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교리로부터 분리된 자연신학은 하나님과 우리가 사는 세계의 특성을 왜곡시킬 수 밖에 없다."
- 스텐리 하우어워스,
2001년 기포드 강연에서
윌리엄 페일리도 대표되는 19세기 영국의 자연신학은 계몽주의의 드센 영향을 배경으로 한다. 물론 비슷한 노력은 초대 교부들의 작품에서도 볼 수 있고 다른 색깔을 가진 자연신학적 접근들도 존재하지만, 흔히 자연신학이라고 말할 때는 계몽주의의 시대를 상황으로 하는 영국의 자연신학을 일컫는다.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 그러니까 성경이라는 계시에 의존하지 않고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노력을 자연신학의 핵심이라고 할수 있다. 이렇게 독특한 자연신학이 형성된 배경에는 물론 그 당대의 눈부신 과학의 발전, 그리고 인간 이성의 위대함에 대한 나이브한 믿음을 꼽을 수 있고, 더불어서 성경 텍스트에 대한 신뢰라든가 계시에 기반한 기독교 변증의 설득력이 점점 약해진 면도 꼽아볼 수 있다.
그러나 자연신학적 접근으로, 그것이 이성적 사고나 철학하기를 통해서든 혹은 자연과학의 결과를 사용하는 경험적인 방법을 통해서든, 자연을 통해 도달할 수 있다고 여겼던 신은 분명 기독교의 하나님과는 거리가 있다. 다시 말해 그 존재는 어떤 창조주일 수는 있어도 반드시 기독교의 신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어쩌면 자연신학적 노력으로 찾을 수 있는 (그것이 가능하다면) 신은 기껏해야 시계공처럼 시계를 만들고 나서는 시계가 스스로 움직이게 내버려두는 이신론의 신일 것이다. 이러한 한계는 두 가지 문제를 야기한다. 첫째는 그럼 어떻게 일반적인 신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기독교의 신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사실, 이 문제의 해결책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두번째는 오히려 더 심각한 문제이다. 자연신학이 찾아내려는 신은 자연을 특별히 창조한 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사실 페일리의 '자연신학(1802)'의 기본적인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연신학이 찾아내려는 신은 그러니까 과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복잡하고 정교한 생물의 기관 등등을 기적의 방법으로 창조한 신은 오히려 기독교의 하나님을 왜곡하고 제한한다는 문제이다.
이것이 바로 위의 인용문에서 스텐리 하우어워스가 정확히 짚어내는 문제였다. 월리엄 페일리가 주장하는 특별한 창조가 아니라, 자연선택이라는 메카니즘을 통해 생물들의 기관들이 만들어졌다는 이론을 들고 나온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판되기도 전인 19세기 전반부 부터 이미 윌리엄 페일리의 자연신학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는 점을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윌리엄 페일리의 '시계공' 같은 신의 개념은 신이 어떻게 지속적으로 자연계에 관여하는가라는 신의 섭리의 문제를 너무나 쉽게 희석화하고 기독교의 전통적인 신관의 깊이를 잃어버리게 한다는 것이다.
이 점은 신인동형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인간의 설계 개념 수준으로 신의 창조를 하향시키는 지적설계론의 근본적인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관되며 지적설계에 관심이 많거나 그 운동을 하는 분들이 깊이있게 고민하고 넘어야 할 점이다.
'하나님의 나그네된 백성'으로 친숙한 스텐리 하우어워스의 2001년 기포드 강연은 'With the Grain of the Universe' 라는 제목으로 2001년 출판되었다.
7월에 파사디나에 있는 동안 풀러 서점에 들러 과학과 신앙 분야의 책들을 훑어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는 대로 댓권 골라왔는데 그 중 1/3가격으로 쎄일을 하는 이 책이 보물처럼 들어 있다. 8불이라니...
어쨌거나 맥그라스의 2008년 기포드 강연과 더불어 하우어워스의 2001년 기포드 강연이 이번 8월의 주요 독서 과제로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