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상황 [213호 과학칼럼]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니다
수배자 전단에 실린 어느 용의자가 ‘얼짱’이라는 이유로 누리꾼들에게 인기를 끈 적이 있다. 예쁘면 모든 것이 용서된다는 말이 실감나는 경우였다.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외모에 따라 차별을 받거나 주었던 기억이 누구에게나 있을 법하다. 그래서인지 다들 외모에 무척이나 충실하다. 각종 부위(?) 별로 살을 빼는 것이 유행하고 몸 만들기에 열심인 남자들도 늘고 있다. 말 그대로 이미지의 시대다. 인간의 오감 중 가장 강력한 것은 시각이다. 말로 아무리 잘 설명해도 잘 그린 그림 하나를 못 당한다. 우리의 의사결정에 바탕이 되는 정보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각을 통해서 얻어진다.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와 팔짱을 끼고 가는 것을 목격하는 것, 범죄 현장에 떨어진 유력한 용의자의 라이터가 눈에 띄는 것, 김밥 할머니를 때리는 어느 젊은 단속원의 동영상을 보는 것 등등, 보는 것은 즉각적인 행동을 불러일으킬 만큼 파괴력이 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이 훨씬 많다. 팔짱을 끼고 가는 것처럼 보였던 여자친구는 사실 아픈 사람을 부축하고 가는 것 일 수도 있고, 범죄현장에 떨어져 있던 라이터는 혐의를 뒤집어씌우기 위해 누군가 조작한 것 일 수 있으며, 김밥 할머니에게 폭력을 가한 젊은 단속원 행동 뒤에는 우리 사회에 깔려 있는 더 근본적이 문제가 있을 수 있다.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니다. 보이는 것에만 기초한 판단은 어리석음으로 귀결된다.
십자가에서 창과 칼에 찔려 처참하게 죽은 예수가 살아 돌아왔다는 동료들의 말을 들었을 때 도마가 보였던 반응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예수가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몇 번에 걸쳐 언급했을 때 알아듣지 못했던 걸 제쳐둔다면,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던 도마의 반응은 지극히 과학적인 태도라고 하겠다. 부활의 몸을 입고 나타난 예수는 죽음 이전과는 분명 다른 모습이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나 혹은 다른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를 즉시 알아보지 못했던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러나 그 예수는 여전히 인자했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의심하는 도마에게 그는 자신의 상처들을 보여주며 직접 만져보라고 했다. 결국, 도마는 봄으로써, 자신의 감각을 통해 예수의 부활을 믿게 되었다. 의심이 많은 나도 아마 도마의 부류가 아닐까. 그러나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얘기를 예수는 덧붙였다. 보이는 것에 기초한 믿음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 기초한 믿음이 한 수 위라는 얘기가 아닐까.
얼마 전 <기독교 국가에 보내는 편지>라는 책을 접했다. 이 책을 쓴 신경과학자인 샘 해리스는 <종교의 종말>이라는 책으로 명성을 얻었다. 리차드 도킨스나 다니엘 데닛 등과 함께 종교적 도그마를 공격하는 주요 논객으로 꼽힌다. 이 책에서 그는 증거를 제시하지 않으며 믿으라고만 하는 기독교에 선전포고를 한다. 기독교의 윤리적·지적 주장들을 해체하는 것이 책의 목적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의 시도는 별로 성공적이지 않은 듯하다. 책을 읽은 뒤, 해리스의 성경 이해가 너무나 피상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책에 인용된 대부분의 성경구절들은 기독교의 신이 얼마나 비윤리적인가를 보이려는 의도로 사용되었다. 가령 성경은 노예제도를 인정했다든가, 이단자·동성애자·안식일에 일한 자·마술을 부린 자 등을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했다든가, 결혼 첫날밤에 신부가 처녀가 아니었음이 밝혀지면 장인 앞에서 신부를 죽이라고 명령했다는 구절들을 인용하면서, 기독교의 신이 윤리의 기초가 된다는 주장이 터무니없다고 반박한다. 전능한 존재가 썼다고 하는 성경의 내용은 서로 모순되는 내용 투성이고 심지어 원의 지름과 둘레 사이의 비례 값인 파이 값에 대해서도 오류를 범하고 있다며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리려고 시도한다.
