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창조과학을 재고해야 하는 이유 (월드뷰 11월호)
(2015년 10월 국민일보에 축약되어 실린 칼럼의 원 글입니다. 월드뷰 11월호 특집으로 실렸습니다. )
흔히 우리는 진화론 때문에 청년들이 신앙을 잃고 교회를 떠난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리차드 도킨스 같은 무신론자들은 과학이 무신론의 증거라는 진화주의 입장에서 기독교 신앙을 공격한다. 그 공격이 도화선이 되면, 신앙의 지적 토대가 약한 기독교인들은 내상을 입고 신앙을 잃기도 한다.
하지만 진화론은 전체 그림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오히려 창조과학이 신앙을 무너뜨리는 도화선이 되기도 한다. 교회에서 배우는 창조과학과 학교에서 배우는 과학 사이의 모순 때문에 심하게 갈등하다가 신앙을 잃을 뻔 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다행히 훌륭한 스승이나 균형잡힌 책을 통해서 창조주를 믿으면서도 얼마든지 과학을수용할 수 있음을깨닫고는 오히려 더 풍성한 신앙을 갖게 되었다는 결말을 들으면 한시름 놓인다.
모태신앙으로 교회를 다니면서 공룡이 사람과 함께 살았다는 비상식적인 주장을 들으며 자라다가, 과학을 배우더니 교회가 거짓을 가르쳤다는데 실망하여 기독교 신앙을 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린다. 젊은지구론을 믿어야만 기독교인이라는 오해가 퍼져 있다보니, 마치 천문학이나 지질학 그리고 생물학의 내용을 수용하면 기독교인이 될 수 없는 분위기다. 젊은지구론이나 창조과학의 논리가 조잡한 수준임을 목격한 과학전공자들 그리고 과학을 수용하는 사람들은 결국 기독교를 떠난다.
또 한 부류의 사람들도 있다. 창조과학을 비판하는 나에게 과학의 교만을 버리고 예수를 믿으라는 말하는 사람들이다. 창조주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공공연하게 밝혀도, 그들이 보기에는 창조과학을 반대하는 사람이 아무래도 예수를 믿을 리는 없나보다. 기독교인이라는 가면을 쓴 진화론자에 불과하다는 낙인을 찍고 예수믿고 복받으라며 던지는 언어의 폭력 앞에 씁쓸한 미소가 지어질 뿐이다.
나만의 경험이라면 순교자 코스프레라도 하며 참을 수 도 있겠다만, 이런 공격을 받는 많은 과학자들과 지성인들이 기독교에 회의를 느끼고 신앙을 버리는 길을 택하는 걸 안타깝게 목격하는 나로서는 그저 인내해야 할 일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침묵한다면 과학자로서 받은 소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셈이다.
창조과학은 진화론의 위협에서 기독교를 지키려는 선한 의도로 진화론을 공격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과학을 부정하는 창조과학은 교회를 떠나는 수많은 창조과학 난민을 양산했고 신앙을 잃게 하는 도화선이 되기 도 한다. 더이상 미룰 수가 없다. 한국교회는 창조과학을 심각히 재고해야 한다.
과학이 무신론의 증거라는 공격에 맞서는 바른 전략은 오히려 과학이 하나님의 창조를 드러낸다고 반론하는 것이다. 과학에는 창조주의 증거가 없다고 무신론자들이 주장한다면, 기독과학자들은 과학이 오히려 창조주의 지혜를 드러낸다고 알려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창조과학은 처음부터 잘못된 전략을 취했다. 그것은 과학이 틀렸음을 보여서 무신론을 무력화시키고 유신론이 옳음을 입증하겠다는 전략이었다.
이 불운한 전략은 첫째, 창조과학으로 대변되는 근본주의 기독교와 과학계 사이의 충돌을 초래했다. 창조과학회는 무신론자들과 맞서려 했지만, 오히려 기독교인 과학자를 포함한 과학계와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창조과학자들의 역사를 다룬 넘버스의 책, ‘창조론자들’을 보면 과학 대신 창조과학을 가르치려했던 법정 투쟁에서 많은 기독교인 과학자들이 오히려 창조과학의 반대편에 섰던 일화들이 나온다. 기독과학자들이 창조과학을 반대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비과학적이고 비전문적인 창조과학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가령, 동위원소 연대측정법이 엉터리라거나 그랜드 캐년이 수천 년 전에 형성되었다는 주장은 기독교인이건 무신론자건 간에 전문분야 과학자가 수용할 수 없는 허황된 견해다. 다양한 학문에 걸쳐 지구 연대가 오래되었다는 과학적 증거가 압도적으로 많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젊은지구론이 진정한 과학인 양 포장하는창조과학의 주장들에 대해 과학자들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창조과학은 과학에 대한 오해와 반감을 심어 대중을 오도하는 골치거리로 각인된 지 오래다.
