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Expelled'를 주제로 해서 경희대 생물학과의 유정칠 교수가 발표한 글입니다. 짧지만 다양한 입장들을 잘 설명해 주었네요.
1. South Prarks Road vs Pusey Street
이 두 길 이름은 종종 진화론자 그룹과 창조론자 그룹의 대명사로 사용되기도 한다(Peacocke 1979). 사우스 팍스 로드에는 신다윈론의 기수로 1942년 <진화론-현대종합이론>(Evolution-the modern synthesis)을 발표한 줄리언 헉슬리(Julian Huxley)와 오늘날 대표적인 진화론자인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 등을 배출한 옥스퍼드대학 동물학과가 있고, 퓨지 스트리트에는 옥스퍼드대학 신학과가 있다. 옥스퍼드대학교의 신학교는 1885년에 퓨지(Pusey)가 옥스퍼드대학의 한 교회에서 기도와 토론을 위한 피정(Retreats)을 개최한 것이 토대가 되었는데, 퓨지 스트리트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다.
두 길 사이의 거리는 몇 백 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한 곳에서는 생물의 적응과 진화에 대해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는 신에 대해 연구하는 곳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동물학과에서도 많은 헌신적인 기독교인들이 있고 또 동물학과 빌딩에는 데이비드 블랙번(David Blackburn)의 창조에 관한 그림, ‘어둠으로부터의 생명의 빛’이 걸려있다. 이 그림은 유명한 신학자이면서 물리학자인 케임브리지대학 피콕(A.R. Peacocke 1979) 교수의 <창조와 과학의 세계>(Creation and World of Science)란 책의 표지 그림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길 건너 신학과에는 다양한 창조론자들이 있으며, 진화론에서 주장하는 내용의 일부를 받아들이는 사람도 많다.
진화론자들이 창조론자들에게 가지는 이미지는 매우 부정적이다. 과학적 사고를 가지지 못한 자로,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않으려는 단순한 사고를 가진 자들로 생각한다. 옥스퍼드대학 동물학과의 리처드 도킨스가 이들의 대표주자이다. 그는 진화론의 충실한 신도로서 “진화론을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화가 나고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되고 심지어 사악하다고 느껴진다”고 말할 정도로 진화론을 복음으로 생각해 세계 모든 종족에게 전하고 싶어 한다. 이쯤 되면 그의 진화론은 이미 종교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 도킨스는 그의 책 <만들어진 신>에서 자신의 책을 읽게 되면 종교를 가졌던 독자들이 책을 덮을 때 즈음엔 이미 무신론자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하고 있다.
창조론자들 역시 진화론자들이 과학적 사실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고, 마치 그것이 진실인양 왜곡하고, 한 편의 소설을 쓰고 있는 이성적이지 못한 사람들로 생각한다.
옥스퍼드 위클리프신학교(Wycliff Hall)의 알리스터 맥그라스(Alister E. McGrath) 교수는 그의 책 <도킨스의 신>(Dawkins' God)에서 도킨스가 자신의 학문분야인 생물학을 넘어 신학적 문제와 종교를 다룰 때 너무도 무지하고 선동적이라고 비난했다. 옥스퍼드대학 학부에서 화학을 공부하고, 생화학과에서 생물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다시 케임브리지에서 신학을 공부한 맥그라스는 도킨스가 펼치는 무신론 세계에서 어디까지가 과학이고 어디까지가 신앙인지를 잘 보여주었다. 데이비드 로버트슨(David Robertson)도 그의 책 <스스로 있는 신>(The Dawkins Letters)에서, 도킨스가 펼치는 무신론의 세계가 얼마나 자의적이며 논리적이지 못한지에 대해 도킨스에게 보내는 편지형식을 빌려 지적했다.
여기서 우리는 진화론을 지지하는 자들이나 창조론을 지지하는 자들이나, 그 믿음의 스펙트럼은 매우 다양하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진화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생물들이 환경에 적응해왔으며, 현재도 그 과정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살충제에 내성을 갖게 된 해충이나, 항생제에 내성을 가지게 된 슈퍼박테리아 등에서 생물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여기까지는 대부분의 창조론자들도 동의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 진화가 되느냐 하는 문제에 이르게 되면 두 세계관, 즉 창조론과 진화론이 갈라지기 시작한다.