21세기 미국 사회문화의 시각으로 보면 성경의 이런 구절들이 충격적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인용된 각 구절들의 전후 문맥과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차지하는 역할에 대한 고려없이 이렇게 단순한 인용을 통해 기독교의 신에 잔인한 폭군의 이미지를 입히는 것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성경의 지적인 주장들에 대한 공격도 마찬가지다. 폴킹혼이 언급했듯이 성경은 하나의 책이 아니라 도서관과 같다. 그 안에는 시와 서사, 법전을 비롯한 각종 다른 종류의 책들이 들어있다. 성경에 원 둘레가 원의 지름의 3.14배가 아니라 3배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성경이 모순이라는 얘기는 성경을 과학 교과서로 볼 때나 가능한 얘기다. 샘 해리스의 성경에 대한 이해는 그렇게 피상적이고 그에 바탕을 둔 그의 공격은 힘이 없다. 물론, 에이즈가 광범위하게 퍼져나가는 아프리카에서 성적 타락을 부추긴다는 이유로 콘돔의 존재도 모르는 사람들을 찾아가 콘돔 사용을 죄악이라고 외치고 다니거나, 십대의 성적 타락을 우려해 적절한 성교육을 방해하는 미국의 꼴통 보수 기독교인들, 그리고 촛불 집회에 나온 국민들을 사탄이라고 규정하는 한국의 광적 기독교인들은 샘 해리스의 공격에 엄청나게 화를 낼 지도 모르겠다.
객관적 과학 주관적 신앙?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은 도킨스를 비롯한 다른 무신론 과학자들과 일관되게 해리스도 과학은 증거에 입각한 객관적 사실인데 반해 종교는 그저 한낱 주관적 경험이나 의견에 불과하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이렇게 적는다. “신앙이란 모든 논리적 추론이 실패했을 때, 어떤 신자가 다른 신자에게 해 줄 수 있는 면책에 불과하다.” 과연 그럴까?
흔히 과학은 객관적, 신앙은 주관적이라는 말을 듣는다. 과학은 객관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신앙은 개인의 체험과 같은 주관적 경험을 대상으로 한다는 말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과학은 보이는 것에 기초하고 신앙은 보이지 않는 것에 기초한다. 눈에 보이는 사실들을 다루는 과학은 객관적이고 옳고 그름이 분명한 반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신과 구원의 문제를 다루는 신앙은 그저 하나의 개인적 의견이나 경험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흔히 과학으로 무장된 그리고 신앙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과학과 신앙의 수준 차이를 극명하게 벌여놓고 권위있는 과학의 입장에서 봤을 때 신앙은 그저 한낱 주관적 고백에 불과할 뿐이라고. 약간의 일리가 있긴 하지만 그렇게 흑백논리로 과학과 신앙을 갈라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과학은 보이는 것에 기초하는가?
과학이 객관적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렇다’라고 대답하겠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과학의 진보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과학자들끼리의 공동체에서 정한 나름대로의 체계일 뿐이라는 과학철학자들의 주장도 있지만 그렇다면 과학은 그렇게 강력할 수 없다. 객관적인 준거의 틀이 없다면 그 체계는 곧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근대주의의 사조에서 과학이 태어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유효성은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여전하다.
그러나 과학이 순전히 보이는 것들을 토대로 한 객관적 사실의 체계인가라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단연코 NO이다. 우선, 과학은 단순한 현상들도 다루지만 매우 복잡한 현상들도 다룬다는 점을 살펴보자.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과 같은 단순한 현상의 경우에는 눈에 보이는 그대로 결론을 내리는 일이 가능하다. 반면, 양자의 세계와 같이 복잡한 현상은 과학자들이 과연 무엇을 보고 있는지 그 자체를 파악하는 일이 쉽지 않다. 즉, 눈에 들어오는 정보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으며, 그 정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매우 다른 과학적 결론이 내려진다. 결국 관련된 이론들이 ‘눈으로 보는 일’ 그 자체에 밀접하게 연결된다. 그렇다면 어떤 이론에 근거를 두고 눈에 보이는 정보를 해석해야 할까? 결국 다양한 현상들을 설명해 주는 과학의 큰 그림을 가지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과학은 이론과 관측(혹은 실험)이 끊임없이 연관되어 서로 수정되며 정확한 그림을 그려간다. 그리고 그 한 그림은 과학이라는 큰 그림을 이루는 작은 요소가 된다. 이런 면을 고려한다면 과학은 눈에 보이는 정보에 객관적으로 기초한다고 단순하게 말할 수는 없다. 그 정보를 이해하는 일 자체가 객관적으로 아직 검증되지 않은 이론들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어떤 현상을 이해하는 과학자들의 의견(혹은 이론)은 다분히 주관적일 수 있다. 명백한 과학적 합의에 도달하기 전까지, 그 의견은 다양하고 서로 배치되기도 한다. 지난 몇 달에 걸쳐 심사하고 있는 논문의 예를 들어볼까? 이 논문의 한 부분에 대해서 논문의 저자들과 심사를 하고 있는 나 사이에 의견 일치가 되지 않아 벌써 세 번째 수정 논문이 들어왔다. 내가 보기에는 분명 잘못했는데 저자들은 옳다고 계속 주장한다. 누구 말이 맞을까? 글쎄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와 그들의 의견이 둘 다 객관적 일 수는 없다는 점이다. 이 분야에 전문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저널의 편집자가 나에게 심사를 의뢰했겠지만 그렇다고 내 의견이 꼭 옳을 수는 없다. 계속 논리적 싸움을 거쳐 진실에 가까운 해석을 찾아갈 뿐. 과학적 결론이 내려지기까지는 이처럼 다소 주관적인 과학자들의 의견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물론 한두 번 잘못 되더라도 결국 과학의 큰 그림에 맞는 의견이 걸러질 테지만 말이다.)
