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종교 이슈/창조-진화 논쟁

지적설계 운동 비판 2 - 지적설계 논증은 과학인가? (복음과상황 2002년 11월)

별아저씨의집 2002. 11. 1. 16:00

이 글은 월간 복음과상황에 지난 2002년 11월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복음과상황의 문맥 (다른 분들의 기고글들과 관련된) 에서 벗어나 제가 쓴 글만을 올려서 포커스에 오해가 있을 수도 있겠으나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 최근에 쓴 글은 아니지만 여전히 유효한 글이며 지적설계 운동에 대해 보다 균형 잡힌 시각이 전달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올립니다.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반론에 응답하여 두편의 글을 더 기고하였고 이 글과 함께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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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설계 논증은 과학인가? (월간 복음과상황 2002년 11월호)

우종학

연세대학교와 대학원에서 천체물리학을 전공하고 현재 미국 예일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학문은 대화를 통해 발전한다. 그것이 글의 형태이든 좌담의 형태이든, 세상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기본적으로 대화를 통해 자란다. 대화를 배제시키는 사회에서 성숙은 기대할 수 없다. 그것이 정치의 문제이든 가치의 문제이든 인간의 근원적인 물음에 관한 것이든,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가능하면 그들로부터 배우려는 자세는 21세기의 한국사회, 특히 기독교 공동체에 반드시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적설계반론이 반가웠다. "서로 간에 깊이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태도를 나는 기쁘게 여긴다. 나는 누구를 설득시킬 생각이 별로 없다. 그저 과학자로서 지적설계를 비판하는 논점들을 명확히 제시하고 싶을 뿐이다. 내가 8월호에 기고한 글은 상당히 분명한 논조로 썼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나의 판단이 틀렸을 수도 있겠다. 지적설계반론을 보면 말이다. 나는 주로 지적설계논증을 과학화하려는 노력이나 유신론적 전제가 가능한 과학을 만들겠다는 의도가 과학자들에게 비판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들을 개괄적으로 다뤘다. 이번 글에서는 반론에서 제기된 몇 가지 논점을 다루면서 지적설계논증의 성격에 대해 보다 깊은 비판적 검토를 시도한다.

형이상학적 질문, 자연과학의 질문

아인슈타인은 "도대체 우리가 우주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라는 말을 했다. 과연 어떻게 해서 우리는 붉은 옷으로 갈아입는 나뭇잎과, 방울거리는 싯구들을 떠올리게 하는 가을비와, 멀게는 거대한 은하들의 화려한 역학과 블랙홀의 에너지로 빛나는 퀘이사들을 이해할 수 있는 걸까? 과학에 매료된 경험이 있거나 우주의 존재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본 사람이라면 그런 질문을 해봤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에 대한 형이상학적 답을 시도했지만 아직까지 과학적인 답은 없다. 우리가 우주를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 우주의 합리성은 증명된 것이 아니라 과학의 전제이다. 이 전제가 없으면 과학이라는 활동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 전제는 우주에 합리적이지 않거나 우리가 궁극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런 낭만적인 19세기의 과학관을 가진 과학자는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전제는 그저 우주를 이해하려는 사람들의 작업조건일 뿐이다. 왜냐하면 우주가 이해될 수 있다고 가정하지 않고는 아무런 시도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 전제를 작업조건이 아니라 명백한 규범으로 받아들인 사람들도 있다. 그들을 우리는 자연주의자라고 부른다. 지난 8월호의 글에서 다룬 것처럼 모든 과학자를 자연주의자로 설정하고 시작하는 양극화된 논의는 피해야 한다.

아인슈타인의 질문을 과학으로 답할 수 있을까? 글쎄다. 왜 우주가 자연적인 방식들로 이해되는가라는 이 질문은 과학으로 답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서는 형이상학적 질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먼 미래에 어떤 만병통치이론이 나와서 왜 우주가 합리적일 수밖에 없는가를 과학적으로 설명해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그런 가능성에 대해서 무척 회의적이다.

지적설계 논증은 형이상학적 논증인가 과학적 논증인가?

