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종학의 글과 칼럼

[무크따 이야기] 2번째 - 문자주의가 아니면 이단이다?

별아저씨의집 2016. 3. 11. 19:17
무크따 이야기 2번째 - 

문자주의가 아니면 이단이다? 

봄이 오는 듯 하더니 다시 추워졌습니다. 따듯한 봄기운을 누리기엔 아쉬운 주말이겠습니다. 지난 주에 이어 오늘은 무크따 이야기 두번째 입니다.

저에게 메세지로 질문하는 분들이 많은데 차곡차곡 글로 답해드리는 편이 낫겠습니다. 무크따에 대한 두 가지 비판 중, 이신론은 첫 글에서 다루었으니 오늘은 무크따가 성경을 사실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창조과학자들의 비판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온누리교회 신문에 실린 창조과학자의 칼럼 일부입니다.

"창세기 기록은 단지 창조신화, 홍수설화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창세기의 기록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신화에 불과한 것이고, 진화에 의해 모든 것이 이뤄진 것이라면 성경말씀에 권위가 있을까. 초월적 창조가 부정되고, 모든 것을 진화에 의해 설명해야 한다면 하나님의 속성, 죄와 사망에 대한 가르침, 십자가와 부활을 선포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기독교 과학자들은 고대의 세계관을 반영한 성경은 발전된 과학을 통해서 재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하는 과학자를 교회에서 초청해서 유신진화론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현재 교회의 모습이기도 하다."

정말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을 교회에 초청해서 진화론을 가르친다면 큰일이겠지요. 그런데 누구를 지칭해서 비판하는 걸까요? 누군지 아신다구요? 빙고입니다. ^^

무크따의 내용이나 제가 가르치는 내용에 ‘공산당’ 혹은 ‘종북’이라는 딱지를 붙여서, 성경을 신화로 만들고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을 상실하게 만드는 이단적 견해로 포장하니 참 답답한 노릇입니다.

창세기는 하나님의 창조역사를 담고 있는 기록입니다. 이 기록을 실제 일어나지 않는 허구라고 주장하면 하나님의 창조를 부인하게 됩니다. 무크따가 그런 주장을 한다구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하나하나 창조하신 역사를 사실로 믿는 바로 그 신앙에서 무크따는 출발합니다.

그럼 왜 창조과학자들은 무크따가 성경을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고 주장한다고 혐의를 씌울까요? 그 이유는 바로 창조과학의 문자주의 때문입니다. 창조과학자들은 창세기에 담긴 문학적 표현들, 가령 비유, 은유, 과장법, 의인법, 당대의 상용어구, 고대 히브리어 어휘 등을 고려하지 않고 문자 그대로의 사실로 봐야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견해를 극단적 문자주의라고 표현합니다. 성경신학자들이 동의할 수 없는 주장입니다.

가령, 시8편에 '주의 손가락으로 지으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 이라는 표현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하나님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지으셨다고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손가락이 없으면 안되는 것이죠. 맞는 해석일까요? 이것은 문학적 표현이죠. 인간이 손가락으로 뭔가 만들 듯 하나님의 창조를 은유적으로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은유라고 말하면, 하나님이 하늘을 창조했음을 부정하는 거다라고 문자주의자들은 비판합니다. 답답하죠? 이 구절을 은유법으로 읽는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이 하늘을 창조했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은유를 문자적으로 읽어야만 성경을 믿는게 아닙니다. 은유를 은유로 읽어도 성경을 사실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시편은 시이지만 창세기는 시가 아니라 산문이라구요? 산문에도 당연히 다양한 표현법이 사용됩니다. 창세기 1장 3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하나님이 성대가 있고 목소리를 내서 음파가 공기를 진동하여 뭔가 파급효과를 만들어 빛이 생겼다는 뜻일까요? 하나님은 성대를 갖고 있나요? 소리는 음파라서 공기 중에서 전달되고 진공에서는 전달되지 않습니다. 그럼 공기를 빛보다 먼저 만드신 걸까요? 만일 소리였다면 그 목소리는 중저음? 혹은 고음이었을까요? 빛이 있으라는 말이 소리로 전달되었다면 그 소리는 히브리어였을까요? 한국말이었을까요? 이런 질문들은 무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이 표현은 하나님을 사람처럼 빗대어 묘사한 의인법으로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문자주의자들은 이렇게 비판할 것입니다. 이 표현을 의인법으로 읽는다면 하나님이 빛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지 않고 신화라고 주장하는 거라고.

간단한 예를 들었지만 정리하자면, 창조과학자들은 창세기에 담긴 비유, 은유, 의인법, 과장법, 상용어구 등등을 죄다 문자적으로 보고 문자 그대로 믿지 않으면 창세기를 사실로 믿지 않는 거라고 주장합니다.

한 마디로 문자주의의 망령입니다. 비유를 비유로 해석하고 은유를 은유로 읽는게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읽으면 성경을 사실로 읽는 게 아니라고 주장하는 창조과학자들은 오히려 성경의 메세지를 왜곡하는 심각한 성서신학적 결함을 드러냅니다.

창조과학자들이 가진 극단적 문자주의는 사실 창조과학운동이 시작된 배경, 그러니까 제7일 안식교에 있습니다. 그 얘기는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하지요.

도대체 누가 초월적 창조를 부정했을까요? 창세기에 나오는 비유를 비유로 읽고 의인법을 의인법으로 읽으면, 성경의 가르침과 부활의 능력을 상실하게 될까요? 인용된 글이 무크따를 왜곡하는 면은 참 마음이 아픕니다. '모든 것을 진화가 설명한다는 주장'이 바로 진화주의고 무크타는 진화주의를 분명히 비판하는데도 불구하고, 저를 진화주의자로 몰아세우는 건 예의가 아닙니다. 무크따에 대한 누명은 그만 씌우심이 좋을 듯 합니다.
문학적 표현을 문자적으로 읽고 하나님을 손가락이나 성대를 가진 형상으로 믿고 성경의 표현을 모두 문자적으로 받아들어야만 성경을 사실로 믿는 것이다라는 창조과학의 극단적 문자주의는 오히려 성경이 진정으로 전달하려는 메세지를 왜곡시킬 뿐입니다.

창조과학자 여러분, 극단적 문자주의를 극복해서 하나님의 창조를 더 깊이있게 드러내고 성경의 가르침을 더 정확하게 배우고 그리고 부활의 능력을 드러내는 창조과학회가 되시길 바랍니다.

추신: 톰 라이트의 '성경이 답하다: 우리시대의 현안과 성경의 대답'에서 한 구절 인용합니다.

"(창세기의) 두가지 창조 이야기는 이른바 과학적인 이야기를 제공하지 않으며 그럴 의도도 없다. 창조 이야기를 두 가지로 제시한 중요한 이유 중 일부는 독자에게 그것이 시적 이미지이자 은유로 가득한 이야기며, 창조세계의 목적을 우뇌로 포착하도록 도와주기 위해 만든 이야기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려는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지난 200년 동안 많은 독자들이 이런 암시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최근까지 영국의 랍비 대표였던 조너선 색스(Jonathan Sacks)가 그의 책 『위대한 동반자 관계: 하나님, 과학, 의미 탐구』(The Great Partnership: God, Science and the Search for Meaning)에서 거듭 말하듯이, 과학은 대상의 작동 방식을 이해하려고 그것을 분석하지만 종교는 대상의 의미를 알기 위해 그것을 종합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