과학이 다루는 수많은 대상들은 우리 눈에 직접 보이지도 않는다. 우리 눈앞에 블랙홀이 존재한다고 가정해 볼까? 블랙홀은 강력한 중력 때문에 심지어 빛조차도 빠져 나올 수 없는 초고밀도의 물체다. 그러니까 그 정의상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블랙홀의 존재를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까? 물론 과학자들은 여러 관측과 이론을 통해서 블랙홀의 존재를 밝혀낸다. 블랙홀의 존재를 의심하는 천체물리학자는 거의 없다. 하지만 블랙홀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이런 논점은 전자의 세계에도 적용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전자들의 존재를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과학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객관적 사실들을 기초로 하는 건 아니다. 블랙홀이나 전자의 존재를 객관적으로 입증하기 위해서는 과학의 다양한 이론들에 비추어 다양한 실험이나 관측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한 연구를 통해 과학이라는 큰 그림에 잘 들어맞을 때,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객관적 과학의 내용으로 확립된다.
과학에도 결코 입증 될 수 없는 내용들이 포함된다. 이러한 내용들은 흔히 과학의 전제라고 한다. 대표적인 예로 ‘물리 법칙이 시간과 장소에 따라 변하지 않고 항상 같다’라는 전제가 그렇다. 이 전제는 결코 보이는 정보들에 기초해서 입증될 수 없다. 그러나 이 전제 없이는 과학 활동 자체가 불가능하다. 과학의 큰 그림 안에서 이 전제는 매우 유효하지만 이 전제가 옳음을 보일 수 있는 과학자는 없다. 물론 모든 과학자가 그러한 도전을 불필요하고 부적절한 것으로 웃어 넘길테지만 말이다.
결국, 단순히 ‘과학은 객관적이다’라고 하는 말은 그리 정확하지 않다. 과학 안에는 결코 입증될 수 없는 전제들과 눈에 보이지 않는 현상들과 그에 대한 과학자들의 의견이라고 할 수 있는 다양한 이론들이 섞여있다. 이렇게 다양한 요소들을 통해 그려지는 과학의 큰 그림은 객관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과학의 모든 세부사항이 객관적이고 눈에 보이는 사실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류다.
신앙은 주관적 내용에 불과한가?
반면, 신앙도 단지 주관적 내용에 그치는 건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의 삶, 성경의 기록, 방대한 교회의 역사와 개개인의 신앙인이 경험하는 삶의 내용들이 포함된다. 물론 이런 내용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부분에는 주관적 판단이 들어간다. 하지만 예수의 삶과, 성경, 교회사와 개인의 경험들은 서로 일관되게 연관되며 기독교 신앙이라는 큰 그림을 그려낸다. 보이지 않는 현상을 과학이론을 토대로 해석하고 이해해서 과학의 내용으로 삼듯이, 공동체나 개인의 경험도 얼마든지 기독교 신앙이라는 객관적인 큰 그림을 그리는 밑천이 될 수 있다. 예수의 부활을 목격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부활을 믿는 신앙은 객관적이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블랙홀의 존재를 과학자들이 믿듯이, 신앙인들도 예수의 부활을 믿을 수 있다. 블랙홀의 존재가 과학의 여러 이론과 관측으로 확증되어 과학의 내용으로 확립되듯이, 예수의 부활도 다양한 증언과 기록들 그리고 예수의 삶 자체와 신앙인의 주관적 경험을 통해 확증되어 기독교신앙의 내용으로 확립된다.
