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고민하다/손가락 가는 대로

박사, 축하합니다.

별아저씨의집 2019. 6. 8. 14:01

박사, 축하합니다.

 

오늘 오후엔 박사학위 논문 심사가 두 건이나 있었습니다. 저녁을 먹고 와선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오전 10시 경 부터 일하기 시작한 것 같은데 점심은 빵으로 대략 떼우고 지방에서 찾아온 어느 학생을 면담하고 논문심사하며 집중적으로 일을 해서인지 무척 피곤했나 봅니다.

 

8년 넘게 석사, 그리고 박사과정으로 대학원에서 함께 보낸 학생이 오늘 박사가 되었습니다. 45분 동안 흠잡을데 없는 발표와 15분 동안 재밌는 질의응답을 거쳤고 그 이후에 심사의원들의 심사 질문에도 잘 답변했습니다.

 

6편의 논문을 출판했고 엑스선부터 전파까지 다양한 자료를 처리한 경험과 스킬들도 갖추었고 무엇보다 박사후 연구할 중요한 주제를 잡아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학을 막 졸업한 어리숙한 석사 신입생이 한 사람의 학자로 성숙한 과정을 지켜본 뿌듯함이 무척 큽니다. 처음엔 이 학생이 박사까지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1-2년의 석사기간 동안 빠르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가능성을 확인하고 기대를 품었습니다.

 

두번쯤 고비도 있었습니다. 박사 초반 쯤, 몇시간 깊이 대화한 적이 있습니다. 학생은 학생 입장에서 보고 느끼고 선생은 선생 입장에서 보고 느낍니다. 우리 쌤이 분명 괴물은 아닌데 괴물처럼 느껴져 힘들다며, 종이에 써와서 하나하나 읽으며 감정을 토로하던 모습을 보며 저도 그때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리스트에 있는 이야기를 다 들어준 다음에 제 입장에서 하나하나 차분히 이야기했던 기억이 납니다. 오해들이 풀리고 우리 쌤이 괴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 그는 그 이후 대학원 생활이 무척 해피하게 바뀌었습니다. 대학원생활은 무엇보다 지도교수와의 관계가 편해야 행복한 법입니다.

 

중반에는 자신감을 잃고 꽤 힘들어 하기도 했습니다. 졸업 후 상황을 염려하며 자신이 경쟁력있는 학자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해 힘들어하는 슬럼프가 찾아왔습니다. 그 정도가 심해 얼마간 브레이크를 갖기도 했지요.

 

제가 보기에는 꾸준히 성장하고 있고 이미 논문도 한두편 출판했고 충분히 좋은 결과로 학위를 받고 좋은 포스닥 자리로 갈 수 있다고 판단되지만, 아마도 주변 상황에 영향을 받은 듯 합니다. 자신보다 더 잘한다고 생각했던 선배가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을 보고 받은 충격도 작용했나 봅니다. 충분히 잘하고 있고 믿음을 가지라는 지도교수의 말 만으로는 극복되기 힘든 슬럼프였는지도 모릅니다.

 

다행히 쉼과 회복을 거쳐 그는 빠른 성장곡선으로 들어섰습니다. 그룹 미팅에서 논의되는 내용들, 방문하는 외국 학자들과의 토론, 외국 기관 방문, 새로 읽은 논문들을 통해 그는 이런 저런 연구를 해보고 싶다고 했고, 연구방법을 스스로 익혔고, 새로운 결과들을 가지고 왔습니다. 마지막 1-2년은 자기 스스로 주제를 찾고 주도적으로 연구하는 기간이 되었습니다.

 

부르지 않아도 토론하고 싶다며 찾아와 결과를 보여주면 저는 무척이나 신이 납니다. 이런 결과가 나왔다면, 저런 분석을 해보면 근거가 명확해 지지 않을까? 그러면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그래프를 들이밀며 이미 해 보았다고 합니다. 오, 그래? 그럼 자네가 생각하는 시나리오가 맞는 듯 하니, 이런저런 가설을 테스트하면 확실해 질 듯 한데? 그러면 또 다른 그래프를 꺼내며 자신도 그런 생각이 들어 이미 해봤다며 결과를 들이밉니다.

 

이쯤되면 연구가 마구 재밌어 집니다. 그 결과는 이런저런 다른 해석도 가능하니 확실한 테스트 결과가 아닌듯해. 오히려, XX자료로 이러저러한 분석을 해보면 어떨까? 이런 식의 토론이 매주 이어집니다. 매번 그가 방문을 두드리면 어떤 신나는 결과가 있을지 기대가 높습니다. 하던 일을 제쳐두고 들어와 앉으라고 합니다.

 

내가 하는 연구에 학생이 따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이 하는 연구를 내가 뒤에서 지도하는 상황이 완숙하게 무르익으면, 학생은 이제 독립적인 연구자로 성장하고 하산할 때가 됩니다. 학생이 졸업하고 나가는 것이 아쉬운 상황이 됩니다.

 

동문서답하던 초짜였던 학생이 어떤 질문에도 과학자가 답게 경험적 증거와 이론적 배경을 토대로 논리적으로 답하는, 그래서 지도교수와 토론하며 서로 다른 시나리오를 제시하고 누구 생각이 맞을지 테스트할 다음 단계들을 논하는 학자가 되었습니다. 졸업할 때가 되었습니다.

 

생각하고 말하고 연구하는 방식만 성숙하는 것은 아닙니다. 남의 생각을 듣고 파악하고 자신의 생각을 제시하고 그리고 서로 생각이 다를 때 상대방을 설득하거나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은 과정이 일상이 되면 인격적으로도 성숙합니다. 후배들을 배려하는 일이나 연구관련 일처리나 모든 면이 성숙합니다.

 

외부에서 온 심사위원 교수님은 우교수님 밑에서 학위를 했으니 어디가서도 잘 할 수 있다며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좋게 해석하면 하드 트레이닝을 시키는 지도교수 밑에서 박사를 받은 것 자체가 커다란 자산이라는 말이고 나쁘게 말하면 그동안 고생 진짜 많이 했다는 말입니다. 두가지는 함께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내 밑에서 박사 하느라 고생 많이 했습니다. 박사,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