나는 지적설계논증들이 근본적으로 과학적 논증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논증이라고 생각한다. 지적설계운동에서 사용하는 대표적인 설계 논증 두 가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천체물리학과 관련된 첫째 논증은 인류가 존재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주가 상당히 미세하게 조절되었다는 소위 인류원리(anthropic principle)에 근거한다. 현대 우주론에 의하면 자연법칙의 수많은 상수들이 조금만 달랐더라도 인류가 존재할 가능성이 없는데, 우주는 왜 하필 이렇게 특정한 값들로 조절되었을까? 이러한 미세-조절이 바로 지적 설계의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분자생물학과 관련된 둘째 논증은 DNA 염기서열에 담겨있는 정보의 기원을 자연적 과정(가령, 진화이론을 통해서)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주장에 근거한다. 즉, 자연적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 질 수 없는 막대한 DNA의 정보량은, 마치 어떤 문서를 구성하는 문자들이 특정한 배열을 보이듯이, 지적 설계의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논증을 세 단계로 구분해보자. 우선 이 논증들은 과학적 결론에서 출발한다. 하나는 우주가 미세하게 조절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DNA에 다량의 특정한 정보가 담겨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출발한 설계논증은 두 번째 단계로, 이런 관측 사실들이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즉, 우주의 미세-조절을 설명할 수 있는 과학 이론이 없으며, DNA 정보의 기원은 진화이론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단계로, 자연적인 과정으로 설명되지 않는 이런 관측 사실들은 지적 존재를 암시하는 지적 설계의 증거가 된다고 주장한다.

1. 미래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것은 과학적 태도가 아니다.

자 그럼 과학자의 입장에서 하나하나 살펴보자. 첫 단계인 과학적 관측사실에 대해 반대할 과학자는 없을 것이다. 물론 미래의 관측을 통해 이런 관측사실들이 바뀔 수 있는 가능성에 과학자들이 열려있다는 것을 배제하면 말이다. 그러나 두 번째 단계인, 우주의 미세-조절이나 DNA 정보의 기원이 과학적으로(자연적 방식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주장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우주의 미세-조절이나 DNA정보의 기원이 현재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는 과학자들의 이견이 있지만, 일단 한발 물러서서 이런 관측사실들이 현재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못한다고 가정해보자. 문제는 어떤 현상을 현재 과학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현상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일이 전혀 불가능하다고 결론짓는 일은 결코 지혜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 빈틈(자연적 방식으로 설명되지 못하는 현상)이 반드시 메꿔질 거라는 자연주의의 전제 때문이 아니라, 미래의 가능성을 지금 제한해 버리는 속단을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무신론의 전도사들은 바로 자연주의의 전제 때문에 이런 논증을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 과학자들이 창조과학이나 지적설계논증에 비판적인 이유는, 모든 빈틈이 결국 자연적으로 설명되어야 한다는 자연주의의 전제 때문이 아니라, 빈틈을 가지고 하나님을 논증했다가 결국 유신론 신앙에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다 준 수많은 역사의 교훈 때문이다. 자연주의의 전제를 갖든 갖지 않든 과학자가 하는 일은 열린 가능성을 가지고 자연적인 설명을 시도하는 일이다. 어떤 현상이 과학적으로 설명될지 안될지는 해봐야 아는 일이다.

여기서 젊은지구론자인 과학철학자 폴 넬슨의 슈퍼마켓 비유를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통조림을 찾다가 실패한 손님이 이 슈퍼마켓에는 빈틈이 있는 것 같다고 하자 가게 주인은 그렇게 말한다. 이 가게는 빵만 파는 빵집이라고. 빈틈은 손님의 마음에나 존재하는 거라고. 문제는 우주에는 이렇게 편리하게 답해줄 가게 주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가게에 정말 통조림이 없는지는 가게를 다 뒤져보아야만 알 수 있다. 반드시 통조림이 있어야한다고 믿는 자연주의 전제를 가진 과학자나, 통조림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열린 가능성을 가진 그리스도인 과학자나, 열심히 가게를 뒤져보려고 노력하는 점에서는 자신의 본분에 충실하다. (최소한 나는 이런 성실성에 대해 자연주의 전제를 가진 과학자들을 높이 평가한다.) 다 뒤져보기도 전에 없다고 결론짓는 것이 과연 과학적 태도일까?