물론 과학과 신앙이 일대일의 관계로 정확히 대비될 수는 없다. 하지만 과학이 눈에 보이는 사실과 눈에 보이지 않는 내용이 섞여서 큰 그림을 그리듯 신앙도 눈에 보이는 사실과 눈에 보이지 않는 내용이 함께 섞여 그 체계를 이룬다. 과학은 객관적이고 신앙은 주관적이라는 말은 그래서 옳지 않다. 신의 존재도 마찬가지이다. 신의 존재는 신앙인들에게 마치 하나의 전제라고 볼 수 도 있다. 과학자들이 과학의 전제를 입증할 수는 없지만 의심하지 않듯, 신앙인들에게 신의 존재는 너무나 자명하다. 신의 존재라는 전제와 성경과 예수의 삶이라는 눈에 보이는 자료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공동체적, 개인적 경험과 그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과 이해가 어우러져 기독교신앙이 구성된다. 신앙을 단순히 주관적 내용에 불과하다고 폄하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다.
믿음은 무엇인가?
기독교 신앙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과연 무엇일까? 나는 두 가지의 믿음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과학의 블랙홀처럼, 다양한 자료와 이론으로 어느 정도 객관적 논증이 가능한 내용에 해당된다. 하나님의 존재나, 예수의 부활 등이 그렇다. 이 내용들은 우리가 얼마든지 논리적으로 변증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나 예수의 부활은 어떠한 의미에서는 믿음의 내용이 아닐 수도 있다. 왜냐하면 객관적으로 논증이 가능한 사실은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되지, 굳이 믿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믿는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 해당되는 얘기다. 누군가 빅뱅우주론을 믿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싱거운 질문이 될 것이다. 빅뱅우주론은 그 이론과 증거들을 따져보고 그냥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믿음은 그 이론과 증거가 불충분할 때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 신의 존재와 예수의 부활에 관해서도 믿음의 측면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신의 존재와 예수의 부활을 단순히 알고 인정하는 것은 믿음과 다르기 때문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원자라는 사실은 심지어 귀신들도 알고 두려워한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지식이 믿음과 같을 수는 없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두 번째 종류의 믿음을 생각해 봐야 한다.
두 번째는 인격적 믿음이다. 그 믿음의 대표적인 예는 바로 아브라함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줄 것이라고 약속했을 때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받아들였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말을 받아들인 사라의 행동을 믿음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믿음은 사실 객관적 내용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다. 아브라함은 자신과 아내인 사라의 나이를 생각해 봤을 때 그리고 여태껏 자식이 없었음을 돌아봤을 때 자손을 얻게 해 주겠다는 얘기를 믿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약속을 해 준 분이 신실한 분이었기 때문에 받아들였다. 마치 어린아이가 생일에 장난감을 사주겠다고 약속하는 아빠의 말을 믿는 것처럼. 아이가 아빠의 말을 믿을 때 아빠가 실업자인지 아닌지, 아빠의 수입이 충분한지 등의 객관적 정황들을 살펴서 믿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자신을 사랑해주고 약속을 지켜준 아빠가 해 준 약속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경우가 바로 그랬고 이것이 바로 복음이 요구하는 믿음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 바로 복음의 내용이고 그 약속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며 그 믿음을 통해 구원이 이루어진다. 날마다 자신을 배신하는 내 속의 깊은 죄성이나 악과 고통으로 가득차고 모순된 듯한 세상과 같은 객관적 정황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신뢰하고 그 약속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결코,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니다. 핍박 받는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베드로는 격려의 편지를 보낸다. 그의 서신에서 가장 감명 깊은 표현 중의 하나는 이렇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사랑하며, 지금 그를 볼 수 없으면서도 믿으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영광과 즐거움을 바라보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 사자 밥으로 죽어나가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보지도 못한, 만나지도 못한 그리스도를 끝까지 믿으며 죽어나갔다. 