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고민하다/손가락 가는 대로

스승의 날, 종일 비

별아저씨의집 2020. 6. 1. 20:14
2020.05.15
스승의 날, 종일 비

어제 대학원생들에게 20개씩 마스크를 주었더니 좋아라 합니다. 그러고보니 제가 스승의 날 선물로 마스크를 준 셈이네요.

사비로 구매한 건 아니고^^ 연구실 안전관리비라는 게 있더군요. 몇년 전부터 간접비에서 따로 책정되는데 몰라서 안 쓰고 있었더니 사용하라고 적극 권장합니다. 포스닥 연구원들과 대학원생들이 함께 쓸 수 있게 마스크와 손세정제, 소독제 등을 구매했습니다.

김영란법 때문에 스승의 날이 무색해졌습니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좀 블루합니다. 그나마 꽃을 달아주러 오던 학생들도 올해는 이메일로 인사만 전합니다.

걸리적 거려서 꽃 다는거 별로 안좋아합니다. 계절과 시간을 정하는 하늘을 탐구하는지라 매년 돌아오는 기념일 같은 것도 저에겐 별 의미가 없습니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한바퀴 돌았을 뿐이라. ^^

퇴근할 때쯤 우리 팀 학생이 뭔가를 가져옵니다. 전에도 뭔가 큰 상자를 들고 왔었는데 김영란법 때문에 받을 수 없었죠. 팀 미팅 때 뭔가를 같이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손편지를 들고 왔습니다. 김영란 법에 안 걸리는 걸 드리고 싶었답니다. 학생들도 고생이네요. 학생과 스승 사이에 자연스런 정과 고마움과 흐뭇함을 법으로 막는 것도 우습지요. 선생에 대한 고마움 때문이 아니라 불이익을 피하거나 최애를 차지하기 위해 뇌물로 바쳐왔던 문화에 대한 기나긴 죄값이겠습니다.

학생들도 고생이네요. 스승에게 선물도 드릴 수 없고, 손편지까지 써야 하다니. ^^

선물을 자주 주고받는 편은 아닙니다. 워낙 무심한 성격이라. 그래도 선물로 받은 물건은 특별하게 간직합니다. 며칠 전에는 친구의 손글씨가 담긴 작은 카드를 서랍 안쪽에서 찾았습니다. 십년도 넘었네요. 신문기사를 보고 학교로 전화해서 저를 찾았던 중고등시절 주일학교 동창이 임용축하 선물로 주었던 벽시계와 함께 주었던 카드입니다.

물건이란게 똑같이 생긴게 너무 많아 구별되지 않지만 내 삶에 들어오면 스토리가 담기고 애정이 부여됩니다. 질료는 그대로지만 형상의 트랜스포메이션이 일어난달까요.

박사과정 때는 선물도 못하다가 학위를 받고 떠난 제자가 지난 주에 미리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이 친구가 대학원 들어왔을때 부모님이 저녁을 사고 싶어하신다고 저에게 얘기했다가, 박사 다 받고 나서 그때도 고마우면 그때 저녁에 초대하시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김영란법도 없던 시절이었지요. 그런 과정도 거쳤는데 이 친구 참 훌륭하게 잘 성장했습니다.

꼭 김영란법에 저촉되기 때문이 아니라, 뭔가 이익관계에 있을 때는 오해하기도 쉽고 의도가 잘못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졸업 후에 찾아오는게 정말 제자입니다. 물론 찾아오지 않는다고 해서 괘씸한 놈들이라는 생각도 하지는 않습니다. 찾아오면 참 고마운 것이지요.

코로나블루일까요? 오늘도 날이 흐립니다. 글쓰는 것도 부질없어 보이고, 소통도 의미없어 보이고... 일이 많아서 일까요? 논문심사보고서 보냈고, 외국에 있는 포스닥들이 보낸 논문 2개 중에서 하나는 수정본 보내서 제출이 되었고 또 하나도 거의 검토가 끝나서 오늘 중에 보낼 예정입니다. 제 논문도 회람이 끝났으니 살짝 고쳐 며칠내로 저널에 제출할 생각입니다.

온라인 강의도 재미없고 선생님들과 3-4천원짜리 점심을 먹으며 이얘기저얘기하는 점심시간도 사라졌고 대중강연하면서 사람들에게 뭔가 전하고 가르칠 수 있다는 느낌을 받으며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자극도 사라졌고 심지어 까페에서 멍 때리며 우주의 기운을 받는 시간도 사라졌으니 매우 블루한 봄입니다. 뭔가 대안을 마련해야 겠습니다. 접촉없는 자동차 여행이라도.

슬기로운의사생활, 아내가 좋아하는 드라마 보는데, 너 자신을 위해서 뭘 해주었니, 라는 질문이 나오더군요. 이 질문에 찡하는 걸 보니 진단 나옵니다 ^^ 뭘 좀 해주어야 겠어요. 나에게 책 사주는 그런 일상적인거 말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