천체물리학의 경우에 이론과학자들과 실험/관측과학자들은 보통 다른 견해를 갖는 경우가 많다. 특히 이론적으로 가능하지만 아직 실험이나 관측으로 밝혀지지 않은 경우에 그렇다. 나는 지난 봄에 일반 상대론에 크게 공헌하였고 블랙홀이라는 명칭을 처음 제시한 존 휠러의 90번째 생일을 기념하는 학회에 참석한 일이 있다. 여러 유명한 물리학자들이 참석한 그 학회에서 내게 흥미로웠던 것은 우주론에 관한 발표들이었다. 대폭발의 특이점을 설명하려는 시도로 제시되는 양자우주론의 다중-우주에 대한 발표가 있자, 청중에서 이런 질문이 나왔다. 관측적 증거가 없는 이런 이론들이 어떻게 타당한가? 다중-우주론의 초기 제안자중 하나인 안드레이 린드를 포함한 이론가들의 대답은 이랬다. 지난 백년간 우리는 꿈도 꾸지 못하던 일들을 이해하게 되었으며, 특히 대폭발 우주론이 관측적으로 확실하게 입증된 것도 십 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앞으로 우리가 무엇을 발견할지 누가 알겠냐고. 나는 다중-우주론을 관측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의 대답에는 동의할 수 있었다. 미래에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없다고 현재 결론 내리는 일은 별로 지혜롭지 못할 뿐만 아니라 결코 과학적 태도가 아니다.

2. 지적설계운동가들은 과연 미래의 가능성에 열려있는가?

김영식 형제는 지적설계운동이 자연적 방식으로 현상을 설명하는 일을 막지 않는다고 보는 듯하다.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특히 그들이 지적설계의 증거로 삼고 있는 현상들에 관해서는. 자연적 방식으로 설명하려는 활동을 막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주가 미세-조절되었는지, 어떻게 DNA에 다량의 정보가 들어있는지를 과학적으로 밝히는 일을 막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우주의 미세-조절을 설명하려는 우주론자들의 시도를 스티븐 마이어는 "어떤 과학자들이 심각한 논의들을 통해 다중-우주 가설을 그럴듯하게 만드는 것은, 그 아이디어 자체에 상당한 유익이 있다기보다 그들이 자연주의적 철학에 뚜렷하게 헌신되어 있음을 보여준다"라고 질타한다. 마찬가지로 DNA의 정보의 기원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과학자들의 노력에 맞서 싸우는 필립 존슨의 열정은 십자군의 흥분에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자연적인 설명이 가능하게 된다면 결국 그들의 지적설계의 증거는 사라지게 되기 때문이다.

3. 무지에 호소하는 논증은 결국 형이상학적 논증이다.

그럼 이제, 한발 더 뒤로 물러나서, 우주의 미세-조절과 DNA정보의 기원을 현재에도 미래에도 결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가정하고 지적 설계논증의 두 번째 단계를 받아들여 보자. 그렇다면 이런 관측사실들이 자연적 방식으로 설명되지 못한다고 해서 지적설계자가 반드시 보증되는 걸까? 글쎄, 여기에도 의견은 분분하다. 똑같은 빅뱅우주론을 가지고 윌리엄 크래그 같은 철학자는 설계자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반면, 퀀틴 스미스 같은 철학자는 초월적 설계자가 없음이 확실히 증명되었다고 주장한다. 누구의 주장이 옳을까? 나는 윌리엄 크래그의 편을 들겠다. 하지만 이런 논증은 과학적 논증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논증이다. 똑같은 과학적 결론에서 출발해서 내리는 두 가지 다른 형이상학적 결론을 과학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지적설계논증의 마지막 단계는 결국 무지에 호소한다. 즉 자연적 방식으로 설명될 수 없으므로, 우리가 과학으로 이해하지 못하므로, 어떠어떠하다는 결론을 내리는 형식을 취한다. 이렇게 무지에 호소하는 것은 과학적 논증이 될 수 없다. 우주의 합리성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질문처럼 그것은 과학의 영역을 넘어서는, 혹은 인간의 지식의 짧음으로 인해 현재까지는 과학의 영역을 넘어서는, 형이상학적 질문이다. 역사상 최초로 지구를 벗어나 달에 발을 디딘 우주인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일 수 있다. 하나는 "역시 신은 살아 계시다"와 다른 하나는 "역시 신은 어디에도 없다"이다. 그들이 달의 표면을 발로 밟아보고 눈으로 경험하면서 여러 가지 과학적 결론을 내릴 수 있겠지만, 그것을 가지고 지적 설계자를 논하는 것은 과학의 영역을 넘어선다.