결코,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니다. 보이는 것에 좌우되는 현대사회에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진리를 붙들고 사는 일은 쉽지 않다. 보이지도 않는 신을 어떻게 믿느냐는 무신론자들의 비웃음 앞에서, 그러나 하나님의 그 신실하심을 신뢰하며 살고 죽었던 구름같이 허다한 믿음의 선배들을 생각하며,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 삶의 기초가 보이는 것에 있는지 보이지 않는 것에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우종학 (천문학 박사, 캘리포니아 대학 산타바바라)
수배자 전단에 실린 어느 용의자가 ‘얼짱’이라는 이유로 누리꾼들에게 인기를 끈 적이 있다. 예쁘면 모든 것이 용서된다는 말이 실감나는 경우였다.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외모에 따라 차별을 받거나 주었던 기억이 누구에게나 있을 법하다. 그래서인지 다들 외모에 무척이나 충실하다. 각종 부위(?) 별로 살을 빼는 것이 유행하고 몸 만들기에 열심인 남자들도 늘고 있다. 말 그대로 이미지의 시대다. 인간의 오감 중 가장 강력한 것은 시각이다. 말로 아무리 잘 설명해도 잘 그린 그림 하나를 못 당한다. 우리의 의사결정에 바탕이 되는 정보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각을 통해서 얻어진다.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와 팔짱을 끼고 가는 것을 목격하는 것, 범죄 현장에 떨어진 유력한 용의자의 라이터가 눈에 띄는 것, 김밥 할머니를 때리는 어느 젊은 단속원의 동영상을 보는 것 등등, 보는 것은 즉각적인 행동을 불러일으킬 만큼 파괴력이 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이 훨씬 많다. 팔짱을 끼고 가는 것처럼 보였던 여자친구는 사실 아픈 사람을 부축하고 가는 것 일 수도 있고, 범죄현장에 떨어져 있던 라이터는 혐의를 뒤집어씌우기 위해 누군가 조작한 것 일 수 있으며, 김밥 할머니에게 폭력을 가한 젊은 단속원 행동 뒤에는 우리 사회에 깔려 있는 더 근본적이 문제가 있을 수 있다.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니다. 보이는 것에만 기초한 판단은 어리석음으로 귀결된다.
십자가에서 창과 칼에 찔려 처참하게 죽은 예수가 살아 돌아왔다는 동료들의 말을 들었을 때 도마가 보였던 반응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예수가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몇 번에 걸쳐 언급했을 때 알아듣지 못했던 걸 제쳐둔다면,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던 도마의 반응은 지극히 과학적인 태도라고 하겠다. 부활의 몸을 입고 나타난 예수는 죽음 이전과는 분명 다른 모습이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나 혹은 다른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를 즉시 알아보지 못했던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러나 그 예수는 여전히 인자했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의심하는 도마에게 그는 자신의 상처들을 보여주며 직접 만져보라고 했다. 결국, 도마는 봄으로써, 자신의 감각을 통해 예수의 부활을 믿게 되었다. 의심이 많은 나도 아마 도마의 부류가 아닐까. 그러나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얘기를 예수는 덧붙였다. 보이는 것에 기초한 믿음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 기초한 믿음이 한 수 위라는 얘기가 아닐까.
얼마 전 <기독교 국가에 보내는 편지>라는 책을 접했다. 이 책을 쓴 신경과학자인 샘 해리스는 <종교의 종말>이라는 책으로 명성을 얻었다. 리차드 도킨스나 다니엘 데닛 등과 함께 종교적 도그마를 공격하는 주요 논객으로 꼽힌다. 이 책에서 그는 증거를 제시하지 않으며 믿으라고만 하는 기독교에 선전포고를 한다. 기독교의 윤리적·지적 주장들을 해체하는 것이 책의 목적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의 시도는 별로 성공적이지 않은 듯하다. 책을 읽은 뒤, 해리스의 성경 이해가 너무나 피상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책에 인용된 대부분의 성경구절들은 기독교의 신이 얼마나 비윤리적인가를 보이려는 의도로 사용되었다. 가령 성경은 노예제도를 인정했다든가, 이단자·동성애자·안식일에 일한 자·마술을 부린 자 등을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했다든가, 결혼 첫날밤에 신부가 처녀가 아니었음이 밝혀지면 장인 앞에서 신부를 죽이라고 명령했다는 구절들을 인용하면서, 기독교의 신이 윤리의 기초가 된다는 주장이 터무니없다고 반박한다. 전능한 존재가 썼다고 하는 성경의 내용은 서로 모순되는 내용 투성이고 심지어 원의 지름과 둘레 사이의 비례 값인 파이 값에 대해서도 오류를 범하고 있다며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리려고 시도한다.