진화론자들은 식물에서 돌연변이로 인해 배수체가 형성되면, 새로 형성된 종은 돌연변이가 일어나기 전의 종과는 더 이상 교배가 일어나지 않고 다른 종으로 분화하는 것을 예로 들어, 종들이 진화한다고 믿는다. 짝수의 염색체 세트(예: 4n, 6n)를 가진 개체로 돌연변이가 일어난 것들은 각 배우자들이 각각 2n, 3n을 가져 서로를 만나 다시 4n과 6n을 가진 개체들로 되어 임성을 가지게 되지만, 3배체의 식물이 만들어진 경우는 배우자를 만날 수 없기 때문에 불임이 된다. 씨 없는 과일 중에는 3배체 식물에 의해 생겨난 것들이 많다. 이들은 씨가 없어서 항상 불임성이지만 접목이나 접지 등에 의해 번식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고등동물에서 배수성 현상은 치명적이거나 여분의 성염색체로 인해 불임성이 된다. 여기까지도 과학의 세계여서 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원핵세포로부터 여러 단계를 거쳐 인간으로 진화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 문제, 즉 인간의 기원에 이르게 되면 진화론자들 중에서도 크게 그 견해가 갈린다. 일부 생물에서 일어나는 종의 분화를 인간에게 까지 적용하는 데 동의하지 않는 진화론자들도 있지만, 리차드 도킨스와 견해를 같이하는 많은 진화론자들은 종의 진화가 하등생물에서 일어나는 방식으로 인간에게 까지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생물의 진화를 믿으면서도 종의 진화에는 매우 많은 장벽이 있어 하등생물에서 인간으로의 진화가 불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도 많다. 이들 중에는 진화론자로 부르기 보다는 창조론자로 부르는 것이 더 자연스럽게 보이는 사람들이 많다. 이제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는 창조론에 대해 알아보자.
2. 창조론자들의 갈등과 지적 교만
지금까지 생명의 첫 창조의 역사를 본 사람이 없기에 창조론자들 사이에서도 세상의 기원에 대한 견해는 다양하고, 종종 갈등과 대립의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많은 ‘젊은지구론자’들은 아담과 이브가 어머니 자궁 속에서 나오지 않았지만 배꼽이 있었던 것처럼, 하늘의 별들도 수십-수억만 광년이 걸리는 거리를 지나쳐 오지 않았더라도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별을 먼저 만든 다음 빛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빛이 진행되고 있는 상태인 별을 만드셨다면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젊은지구론자’들은 지구의 나이가 30-50억년이 아니라 1만년 이내라고 받아들인다. 이는 그들이 방사성 동위원소 연대 측정법으로 지구의 나이를 계산하는 방법에 대해 반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젊은지구론자’들은 유신론적 진화론을 믿게 되면 자연주의적 방법론에 빠지게 되어 결국 초자연적인 것에는 눈을 돌릴 수 없게 되고, 창조세계에서 하나님의 행위를 배제하게 되어 결국 하나님을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고 비판한다. 또한 그들은 만일 자연주의적 방법론을 믿는다면 죽은 자가 되살아나는 것을 믿을 수 없게 된다고 유신론적 진화론을 공격한다. 그러나 만일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이 과학적인 사실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도 믿는다면 이런 비판은 항상 옳은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오랜지구론자’들은 지구의 나이가 30-50억년, 우주의 나이는 100-200억년 정도로 생각한다. 이들은 하나님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한 순간에 만들 수도 있고 오랜 세월에 걸쳐 우리가 오늘날 과학의 눈으로 보이는 대로 창조할 수도 있다고 믿는다. ‘오랜지구론자’들은 이 세상이 오랜 세월에 걸쳐 치밀한 설계 아래 한 단계 한 단계 점진적으로 완성되었다고 믿기 때문에 ‘점진적 창조론’이라고도 불리지만, 오랜 기간과 기간 사이에 존재하는 문자적 의미의 ‘하루’(24시간)를 믿는 오래된 창조론자들도 있어 지구나 우주의 나이에 대해서는 젊은지구론자들에 비해 자유로운 편이다. ‘오랜지구론자’들 중에는 필립 존슨과 같이 최근에 등장한 ‘지적설계론’ 쪽으로 무게 중심을 옮기는 사람들도 있다.
‘오랜지구론자’들은 지구나 우주가 아주 오래 전에 창조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과학적 사실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오랜지구론자’들은 방사성 동위원소로 측정된 지구의 나이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과학적 사실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젊은지구론자’들을 비판한다.
‘젊은지구론자’들 중 일부는 ‘오랜지구론’을 믿게 되면 결국 무신론적 진화론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데, ‘오랜지구론자’들은 이러한 견해를 단호히 거부한다. 그들은 유신론적 자연주의와 세속적인 자연주의 모두를 배격한다.
