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고민하다/손가락 가는 대로

연말 선물

별아저씨의집 2021. 1. 2. 18:56
연말 선물인가 봅니다. 방금 전에 레프리 리포트를 받았습니다. 결국 논문이 승인되었습니다. 성탄절까지 씨름하며 고쳐서 4번째 수정본을 어제 제출했는데 바로 승인 소식이 날아와서 매우 상쾌한 기분입니다.

NGC 1068이라는 유명한 은하가 있습니다. 세이퍼트 2 은하의 전형입니다. 활동성 블랙홀이 중심에 있어서 신나는 물리현상들이 관측되는 은하입니다.

이 은하 중심에 활동성 블랙홀이 하나더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논문이라 논문을 4번이나 수정하는 긴 심사과정을 거칠 수 밖에 없었나 봅니다. 예전에 박사학생이었고 정부의 지원을 받아 지금은 다른 기관에 가 있는 연구원이 주도적으로 진행한 연구였습니다.

3번째 리포트에서 심사위원이 이 논문을 승인하지 못하겠다고 해서 이제 와서 어쩌라는 하는 생각이 들며 머리 뚜껑이 열렸는데, 박사님과 긴밀히 논의한 결과 약간의 실수도 있었고 추가적인 분석도 필요해서 결국 상당히 많이 고쳐서 제출했는데 반전이 일어났네요. 하루만에 승인 소식이 들리다니.

역학적 증거들을 보니 중심에서 살짝 떨어진 영역에 중간질량 블랙홀 혹은 거대질량 블랙홀이 하나 더 있다는 증거들을 찾게 되었습니다. 확증은 아니지만 이 시나리오에 반대되는 증거들은 없고 엑스선과 전파까지 다양한 파장대의 관측 증거들이 이 시나리오와 일치합니다.

그래서 소문내지 말고 조용히 논문을 진행중이었는데 벌써 일본 친구들에게 알려져서 문의하는 이메일이 오기도 했습니다. (앗, 생각해 보니 그 이메일에 답을 안했군요. 영업비밀이라...^^)

어쨌거나 긴 노력에 보상을 받은 것 같아 신납니다. 같은 데이타를 놓고도 서로 주장하는 바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 주장이 편향적이라는 레프리의 지적에 어떤 근거로 그런 결론을 내리냐고 되묻고 하나하나 반박하는 과정은 피곤합니다. 레프리가 오히려 편향적이라는 의심을 버릴 수가 없죠. 그러나 레프리가 우리 논문을 죽이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는 의심도 편향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서로 객관적으로 검토하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결국 주어진 데이타의 한계 내에서 어떤 합리적인 주장을 할 수 있으며 반증처럼 보이는 증거들을 어떻게 설명해 낼수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결국 데이타와 합리성을 기반으로 논의를 하다보면 합의점에 이를 수 있습니다. 국제저널에 논문을 낸지 20년이 넘었지만 저의 굳은 믿음입니다. 과학의 동력이지요.

물론 쉽지는 않습니다. 1년 넘게 심사과정이 질질 끌릴 수도 있고 그러다가 지치기도 합니다. 반대로 지쳐서 대충 쟁점을 포기하고 타협하는 경우도 있죠. 레프리 입장에서나 저자 입장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안되면 저널 에디터에게 직접 중재를 요청하기도 하고 다른 심사자를 요청하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그 긴 소통의 과정에서 보다 면밀히 데이타를 살피고 이론을 점검하고 그리고 우리의 주장을 날카롭게 다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분히 심리학적 요소가 작용하고 과학사회학이 작동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 한편의 논문을 내는 일이 과학을 끌어가는 작은 한걸음 한걸음이라는 생각입니다.

이 블랙홀의 존재를 입증할 다른 증거를 갖고 있습니다. 올해 상반기에 편광분광 관측을 해서 중요한 자료를 얻었죠. 네 이제 다음 단계로 갑니다.

논문 승인 소식에 신이 났으니, 다른 포스닥 연구원의 논문도 오늘 힘차게 마무리해볼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