21세기 미국 사회문화의 시각으로 보면 성경의 이런 구절들이 충격적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인용된 각 구절들의 전후 문맥과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차지하는 역할에 대한 고려없이 이렇게 단순한 인용을 통해 기독교의 신에 잔인한 폭군의 이미지를 입히는 것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성경의 지적인 주장들에 대한 공격도 마찬가지다. 폴킹혼이 언급했듯이 성경은 하나의 책이 아니라 도서관과 같다. 그 안에는 시와 서사, 법전을 비롯한 각종 다른 종류의 책들이 들어있다. 성경에 원 둘레가 원의 지름의 3.14배가 아니라 3배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성경이 모순이라는 얘기는 성경을 과학 교과서로 볼 때나 가능한 얘기다. 샘 해리스의 성경에 대한 이해는 그렇게 피상적이고 그에 바탕을 둔 그의 공격은 힘이 없다. 물론, 에이즈가 광범위하게 퍼져나가는 아프리카에서 성적 타락을 부추긴다는 이유로 콘돔의 존재도 모르는 사람들을 찾아가 콘돔 사용을 죄악이라고 외치고 다니거나, 십대의 성적 타락을 우려해 적절한 성교육을 방해하는 미국의 꼴통 보수 기독교인들, 그리고 촛불 집회에 나온 국민들을 사탄이라고 규정하는 한국의 광적 기독교인들은 샘 해리스의 공격에 엄청나게 화를 낼 지도 모르겠다.
객관적 과학 주관적 신앙?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은 도킨스를 비롯한 다른 무신론 과학자들과 일관되게 해리스도 과학은 증거에 입각한 객관적 사실인데 반해 종교는 그저 한낱 주관적 경험이나 의견에 불과하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이렇게 적는다. “신앙이란 모든 논리적 추론이 실패했을 때, 어떤 신자가 다른 신자에게 해 줄 수 있는 면책에 불과하다.” 과연 그럴까?
흔히 과학은 객관적, 신앙은 주관적이라는 말을 듣는다. 과학은 객관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신앙은 개인의 체험과 같은 주관적 경험을 대상으로 한다는 말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과학은 보이는 것에 기초하고 신앙은 보이지 않는 것에 기초한다. 눈에 보이는 사실들을 다루는 과학은 객관적이고 옳고 그름이 분명한 반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신과 구원의 문제를 다루는 신앙은 그저 하나의 개인적 의견이나 경험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흔히 과학으로 무장된 그리고 신앙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과학과 신앙의 수준 차이를 극명하게 벌여놓고 권위있는 과학의 입장에서 봤을 때 신앙은 그저 한낱 주관적 고백에 불과할 뿐이라고. 약간의 일리가 있긴 하지만 그렇게 흑백논리로 과학과 신앙을 갈라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과학은 보이는 것에 기초하는가?
과학이 객관적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렇다’라고 대답하겠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과학의 진보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과학자들끼리의 공동체에서 정한 나름대로의 체계일 뿐이라는 과학철학자들의 주장도 있지만 그렇다면 과학은 그렇게 강력할 수 없다. 객관적인 준거의 틀이 없다면 그 체계는 곧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근대주의의 사조에서 과학이 태어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유효성은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여전하다.
그러나 과학이 순전히 보이는 것들을 토대로 한 객관적 사실의 체계인가라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단연코 NO이다. 우선, 과학은 단순한 현상들도 다루지만 매우 복잡한 현상들도 다룬다는 점을 살펴보자.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과 같은 단순한 현상의 경우에는 눈에 보이는 그대로 결론을 내리는 일이 가능하다. 반면, 양자의 세계와 같이 복잡한 현상은 과학자들이 과연 무엇을 보고 있는지 그 자체를 파악하는 일이 쉽지 않다. 즉, 눈에 들어오는 정보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으며, 그 정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매우 다른 과학적 결론이 내려진다. 결국 관련된 이론들이 ‘눈으로 보는 일’ 그 자체에 밀접하게 연결된다. 그렇다면 어떤 이론에 근거를 두고 눈에 보이는 정보를 해석해야 할까? 결국 다양한 현상들을 설명해 주는 과학의 큰 그림을 가지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과학은 이론과 관측(혹은 실험)이 끊임없이 연관되어 서로 수정되며 정확한 그림을 그려간다. 그리고 그 한 그림은 과학이라는 큰 그림을 이루는 작은 요소가 된다. 이런 면을 고려한다면 과학은 눈에 보이는 정보에 객관적으로 기초한다고 단순하게 말할 수는 없다. 그 정보를 이해하는 일 자체가 객관적으로 아직 검증되지 않은 이론들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어떤 현상을 이해하는 과학자들의 의견(혹은 이론)은 다분히 주관적일 수 있다. 명백한 과학적 합의에 도달하기 전까지, 그 의견은 다양하고 서로 배치되기도 한다. 지난 몇 달에 걸쳐 심사하고 있는 논문의 예를 들어볼까? 이 논문의 한 부분에 대해서 논문의 저자들과 심사를 하고 있는 나 사이에 의견 일치가 되지 않아 벌써 세 번째 수정 논문이 들어왔다. 내가 보기에는 분명 잘못했는데 저자들은 옳다고 계속 주장한다. 누구 말이 맞을까? 글쎄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와 그들의 의견이 둘 다 객관적 일 수는 없다는 점이다. 이 분야에 전문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저널의 편집자가 나에게 심사를 의뢰했겠지만 그렇다고 내 의견이 꼭 옳을 수는 없다. 계속 논리적 싸움을 거쳐 진실에 가까운 해석을 찾아갈 뿐. 과학적 결론이 내려지기까지는 이처럼 다소 주관적인 과학자들의 의견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물론 한두 번 잘못 되더라도 결국 과학의 큰 그림에 맞는 의견이 걸러질 테지만 말이다.)