형이상학적 논증은 무의미한가?

그렇다면 이런 형이상학적 논증은 무의미할까? 결코 아니다. 아인슈타인의 질문에 대해 나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이런 생각을 한다. 합리적인 우주가 가능한 것은 그 우주보다 더 큰 어떤 합리적인 존재가 있기 때문이라고.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면 지적 설계자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보다 더 타당한 답을 알지 못한다. 이 대답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과 더불어 내 자신의 신앙의 큰 축이 되었으며 내 신앙을 변호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 신앙을 도전할 때 내가 사용하는 중요한 변증이다. 예전에도 밝혔듯이 (복음과상황 98년 3월호) 나는 과학자들이 형이상학적 질문들을 던져야하며 특히 그리스도인 과학자들은 이런 문제를 더 중요하게 다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각 분야의 과학적 결론들이 우리의 삶과 신앙에 어떠한 적합성을 갖고 있는지를 고민하고 또 그것으로 세상을 섬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아마도 나는 모든 그리스도인 과학자들이 (형이상학적 논증으로서의) 지적설계운동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형이상학적 논증과 자연과학의 설명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과학을 통해서 얻은 결론을 토대로 얼마든지 형이상학적 질문을 던지고 답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대답을 자연과학의 직접적인 대답이라고 여기는 태도는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똑같은 과학의 결론을 가지고 서로 다른 형이상학적 대답을 갖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며 두 가지 대답을 비교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과학의 영역을 넘어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자연적으로 설명되면 지적설계논증은 무의미한가?

자, 이제 또 한발 더 물러서서 그리스도인 과학자들이 자연주의적 전제를 갖는다고 가정해 보자. 즉, 목적론적 질문(우주는 왜 존재하는가와 같은)을 제외한 모든 과학적 질문들을 궁극적으로 자연적 방식으로 답할 수 있다는 전제를 갖는다고 가정하자. 이런 전제를 그리스도인이 가지면 안 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나는 잘 모르겠다.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가 어떠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주의 모든 생성과정과 현상들을 궁극적으로 우리의 지성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만드셨는지, 아니면 어떤 현상들은 (가령, 우주의 대폭발이나 생명체의 기원 같은) 결코 우리의 지성으로 이해할 수 없도록 만드셨는지는 아무도 판단할 수 없다. 모든 현상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우주를 만드셨다고 가정하는 것은, 어떤 현상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도록 우주를 만드셨다고 가정하는 것과 똑같이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지적설계운동가들은 '모든 것이 자연적인 방식으로 설명 가능하다'는 전제를 비판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가진, '어떤 현상은 자연적인 방식으로 설명 불가능하다'는 전제도 똑같이 비판받아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가 어떤 우주인지 우리가 모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우주의 신비가 자연적 방식으로 밝혀졌다고 해서 모든 우주의 현상을 자연적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나, 아직까지 어떤 현상이 자연적인 방식으로 밝혀지지 않았다고 해서 우주에는 자연적인 방식으로 설명 불가능한 부분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양자 모두 역시 형이상학적 가정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자연적으로 설명되는 우주를 하나님이 만드셨다고 한번 가정해보자. 그래서 우주의 대폭발이나 생명의 기원이 자연적 방식으로 설명된다면 지적설계논증은 무의미하게 될까? 현재의 지적설계논증의 전략에 의하면 그렇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연적 과정으로 설명할 수 없어서 어떤 지적인 원인의 간섭을 필요로 하는 현상을 지적설계의 증거로 삼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모든 것이 자연적으로 설명된다고 해도 설계자에 대한 논증이 무의미해지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렇게 완벽하게 이해 가능한 우주를 창조한 설계자를 여전히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지적설계운동가들은 하나의 형이상학적 전제를 채택함으로써 다른 형이상학적 전제를 취하는 일부 과학자들과 동등한 오류를 범하고 있으며, 설계의 증거를 자연적 방식으로 설명되지 않는 현상들에서 찾음으로써 하나님의 다양한 설계 방식을 제한하는 오류를 범한다.

