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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 사이언스플라자] 갑을관계와 과학

별아저씨의집 2013. 5. 29. 14:15

매일경제 [사이언스플라자] 2013년 5월 28일


갑을관계와 과학


우종학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



최근 몇 달 동안 우리 사회는 `갑의 횡포`에 대한 분노로 들끓었다. 어느 대기업 임원의 승무원 폭행 사건, 청와대 대변인의 인턴직원 성추행 사건 등은 약자에 대한 강자의 권력 남용을 사회적 이슈로 끌어올렸다. 갑의 횡포에도 다양한 수준이 있겠지만 사회적 관용이나 소통을 통해 풀어야 할 이슈가 아닌 명백한 불법 행위는 반드시 근절되어야 한다. 그동안 묵인되었던 갑의 횡포를 반성하고 우리 사회가 보다 나은 사회로 성장해야 하는 이유다. 

과학 분야에도 갑을관계가 존재한다. 계약상 두 주체를 가리키는 갑과 을이라는 말은 다양한 사회적 관계에서 강자와 약자로 이해된다. 연구정책과 예산을 수립하고 주관하는 정부 부처가 갑이라면 연구 수행 주체인 연구자는 을에 해당한다. 연구기관의 장과 그 기관의 연구원들도 갑을관계에 해당되고 연구책임자와 연구원 관계, 지도교수와 대학원생도 갑을관계로 볼 수 있다. 

여러 사회적 관계에서 갑의 횡포가 발생하듯 연구와 관련된 갑을관계에도 다양한 문제들이 존재한다. 서비스를 제공하는 위치라기보다는 까다로운 상사의 자세를 취하는 관료주의적 공무원들은 연구자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갑이다. 예산을 주무르는 기획재정부는 과학계뿐만 아니라 수많은 을 위에 군림하는 `슈퍼 갑`으로 알려져 있다. 인사권과 예산권을 가진 연구기관장들은 대대적으로 조직을 개편하여 오히려 연구개발 흐름과 효율성을 떨어뜨리는 갑의 횡포를 저지르기도 한다. 교수와 학생 간에 발생한 성폭력 등 갑의 횡포가 언론에 등장하기도 한다. 학위와 취업 등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지도교수 밑에서 일하는 대학원생은 종종 `노예대학원생`이라는 말로 비하되기도 한다. 

물론 갑을관계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계약상 주는 쪽과 받는 쪽은 분명 다르다. 승무원은 질 좋은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고 승객은 질 좋은 서비스를 받을 권리가 있다. 갑과 을이 무조건 평등해질 수도 없다. 교수들이 학위논문을 심사하는 대신 학생들이 민주적으로 투표해서 학위 수여를 결정할 수는 없다. 갑과 을의 역할은 명백히 다르다. 

문제는 기능적 관계가 강자와 약자의 권력관계로 변질되는 데 있다. 권력관계가 고착된 사회에서 사람들은 갑이 되는 순간 소위 `갑질`을 한다. 시집살이를 겪은 며느리가 시집살이를 시키는 시어머니가 되듯, 제왕적인 교수 밑에서 자란 학생이 권력으로 군림하는 교수가 된다. 

권력관계의 폐해는 과학 발전의 장애물이다. 갑의 횡포는 일을 한순간에 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짧은 수명의 과학정책들은 부작용을 낳기 쉽고 과도한 권력은 경험적 증거와 논리에 기반한 변화를 추구하기보다 고집스러운 우를 범하기 쉽다. 권력관계에 물든 연구문화는 매우 비효율적이다. 권위적인 교수들은 훈련되지 않은 학생들의 새로운 관점을 무시하기 쉽고 학생들은 지도교수 생각과 다른 창의적인 아이디어나 건설적인 비판을 내놓을 줄 모른다. 이래서는 청출어람을 기대하기 어렵다. 다양한 아이디어가 자유롭게 오가는 상향식 구조가 아니라 권력관계로 얽혀 있는 하향식 구조에서는 과학 발전이 쉽지 않다. 

권력관계가 고착된 사회를 바꾸어야 한다. 갑의 횡포를 막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고 `갑질`을 부끄러워 하는 성숙한 시민의식이 뿌리내려야 한다. 과학 분야에서도 정부 부처, 연구책임자, 교수, 학생 등 다양한 주체의 노력이 필요하다.  대학에서는 권력에 순종하는 학생보다는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학생을 키우는 문화가 자리 잡아야 한다. 갑의 횡포를 보고 자란 아이들이 권력관계에 물든 대학을 거쳐 과학자가 된다면 그들에게 무엇을 바랄 수 있을까? 과학의 발전은 결국 사회의 성숙도와 비례할 수밖에 없다. 성숙한 사회로 가는 것이 과학 발전을 위한 밑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