과학이 다루는 수많은 대상들은 우리 눈에 직접 보이지도 않는다. 우리 눈앞에 블랙홀이 존재한다고 가정해 볼까? 블랙홀은 강력한 중력 때문에 심지어 빛조차도 빠져 나올 수 없는 초고밀도의 물체다. 그러니까 그 정의상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블랙홀의 존재를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까? 물론 과학자들은 여러 관측과 이론을 통해서 블랙홀의 존재를 밝혀낸다. 블랙홀의 존재를 의심하는 천체물리학자는 거의 없다. 하지만 블랙홀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이런 논점은 전자의 세계에도 적용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전자들의 존재를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과학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객관적 사실들을 기초로 하는 건 아니다. 블랙홀이나 전자의 존재를 객관적으로 입증하기 위해서는 과학의 다양한 이론들에 비추어 다양한 실험이나 관측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한 연구를 통해 과학이라는 큰 그림에 잘 들어맞을 때,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객관적 과학의 내용으로 확립된다.
과학에도 결코 입증 될 수 없는 내용들이 포함된다. 이러한 내용들은 흔히 과학의 전제라고 한다. 대표적인 예로 ‘물리 법칙이 시간과 장소에 따라 변하지 않고 항상 같다’라는 전제가 그렇다. 이 전제는 결코 보이는 정보들에 기초해서 입증될 수 없다. 그러나 이 전제 없이는 과학 활동 자체가 불가능하다. 과학의 큰 그림 안에서 이 전제는 매우 유효하지만 이 전제가 옳음을 보일 수 있는 과학자는 없다. 물론 모든 과학자가 그러한 도전을 불필요하고 부적절한 것으로 웃어 넘길테지만 말이다.
결국, 단순히 ‘과학은 객관적이다’라고 하는 말은 그리 정확하지 않다. 과학 안에는 결코 입증될 수 없는 전제들과 눈에 보이지 않는 현상들과 그에 대한 과학자들의 의견이라고 할 수 있는 다양한 이론들이 섞여있다. 이렇게 다양한 요소들을 통해 그려지는 과학의 큰 그림은 객관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과학의 모든 세부사항이 객관적이고 눈에 보이는 사실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류다.
신앙은 주관적 내용에 불과한가?
반면, 신앙도 단지 주관적 내용에 그치는 건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의 삶, 성경의 기록, 방대한 교회의 역사와 개개인의 신앙인이 경험하는 삶의 내용들이 포함된다. 물론 이런 내용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부분에는 주관적 판단이 들어간다. 하지만 예수의 삶과, 성경, 교회사와 개인의 경험들은 서로 일관되게 연관되며 기독교 신앙이라는 큰 그림을 그려낸다. 보이지 않는 현상을 과학이론을 토대로 해석하고 이해해서 과학의 내용으로 삼듯이, 공동체나 개인의 경험도 얼마든지 기독교 신앙이라는 객관적인 큰 그림을 그리는 밑천이 될 수 있다. 예수의 부활을 목격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부활을 믿는 신앙은 객관적이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블랙홀의 존재를 과학자들이 믿듯이, 신앙인들도 예수의 부활을 믿을 수 있다. 블랙홀의 존재가 과학의 여러 이론과 관측으로 확증되어 과학의 내용으로 확립되듯이, 예수의 부활도 다양한 증언과 기록들 그리고 예수의 삶 자체와 신앙인의 주관적 경험을 통해 확증되어 기독교신앙의 내용으로 확립된다.