둘째, 과학을 부정함으로써 무신론의 공격을 무력화시키겠다는 전략은 꽤나 시대착오적이었다. 헨리 모리스를 중심으로 1960년 대에 과학적 창조론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창조과학 운동의 배경에는 근본주의가 있고 더 밀접하게는 안식교의 성경해석이 있다. 창조과학의 주류 견해인 젊은지구론은 아마추어에 불과했던 안식교인 맥그리드 프라이스가 만든 홍수지질학을 토대로 세웠졌다. 물론 지질학계는 홍수지질학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사실, 다윈의 진화론이 출판되기도 전에 이미 과학계에는 지구연대가 매우 오래되었다는 견해들이 자리잡았고 그 결과 를 받아들인 신학자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화론이라는 누명을 씌워서 지질학의 결 론을 반기독교적인 견해로 규정하는 것은 시대 착오적이다.
셋째, 과학을 대적하는 창조과학의 전략은 심각한 신학적 문제를 안고 있으며 교회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하나님께서 자연세계에 계시하신 창조의 역사를 무시하고, 성경에서 답을 찾으려는 태도는 성경신학적 오류다. 성경의 저자들이 의도하지 않은 내용까지 성경에서 답을 찾으려는 태도는 위험하다. 성경을 과학교과서처럼 읽어서 구성한 창조과학의 주장은 하나님의 창조사역과 창조세계의 특성을 왜곡한다. 하나님께서 인과관계를 가지고 세계를 창조하실 수 있음을 굳이 외면하고, 하나님을 마술사의 모습으로 제한하는 심각한 왜곡을 낳는다. 자연현상의 인과관계가 과학으로 설명되면 마치 신의창조나 신의 섭리가 아닌 것으로 오해하는 창조과학식의 이해는 신을 기적이라는 세계에 가두어 버리는 전근대적 입장으로 전락한다. 자연주의적 방법론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자연에 담긴 일반계시에 대한 신학적 이해가 창조과학자들에게 절실 히 요구된다.
과학의 겸손? 신학의 겸손은?
과학자로서 젊은지구론이나 창조과학을 비판하면, 과학은 불완전하고 성경은 온전하니 과학을 성경 위에 두면 안된다는 반응이 나온다. 그렇다. 기독과학자라면 누구나 과학을 성경 위에 두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과학의 교만과 더불어 신학의 교만도 주목해야 한다. 과학이 겸손해야 한다는 주장은, 마치 나는 성경을 완벽히 이해하는데 너의 과학은 불완전하니 과학을 성경 위에 두지 말라고 말하는 듯하다. 글쎄다. 나의 성경해석을 성경자체와 동일시 할 수 있을까? 나와 우리 교단의 성경해석은 결코 완벽하지 않다. 성경해석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은 왜 겸손하게 돌아보지 않는가? 과학이 자연이라는 실재에 대한 영원한 근사에 불과하듯, 신학도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영원한 근사에 불과하다. 그러니 과학의 겸손과 더불어 신학의 겸손도 갖추어야 한 다. 창세기에 지구 연대가 1만년이라고 명백히 써있지도 않은데 지구나이를 성경에서 읽어내는 것이 적합한 지 겸손히 돌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과학은 겸손할 수 밖에 없다. 과학으로 입증되지 않는 내용에 대해 과학자가 무엇을 주장하겠는가? 물론 과학주의 무신론자들처럼 과학으로 감히 신의 존재를 논하겠다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과학이 겸손해야 한다 는 주장으로 이미 전문분야 과학자들이 오래 전에 합의하고 결론내린 내용까지 공격하는 것은 학문적인 태도 가 아니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고 설명하는 사람에게 과학은 겸손해야 한다라고 말한다면 격이 맞지 않는다. 창조과학회가 비판받는 이유는 바로 지구의 오래된 연대처럼 과학계에서 이미 합의되고 결론내린 내용까지 마치 불확실한 것처럼 오도하기 때문이다.
