘을 가질 수 없다. 권위를 세우기보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 지를 가르쳐 줄 때 자녀는 오히려 손쉽게 순종한다. 한국의 교회들은 그런 점에서 약하다. 목사의 말이니까, 교회 어른의 말이니까, 그리고 성경이 그렇게 명령하니까 순종해라. 권위에 의존하는 가르침은 탈 권위의 시대에 사는 젊은이들의 순종과 헌신을 결코 끌어내지 못한다.
한국교회의 양적부흥을 경험한 구세대와 지금의 젊은 세대는 권위에 대한 문화적 코드 자체가 다르다. 군사부일체로 대표되는 유교적 문화에서 대통령을 각하라 부르고 선생님들 앞에서는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던, 권위에 복종하던 세대, 오랜 독재와 반민주주의의 시대 동안 권위의 힘 앞에 무력했던 구세대에게는 젊은 세대의 사고방식 자체가 낯설다. 대통령을 감히 넘볼 수 없는 권위의 대상으로 보기 보다는 그저 특별한 역할을 맡은 국민의 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젊은이들의 관점이다. 권위가 아니라 기능이 다른데 주목한다는 말이다. 선생님들의 경우도 그렇다. 구세대가 경험했던 선생님들의 권위는 한국 역사에서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탈 권위의 시대에 사는 젊은이들에게 아직도 권위에 기대어 복종을 요구하는 구조를 가진 곳이 바로 교회가 아닐까.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니까, 목사의 말이니까 믿으라는 식의 설교는 구세대에게는 설득력이 있을지 몰라도 젊은이들에게는 어림도 어렵다. 권위를 없애자는 뜻이 아니다. 권위가 안 먹힌다는 말이다. 단지 성경과 교회의 권위에 기대어 뭔가를 주장하는 것은 별로 영향력이 없다. 왜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는지 왜 교회는 그렇게 주장하는지 그 내용을 가지고 승부를 걸어야 한다. 성경에 나온다는 사실에 의존하기 보다는 그 내용이 왜 합리적이고 설득력이 있는지를 증거 해야 한다. 권위로 눌러 복종을 끌어내려고 하지 말고 감동과 논리적인 설명으로 순종을 유도해야 한다.
<칼라 오브 프리덤>(The Color of Freedom) 이라는 영화가 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차별 문제와 그에 대항한 넬슨 만델라를 소재로 한 영화다. 만델라를 지켜온 백인 교도관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어느 날 가족과 함께 시내에 나갔다가 폭력의 현장을 목격한다. 갑자기 들이닥친 백인경찰들이 통행증이 없다는 이유로 흑인들을 마구잡이로 때리고 체포하기 시작했다. 아기를 안고 도망치던 어느 젊은 여성이 곤봉에 맞아 쓰러지면서 아기를 바닥에 떨어뜨리고는 경찰에 끌려간다. 그 장면을 본 교도관의 어린 딸은 충격에 휩싸인다. 집에 돌아와서까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 딸은, 엄마를 빼앗기는 아기를 보면서 자신의 아빠가 왜 가만히 있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교도관은 딸에게 그 흑인들은 통행증이 없어서 잡혀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딸은 아빠에게 묻는다. 그러면 우리는 통행증이 있냐고. 엄마는 흑인들만 통행증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것이 신의 뜻이라고. 신의 뜻은 묻지 말고 순종해야 한다고 (We don’t question God). 신의 뜻이란다. 백인과 흑인의 불평등이 신의 뜻이란다. 신의 권위에 기댄 그 대답에 딸은 더 이상 아무런 질문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불만과 답답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과연 그것이 신의 뜻인가? 권위보다는 내용의 정당성이 중요하지 않은가? 내용에 설득력이 없기 때문에 결국 권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닌가? 역사의 수많은 잘못이 신의 뜻이라는 핑계 하에, 신의 권위를 방패로 삼은 인간의 욕심 때문에 저질러지지 않았던가? 나는 현대의 젊은이들이 같은 맥락의 의문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 그런지 충분히 설명하고 설득하지 않고 그저 성경과 교회의 권위로 복종을 강요하는 일이 여전히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과학은 대단한 권위를 갖는다. 가령, 미국산 쇠고기의 안정성 문제에 대해 과학은 막강한 권위를 갖는 듯하다. 그러나 안전하다 혹은 위험하다는 주장 자체는 별로 의미가 없다. 어떻게 그런 주장이 나왔는지 그 내용이 결국 중요하기 때문이다. 과학의 권위는 사실 그 내용에서 태어난다. 과학이 주장하는 내용이 정말로 설득력이 있기에 그 내용을 대표하는 과학이라는 이름에 권위가 부여된다. 거꾸로, 과학에 권위가 있기 때문에 과학자가 말하는 내용이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아무리 탁월한 과학자의 주장이라도 그의 명성 때문에 그 주장이 권위를 갖는 건 아니다. 그 내용 자체가 얼마나 설득력 있고 그럴듯한가를 판단하는 작업을 거치고 나서야, 그의 명성을 높이 인정해 주거나 혹은 콧방귀를 뀌는 일이 가능하다. 내용이 아니라 권위에 의존하는 주장은 그것이 과학이든 혹은 설교이든 결코 설득력이 없다.