물론 과학과 신앙이 일대일의 관계로 정확히 대비될 수는 없다. 하지만 과학이 눈에 보이는 사실과 눈에 보이지 않는 내용이 섞여서 큰 그림을 그리듯 신앙도 눈에 보이는 사실과 눈에 보이지 않는 내용이 함께 섞여 그 체계를 이룬다. 과학은 객관적이고 신앙은 주관적이라는 말은 그래서 옳지 않다. 신의 존재도 마찬가지이다. 신의 존재는 신앙인들에게 마치 하나의 전제라고 볼 수 도 있다. 과학자들이 과학의 전제를 입증할 수는 없지만 의심하지 않듯, 신앙인들에게 신의 존재는 너무나 자명하다. 신의 존재라는 전제와 성경과 예수의 삶이라는 눈에 보이는 자료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공동체적, 개인적 경험과 그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과 이해가 어우러져 기독교신앙이 구성된다. 신앙을 단순히 주관적 내용에 불과하다고 폄하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다.
믿음은 무엇인가?
기독교 신앙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과연 무엇일까? 나는 두 가지의 믿음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과학의 블랙홀처럼, 다양한 자료와 이론으로 어느 정도 객관적 논증이 가능한 내용에 해당된다. 하나님의 존재나, 예수의 부활 등이 그렇다. 이 내용들은 우리가 얼마든지 논리적으로 변증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나 예수의 부활은 어떠한 의미에서는 믿음의 내용이 아닐 수도 있다. 왜냐하면 객관적으로 논증이 가능한 사실은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되지, 굳이 믿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믿는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 해당되는 얘기다. 누군가 빅뱅우주론을 믿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싱거운 질문이 될 것이다. 빅뱅우주론은 그 이론과 증거들을 따져보고 그냥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믿음은 그 이론과 증거가 불충분할 때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 신의 존재와 예수의 부활에 관해서도 믿음의 측면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신의 존재와 예수의 부활을 단순히 알고 인정하는 것은 믿음과 다르기 때문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원자라는 사실은 심지어 귀신들도 알고 두려워한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지식이 믿음과 같을 수는 없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두 번째 종류의 믿음을 생각해 봐야 한다.
두 번째는 인격적 믿음이다. 그 믿음의 대표적인 예는 바로 아브라함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줄 것이라고 약속했을 때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받아들였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말을 받아들인 사라의 행동을 믿음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믿음은 사실 객관적 내용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다. 아브라함은 자신과 아내인 사라의 나이를 생각해 봤을 때 그리고 여태껏 자식이 없었음을 돌아봤을 때 자손을 얻게 해 주겠다는 얘기를 믿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약속을 해 준 분이 신실한 분이었기 때문에 받아들였다. 마치 어린아이가 생일에 장난감을 사주겠다고 약속하는 아빠의 말을 믿는 것처럼. 아이가 아빠의 말을 믿을 때 아빠가 실업자인지 아닌지, 아빠의 수입이 충분한지 등의 객관적 정황들을 살펴서 믿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자신을 사랑해주고 약속을 지켜준 아빠가 해 준 약속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경우가 바로 그랬고 이것이 바로 복음이 요구하는 믿음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 바로 복음의 내용이고 그 약속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며 그 믿음을 통해 구원이 이루어진다. 날마다 자신을 배신하는 내 속의 깊은 죄성이나 악과 고통으로 가득차고 모순된 듯한 세상과 같은 객관적 정황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신뢰하고 그 약속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결코,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니다. 핍박 받는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베드로는 격려의 편지를 보낸다. 그의 서신에서 가장 감명 깊은 표현 중의 하나는 이렇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사랑하며, 지금 그를 볼 수 없으면서도 믿으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영광과 즐거움을 바라보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 사자 밥으로 죽어나가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보지도 못한, 만나지도 못한 그리스도를 끝까지 믿으며 죽어나갔다. 결코,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니다. 보이는 것에 좌우되는 현대사회에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진리를 붙들고 사는 일은 쉽지 않다. 보이지도 않는 신을 어떻게 믿느냐는 무신론자들의 비웃음 앞에서, 그러나 하나님의 그 신실하심을 신뢰하며 살고 죽었던 구름같이 허다한 믿음의 선배들을 생각하며,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 삶의 기초가 보이는 것에 있는지 보이지 않는 것에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우종학 (천문학 박사, 캘리포니아 대학 산타바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