과학의 겸손을 주장하는 창조과학회가 들어야 할 말은 비전문가의 겸손이다. 현대과학은 매우 세분화 되어 있어 전문가가 아니면 그 분야의 전문적 내용을 판단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창조과학 강의들을 검토해 보면 전문 과학자도 아닌 공학자나 의사가 과학자라는 이름으로 천문학, 지질학, 생물학 등 다양한 분야의 내용들을 예시하면서 과학이 아니고 가설에 불과하다는 식의 황당한 주장을 펼친다. 과학의 겸손을 말하기 전에 비전문가들의 겸손을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과학기사나 인터뷰 혹은 잡지의 내용을 따다가 입맛에 맞게 편집해서 마치 과학에 심각한 결함이라도 있는 것 처럼 대중을 오도하는 창조과학의 동영상이나 글이 교회에 퍼지는 것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다. 전문분야 과학자의 입장에서 그 내용들을 분석해 보면 피상적인 이해 때문에 오해했거나 침소봉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정말로 과학에 문제가 있으면 전문가들과 토론하고 연구논문으로 밝혀야지 왜 과학을 잘 모르는 일반 성도들을 대상으로 프로파간다를 펼치는가? 그 이유는 자명하다. 과학자들을 상대할 전문성이 없기 때문이다. 천문학, 지질학, 생물학의 오류를 밝히겠다면 골목길에서 시비걸지 말고 당당하게 링으로 올라와서 붙어야 하지 않을까?
교회가 젊은지구론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를 꼽 아보자. 첫째, 젊은지구론이 무너지면 복음이 무너진다는 오해때문이다. 글쎄다. 중세시대에는 성경을 토대로 지동설이 틀렸고 천동설이 맞다고 주장했었지만 결국 천동설은 무너졌다. 그 렇다고 해서 기독교가 무너졌는가? 젊은지구론 을 폐기한다고 해서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담은 복음이 무너지지 않는다.
둘째, 교회는 창조과학의 주장에만 일방적으로 노출되어 심각한 정보의 불균형을 겪기 때문이 다. 과학을 판단할 전문성의 부재와 과학계와 교류하지 않는 폐쇄성은 창조과학이 진화론에 물들지 않은 진정한 과학이라는 허상에 푹 빠지게한다. 이 불균형을 깨려면 전문분야 과학자의 견해를 듣고 배워야 한다. 하지만 세번째 문제는 창조과학회가 진화론자라고 낙인찍은 과학자들의 견해를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창조과학이 아니면 진화론이라고 규정하는 근본주의적 폐쇄성은 오래전에 폐기되었어야 할 젊은지구론이 여전히 창조과학의 주류 의견으로 그리고 한국교회의 대다수 의견으로 남아있게 만든 원인이다.
네째, 그동안 창조과학을 가르쳐 왔던 입장을 쉽사리 바꾸기가 어렵다는 현실적인 이유때문이다. 철저히 믿고 가르쳤던 젊은지구론을 폐기하는데 따르는 부담감과 철저히 부정했던 지구의 오랜 연대를 수용하는데 따르는 심리적 거부감은 당연하다. 목회자의 입장에서 쉽지 않다. 하지만 깨달았을 때 반성하고 돌이키는 것이 최선이다.
창조과학을 심각히 재고하지 않으면 교회의 미래는 어둡다. 신앙에 걸림돌이 될 내용을 주일학교에서 가르치는 일은 멈춰야 한다. 지질학 전공자도 아니면서 방사성 동위원소 연대측정법이 틀렸다고 하고, 천문학자도 아니면서 적색이동도 믿을 수 없 다고 하고, 생물학자도 아니면서 종의 분화는 관측된 적이 없다고 하는 그런 비전문가 창조과학 강사들이 교회에서 젊은지구론을 가르치고 과학을 깡그리 쓰레기통에 집어넣는 일이 버젓이 벌어지는 것이 안타깝고, 그런 강의를 듣는 과학전공자들이 갈등하고 힘들어 하는 일이 참으로 안타깝고, 그러다가 신앙을 버리고 불가지론자가 되거나 무신론자가 되는 경우를 보고 접하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주일학교 아이들과 청년들이 과학 때문에 갈등하다가 교회를 떠나면 그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교회의 미래를 걱정한다면 젊은지구론을 폐기해야 한다. 교회는 창세기를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 이성과 과학의 칼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창조주 하나님은 과학보다 위대하다. 정보의 불균형을 깨야한다. 과학자들을 진화론자라고 정죄하지 말고 그들의 전문적인 견해를 듣고 배워야 한다. 심리적 부담감을 딛고 반성하고 돌이켜야 한다. 젊은지구론 창조과학을 털고 갈 수 있도록 연착륙할 출구를 열어주어야 한다.
우종학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