일방통행은 어디로 가는가?
청년들이 교회를 등지는 둘째 이유는 소통의 일방성으로 이것이 더 문제다. 수백 아니 수천 명의 사람들을 앉혀놓고 정기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는 것은 엄청난 권력(?)이다. 그래서인지 소위 강단권이라고 하는 설교의 기회를 많은 목사들이 절대 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특히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주일예배 시간은 더 그렇다. 그러나 목사가 회중에게 말할 기회는 있지만 회중이 목사에게 말할 기회는 별로 없다. 교회 안에는 별로 소통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진정한 소통을 위해서는 양방향의 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교회에 대한 젊은 세대의 불만은 바로 자신들의 생각이 표출될 창구가 없다는 점이 아닐까? 물론 ‘교회가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할 수 있다. 다수가 싫어해도 성경의 내용을 설교해야 하고 다수가 반대해도 주님의 뜻을 실천해야 한다. 교회는 결국 하나님의 뜻에 의해 움직여야 하니까.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성경의 내용과 주님의 뜻이라는 것이 한두 사람에 의해 결정되는 구조자체는 여전히 문제다. 성경을 해석해서 가르치는 설교자의 설교내용에 대해 질문하고 피드백을 줄 수 있는 건강한 구조를 과연 교회가 갖고 있는가? 설교자 한사람에게만 그 작업을 맡기고 나머지는 그가 잘 할 수 있도록 기도만 하라는 것이 과연 설득력이 있는가?
좋다.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것은 목회자의 전문영역이라고 치자. 하지만 성경이 가르치는 내용을 넘어서서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피력하고 별로 전문성을 갖지 못하는 영역까지 함부로 다루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사실을 어떻게 봐야 할까? 독재정권 시절에는 대통령과 권력은 결국 하나님이 세우시는 것이라며 침묵하다가, 진보적인 정권이 들어섰을 때는 정치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며 정부를 비판하고, 기독교인이 대통령이 되어 국민들의 비난을 받을 때는 예수님도 환영받지 못했다며 대통령을 옹호하는 한국교회와 목사님들. 부끄럽다.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일방적으로 외쳐대는 교회에 과연 생각 있는 젊은이들이 남아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한국사회의 여러 시끄러운 이슈들의 바탕에는 국민의 뜻을 들으려는 의지가 없는 정부의 일방성이 있다는 지적이 있다. 한국사회의 민주주의 시계는 벌써 긴 시간을 흘러갔는데 지금의 정부는 왠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에서 온 것 같다. 혹시 그들은 아직도 일방통행의 소통구조만을 갖고 있는 교회라는 외계행성에서 온 사람들이라서 그런 것은 아닐까?
과학의 소통, 과학적 합의
과학이라는 학문이 높이 평가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빠른 시간에 이루어지는 합의 때문이다. 지난 칼럼에서 다룬 것처럼 과학은 단지 객관적 사실들만을 토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거기에는 많은 과학자들의 개인적 의견이 포함된다. 그러니까 단기간으로 보면 과학은 얼마든지 오류와 주관성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그 오류와 주관성을 찾아내고 고쳐나가는 합의의 과정 때문이다. 위대한 과학자가 연구한 내용이 바로 진리가 되지 않는다. 주관적 판단이 얼마든지 포함되어 있을 그 내용 자체를 철저히 점검하는 과학자들 사이의 소통, 양방향의 의견교환이야 말로 과학의 내용을 올바르게 고치고 완성시키는 주요 동력이다. 이 작업을 통해서 오류는 밝혀지고 과학적 결론은 완성도를 갖게 된다.
양방향의 의사소통에 익숙한 젊은이들을 교회는 어떻게 품어야 할까? 한 이슈에 대해 반대 입장을 취하는 양쪽의 의견을 (가령 ‘100분 토론’을 통해) 다 들어본 후에 자신의 의견을 결정하는 생각 있는 젊은이들에게 일방통행은 무기력하고 구시대적이다. 교회는 이들과 소통할 길을 찾아야 한다. 과학적 합의의 과정으로부터 배울 점이 있다면 그것은 교회 안에 다양한 소통의 구조를 세워야 한다는 점이다. 권위에 의존하는 난공불락 같은 설교도 다양한 피드백을 받아야 보다 나아질 수 있다. 복음에 대해 풀리지 않는 의문과 고민들을 받아 줄 창구가 필요하다. 성경공부를 인도하다 보면 교회에서 해결되지 않는 수많은 질문들에 막혀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경우들이 흔하다. 특히 사회문제에 대해 목회자와 교인들 간의 양방향의 의사소통이 이루어져야 하고 그것을 토대로 실천이 이루어져야 한다. 소통을 위한 창조적 아이디어는 오히려 젊은 세대로부터 나올 수 있다.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한국교회가 권위에만 의존하고 일방통행의 구조를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미래는 더욱 불투명하다. 젊은 세대들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해야 한다. 목사를 신처럼 떠받들고 그 권위 아래 아무런 목소리를 낼 수 없는 그런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나도 정말로 무섭다. 그렇게 한 방향으로만 가면 한국교회의 미래는 없다. 그것은 복음 때문에 받는 고난이 아니라 교회의 잘못으로 당연히 받는 고통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한 방향으로만 가면 결국 골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