‘오랜지구론자’들은 생명과 우주의 기원 등에 대해 ‘젊은지구론’은 ‘어떻게’와 ‘언제’라는 과학적 질문에 제한적이며, ‘유신론적 진화론’은 기원에 관한 성경의 주요한 설명을 너무 비유적 의미로만 해석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유신론적 진화론’을 믿는 사람들은 교회가 우주나 지구의 기원 문제에 있어 ‘창조’나 ‘진화’ 중 하나만을 선택하도록 강요하고 있다고 불평한다. 그들은 ‘유신론적 진화론’이야말로 ‘창조’를 중심축으로 하는 기독교의 교리와 ‘진화’라는 과학의 세계가 충돌하지 않는 길이며, 성경에서 생명체의 진화의 가능성을 배제할 어떤 신학적 근거를 찾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진화를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신 수단이라 믿는다.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은 생물과 우주가 스스로 존재하므로 이들의 창조에 하나님이 필요 없다는 진화론적 자연주의에는 반대하는 한편, 생명체와 우주의 형성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목적이 달성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세상을 창조하시고 운영하시느냐는 순전히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생각하기에 유신론적 진화론을 믿는 자들은 진화와 같은 과학의 발견에 대해서 받아들이는 자세를 취한다. 그들은 창조세계의 진화를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주신 능력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생물들의 놀라운 적응 능력과 변화하는 모습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은 교회가 진화라는 말에 무조건적인 거부반응을 보이기 때문에 ‘유신론적 진화론’을 설명할 기회조차도 가지기 힘든 상황과 창조를 부정하는 그룹으로 인식되는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지구나 우주의 연령과 같은 과학적인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면에서 ‘유신론적 진화론’은 ‘오랜지구론’과 맥을 같이하는 점이 많은 반면, ‘젊은지구론’과는 양립하기 어려운 위치에 있다.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은 우리가 ‘젊은지구론’을 믿게 되면 창조-진화 논쟁에서 진화적 자연주의자들에게 생명과 우주의 형성 체계원리를 헌납하는 결과를 가져오므로 기독교 신앙이 잘못된 것으로 비쳐져 앞으로 교회에 부담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에 ‘젊은지구론자’들은 유신론적 진화를 믿게 되면 하나님의 창조가 완전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성경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젊은지구론자들은 ‘유신론적 진화론’을 믿게 되면 방법론적 자연주의에 빠지게 되며, 하나님을 시간과 공간 내에서만 역사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고 경고한다.
최근 ‘젊은지구론’에 반대하는 한편 진화론적 자연주의에도 반대하는 창조론자들은 ‘지적설계론’을 제안하고 있다. 지적설계론자들은 현대 진화론이 특정 우주와 생명체의 형성에 대해 명확히 밝히지 못하는 한계를 파고들어, 그것이 지적설계자의 개입을 통해 형성되었다는 방법론을 취한다. 유신론적 진화론자들도 우주가 하나의 잘 짜여진 설계의 산물임을 인정하지만 ‘지적설계론’에 대해서는 일부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왜냐하면 지적설계론은 과학적 사실과 이론들을 사용하여 진화론의 한계를 지적하므로 매우 정교하고 세련된 이론처럼 들리지만 실제로 ‘젊은지구론’처럼 다시 ‘창조냐 진화냐’의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흑백논리로 귀결되어 버린다고 비판한다.
위에서 언급한 여러 다른 학설을 가진 창조론자들의 공통점은 우주나 생물이 모두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점에는 동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한 방법과 창조세계의 운영방법에 대해서는 각기 견해가 다르다.
마틴 루터와 존 칼빈이 6천년설을 믿고, 존 라이트푸트와 제임스 어셔 등이 아담이 B.C.4004년 10월 23일 오전 9시에 창조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오늘날 창조와 진화에 관한 논쟁에서 이들의 주장은 창조론자들을 괴롭히는 가장 좋은 논거를 제공해 주고 있다. 이들은 모두 창조주를 증거 하려다가 그만 스스로 기독교를 전파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창조론 논쟁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논쟁 자체를 부담스러워 한다. 아직도 논쟁 중인 한 견해만을 하나님의 창조사역으로 선포하고 대중화하는 것은 우리 인간을 하나님 위에 올려놓는 또 다른 지적 교만이고 잘못이지만, 오늘날의 우리 한국 교회는 너무 젊은지구론에 빠져있는 느낌이 든다. 내 생각대로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맞추려는 생각은 정말 위험한 발상이지만 우리는 점점 그런 문화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 교회의 미래를 위협하는 것은 논쟁 그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 보다 높아진 모든 지식이다.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진 자들을 모욕 주고 왕따시키는 사회는 결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이제 창조론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을 진지하게 논의하고 점검해볼 시기가 되었다.
도킨스의 <눈먼 시계공>, <악마의 사도>, 그리고 <만들어진 신>을 읽고 당혹해하는 기독교인들이나, 그 책들을 읽고 무신론에 자신의 일생을 맡기려는 사람들에게 나는 알리스터 맥그래스 교수의 <도킨스의 신>과 <스스로 있는 신>을 읽어보길 권한다. 이들 책들은 근본주의적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허구적인가를 잘 깨닫게 해 줄 것이다.
1992년 11월 15일 옥스퍼드대학에서 열린 ‘과학과 종교’에 관한 토론회에서 도킨스 교수와 격론을 펼쳤던 케임브리지대학의 피콕(Peacocke) 교수는 “과학이 없는 종교는 절름발이고, 종교가 없는 과학은 귀머거리(Religion without science is lame; science without religion is deaf)”라고 주장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과학만능주의에 사로잡힌 오늘날 우리 사회에 너무 귀머거리가 많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