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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9일

종종, 아니 많은 경우, 자리가 사람을 바꿉니다, 아니 변질시킵니다.

뭔가를 가르쳐야 하는 선생은 학생들 앞에서 자신의 무식을 드러내기 쉽지 않고 아이를 보호해야 하는 부모는 자신의 약함을 드러내기 쉽지 않습니다.

적진에 선 장교는 부하들 앞에서 자신의 두려움을 감추려하고 지도자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흔들림과 번뇌를 감춥니다.

목사는 성도들 앞에서 자신의 죄악을 고백하기 보단 자신의 신령함을 드려내게 되고 사장은 회사가 망해가도 직원들 앞에서 회사가 잘 될거라 말합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글을 통해 자기얘기를 합니다. 그러나 그 글이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일 때는 아무래도 모든 얘기를 다 할 수는 없습니다. 선생님이 검사하는 초등때 일기쓰기는 그래서인지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일기가 되고맙니다.

내면의 성찰이 없어서, 정말 자신이 무식하지 않고 약하지 않고 두려움이 없고 흔들림과 번뇌도 없고 좌악도 없고 망해가는 걸 몰라서, 그래서 스스로도 속고 있다면, 그런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크게 관심가지 않습니다.

로마서의 말씀처럼 그런 상태에 남아있는 것 자체가 바로 심판을 받고 있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자신의 내면을 들어야 보면, 자신이 떠드는 얘기를 스스로 곰곰히 들어보면, 자신의 강의를 듣거나 자신의 글을 읽어보면 그 안에는 교묘한 가림과 드러냄이 섞여 있음을 봅니다.

나는 원래 그리 뛰어난 천재도 아니고 그리 위대한 학자도 아니고 그리 훌륭한 선생도 아니고 그리 존경받을 인격자도 아니고 그리 관심받을 뭔가를 소유한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남들 들으라고 하는 내 이야기에는 모두 그런 것들만 담아 포장하는 듯 합니다.

중언부언하는 비논리적인 설명, 교과서도 안 읽어 온 불성실성, 강의나 글을 이해못하거나 오해하는 한심한 문해력, 문맥없이 나오는 잘난체, 훌륭한 일들은 다 자기가 주도한 거라는 과장, 상대방의 대한 배려없이 나오는 인신공격성 발언, 나이많다고 지껄이는 반말,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전지적 작가 시점의 설명. 뭐 이런 것들을 대하면 나도 모르게 내 얼굴에는 나, 너 싫어!라는 문장이 찐하게 드러납니다. 네 저는 성자가 아니라 까칠한 과학자이지요.

그러나 한편,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내 글에는 내 말에는 내 강의에는 과연 그런 것이 없을까 생각하면 참 부끄러워집니다.

자리가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거라고 변명할 수 만은 없습니다. 부흥회하러 간 목사는 자신의 절대적인 믿음을 큰 목소리로 떠들며 성도들에게 확신을 주어야만 할까요? 선생이나 교수는 나는 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 그러니 너희도 열심히 공부해서 나처럼 되어라는 태도로 학생들을 이끌어야 할까요? 독자들을 설득하고 그들을 돕기 위해서 글을 쓰는 사람은 이것이 정답이다라는 강력한 논지와 확신으로 글을 써야 할까요?

사실, 세상에 그런 확실성은 없습니다. 제가 보는 과학은 자연세계에 대한 영원한 근사일 뿐이며, 제가 이해하는 성경도 신의 계시에 대한 영원한 근사일 뿐입니다.

제가 보는 사람들의 삶은 지극히 제한된 정보에 근거한 삶의 단편일 뿐입니다. 2시간 짜리 영화의 스틸 컷 한 장면을 보고 그 영화를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남들이 아닌 내 삶의 경우, 처음부터 지금까지 모든 영화의 장면을 다 본듯 하지만 사실 인간의 뇌의 기억력은 다만 그 일부를 선택적으로 기억할 뿐이니 나는 내 삶에 대해서도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내게 보이는 하나님은 희미합니다. 인간의 불안과 두려움을 채우기위해 확실한 것을 만들어내라는 자들은 아론에게 금송아지를 만들라고 요구합니다. 그 요구는 목사와 설교자와 지도자들이 하나님 대신 우상을 만들어내는 중대한 범죄로 끌고 갑니다.

나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분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내삶을 어떻게 이끄실지 잘 모르겠다고 고백할 지도자가 있을까요? 자리가 그렇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처음부터 틀린 얘기입니다. 하나님이 언제 우리에게 선명했던 적은 없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그 분을 만났을 때 비로소 구체화되었던 그의 모습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의 감지능력 밖에, 우리의 이해력 너머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희미한 듯함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그분의 약속을 믿고 불투명한 미래로 한걸음씩 떼는 것이 믿음이겠습니다. 다만 종종, 아니 자주 그분이 우리 삶에 보다 명확하게 들어오시길 기도할 뿐이겠습니다.

나만 아는 나의 죄악과 남들에게 드러나는 잘난체함 사이에서 느껴지는 영원한 간극에도 내 몸을 두조각으로 자르지 말고 한조각으로 살아야하는 것이 운명인지도 모릅니다.

소소하게 산속에 숨어서 나의 내면에 집중하는 것도 한 방법이겠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속여서 완벽한 지도자처럼 사는 것도 한 방법이겠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우리 대부분은 우리의 아이들의 부모로 우리 학생들의 선생으로 내가 맡은 일의 지도자로 종종, 아니 자주 느끼는 괴리감을 딛고 내 삶을 지고 살아가야하나 봅니다.

학기가 마무리되는 12월, 한 해도 지나갑니다. 그렇게 우리 인생도 흘러가고 우리 삶의 내용은 어디엔가 차곡차곡 쌓여갑니다. 이 강물같은 흐름을 따라 바다에 갈 때 까지는 우리모두 속고 속임에도 희미하지만 확실한 실재에 시선을 두고 믿음으로 한걸음 한걸음 나갈 뿐이겠습니다.


Posted by 별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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