지적설계에 대한 과학적 비판이 필요한 이유

내가 지적설계운동을 과학자의 입장에서 비판하고 있는 이유는 사실 역사적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지난번 글에서도 밝힌 것처럼 그리스도인이건 아니건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자연주의자이며 따라서 무신론자라는 오해, 과학은 자연주의적이며 무신론적이라는 오해는 지적설계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사회에 팽배해 있다. 역사적으로 지적설계운동 이전에 있었던 창조과학운동은 무신론의 전도사들과의 싸우는 과정에서 과학의 오류(진화론이 틀렸다는)를 밝혀서 유신론적 신앙을 변호하려는 전략을 채택함으로써 기독교계에는 반지성주의와 반과학적 태도를, 비-기독교계에는 반종교적이고 신앙을 깔보는 태도를 양산하는데 일목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과학활동이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영역이라는 것이 잊혀지고 어떤 현상에 대한 과학적(자연적) 설명이 마치 신의 필요를 없애준다는 생각이 팽배한 현재의 상황에서, 과학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의 회복은 절실하다. 과학으로 설명이 되는 현상들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인식이 먼저 있어야 한다. 나는 이것이 훨씬 더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자연적 방식으로 설명 불가능하다고 주장되는 현상들을 (그것이 빈틈이건, 빈틈처럼 보이는 것이건) 증거로 삼아 과학활동을 자연주의와 동일시하는 양극화 모델을 지속적으로 확대, 양산시키는 운동은 현재의 역사적 상황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으며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기독교공동체에 결코 유익하지 않다는 것이 나의 시각이다.

지적설계운동은 기존의 중립적 과학을 호전적인 무신론자들의 과학과 동류로 취급하여 그리스도인들이 과학에 대해 건전한 개념을 세우는데 어려움을 준다. 특히 필립 존슨의 무신론적 전제를 깨고 유신론적 과학을 세우자는 슬로건은 그리스도인 과학자들이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우주가 자연적인 방식으로 설명된다는 것은 무신론적 전제가 아니다. 아인슈타인의 질문으로 되돌아 가보자. 우리가 우주를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 그래서 우리가 과학적으로(자연적 방식으로) 우주를 설명할 수 있다는 과학의 전제는 우리가 믿는 합리적인 신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그리스도인 과학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다. 무신론자들이 다른 형이상학적 토대에서 이런 과학의 전제를 받아들인다고 해서 그리스도인들이 과학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지적설계를 금지시켜야한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독선에 지나치지 않는다"는 김영식 형제의 말에 나는 동의한다. (그리고 나의 글에서 그런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읽어주기 바란다.) 나는 지적설계운동이 호전적인 무신론 과학자들에 맞서는 일 뿐만 아니라 중립적 과학의 입장에 대해 보다 넓은 포용력을 갖게 되기를, 그리고 유신론적 전제가 가능한 과학이라는 지나친 대중적 웅변 대신에 형이상학적 논증에 더 충실하기를 바라면서 현재의 상황을 염려하는 한 그리스도인 과학자일 뿐이다.

나는 지적설계에 대한 비판적 검토의 영역을 과학자의 입장으로 제한하였고 주로 지적설계를 과학화하려는 노력이나 유신론적 전제가 가능한 과학을 만들겠다는 의도들에 대해 비판하였다. 창조과학계의 주류인 젊은지구론자들이 만들어낸 '괴상한 과학'을 못마땅해하는 것은 로버트 뉴먼을 비롯한 오랜지구론자들의 공통점이다. 하지만 과학을 이해하는 뉴먼은 지적설계운동과 창조과학이 내가 비판한 의미에서 맥을 같이한다는데 동의할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빅뱅우주론이나 정보이론을 통해서, 그리고 다른 과학적 결론들을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형이상학적 함의들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유신론적 신앙에 가져다 줄 유익함에 대해 나는 누구보다도 관심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호전적 무신론자들과 유신론적 과학을 주장하는 창조과학자들의 양극화의 상황에서, 보다 철저한 자기검토가 지적설계운동가들에게 필요하다. 여전히 나는 지적설계운동이 새롭거나 설계를 판정할 만한 과학적 기준이 세워졌다고 여기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가능하다면 한국 기독교계 내에서 지적설계운동이 창조과학의 전철을 밟지 않고 새로운 모습으로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그런 바램에서 비판적 시각을 계속 제시할 것이다. 다음 글에서는 지적설계운동가들이 갖는 설계 개념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다루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