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종학의 글과 칼럼

[우종학 교수의 별아저씨 이야기] 시간의 절대성과 상대성

별아저씨의집 2015. 1. 24. 10:20

[우종학 교수의 별아저씨 이야기] 국민일보 2015. 1. 24


시간의 절대성과 상대성 


영화 ‘인터스텔라’가 개봉하자 기자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블랙홀이 소재가 되다 보니 블랙홀 과학자를 찾는다. 블랙홀로 유명한 킵 손의 책을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터라 그가 자문한 영화라는 점에 구미가 당겼다. 감탄하면서 감상했던 영화 ‘인셉션’의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의 새로운 영화라는 문구도 솔깃했다. 블랙홀이 웅장하게 묘사된 홍보 동영상을 찾아보고 나서 방송과 신문에 인터뷰를 했다. 다행히 인터뷰 질문들은 블랙홀 현상에 대한 과학적인 내용이었다. 


사람들이 몰리는 시기가 지난 후 영화를 보러 갔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것일까? 영화를 보며 연거푸 하품을 했다. 블랙홀 묘사는 좋았지만 종합적으로 봤을 때 영화는 걸작이 아니라고 판단된다. 공상과학 영화를 보면서 자주 하품을 하다니, 그것으로 평가를 대신한다. 날아가는 우주선이 마치 슬로비디오로 잡힌 듯 느린 템포로 전개되었던 영화, 스페이스 오디세이 2001을 보면서도 결코 지루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배우의 연기도 중요하고 그래픽이나 특수효과도 중요하지만 영화의 핵심은 뭐니뭐니 해도 스토리, 그리고 감독의 시각으로 전개되는 스토리의 재구성이다. 뻔한 스토리나 지루한 전개는 그야말로 수면제다. 어쩌다 드라마를 볼 때면 배우의 다음 대사를 미리 읊어내는 신공을 보이는 나는 물론 까다로운 관객이긴 하다. 

그래도 영화는 괜찮았다. 우리나라 사람 5명 중 한 명이 시간이 상대적이라는 물리지식을 배웠을 게다. 밀러 행성에서 보낸 3시간 동안 지구사람들은 21년의 시간을 보낸다. 너와 나의 시간이 다르게 간다는 것. 그것은 누가 봐도 충격이다. 나는 늙어가지만 너는 아직도 젊다는 것. 그 정도의 판단이라면 단지 질투심에서 발동한 왜곡된 인식이라며 애써 심리학을 들이댈 수도 있겠다. 허나 명료하고 모순 없는 물리로 기술되는 시간의 상대성은 자연 세계의 오묘함과 인간 인식의 한계를 명백히 드러낸다. 

대학시절 현대물리학을 수강하며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을 배웠다. 관찰자에 따라 시간이 다르게 간다는 물리 지식은 그해 여름 파도처럼 밀려드는 끝없는 질문들을 낳았다. 절대시간이라는 틀 안에서 세상을 보던 나에게 우주가 다르게 보이는 눈이 열린 듯했다. 물리현상이 절대적으로 일어나기보다는 확률적으로 기술된다는 양자역학도 물론 비슷한 충격을 주었다. 아이작 뉴턴에게 배운 시간의 절대성에 대한 믿음은 그렇게 산산조각났다. 영화 인터스텔라를 통해 온 국민이 시간의 상대성에 대해 눈을 떴다면 그 영화가 한몫한 셈이다. 

시간의 절대성이 깨졌다는 말은 시간의 무질서를 의미하지 않는다. 시간의 상대성은 인간의 경험이 완벽하지 않다는 경각심을 주지만, 내 말도 맞고 네 말도 맞다는 상대주의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른 상대주의적 주장들은 하나로 통합될 수 없지만 시간의 상대성은 하나의 물리적 체계로 깨끗하게 통합된다. 시간의 상대성은 더 큰 절대성으로 통합된다고 할 수도 있다. 

상대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에도 시작과 끝은 분명하다. 우주의 시공간은 138억년의 역사를 갖는다. 빅뱅우주론을 넘어 시간의 시작 전에 또 다른 시간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 인생도 물리적 우주처럼 시간의 알파와 오메가를 경험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마치 시간이 영원할 듯 살아간다. 영원히 늙지 않을 듯 살아가고, 갑작스러운 죽음은 오지 않을 듯 미래를 계획한다. 세계대전 없이 지낸 지 100년도 되지 않았지만 태평성대가 영원히 지속될 듯 일상을 산다. 인류의 문명은 고작 1만년 정도 지속되었을 뿐이다. 


시작과 끝 사이에 담긴 시간 안에서 우리는 동시에 시간의 상대성을 겪는다. 더 놀고 싶은 아이의 시간과 그만 놀고 공부하라는 부모님의 시간은 다르게 간다. 연인과의 시간은 밀러 행성의 시간처럼 순식간에 지나가고 오늘도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온다. 문고리 권력과 항명으로 콩가루 집안이 된 청와대의 시간도 국민의 시간과는 다르게 가는 듯하고, 한국교회가 주야장천할 것이라 기대하는 목사들의 시간과 교회를 떠나가는 성도들의 시간도 다르게 간다. 물리적 우주 안에 사는 우리의 시간과 초월자인 신의 시간도 결코 같지는 않겠다. 

시간이란 무엇일까? 두 사건 사이의 간격으로 정의되는 물리적 시간, 크로노스와 중요한 때를 지칭하는 카이로스. 카이로스를 크로노스에서 분리할 수는 없다. 크로노스 안에 창조의 때와 구원의 때가 담긴다. 이 두 카이로스 사이에 놓인 장구한 크로노스의 의미는 무엇일까? 100억년이 넘는 우주의 시간 안에서 100년을 사는 인간의 시간, 그 상대성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시간을 내다보는 자, 시간의 절대성과 상대성을 품는 자는 지혜로운 사람이겠다. 새천년이 시작된 후 15년, 내 90인생의 반이 꺾인 시기에, 나는 물리학을 통해 크로노스를 배우고 인류의 지혜에 기대어 카이로스의 의미를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