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이야기/과학칼럼 & 과학에세이

[사이언스플라자] 글쓰기는 과학자의 일상

별아저씨의집 2012. 5. 24. 20:30

매경 사이언스 플라자 칼럼 2012년 5월 23일자




과학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초ㆍ중ㆍ고생들이 이메일로 물어보는 질문 중 하나다. 심심찮게 날아오는 이메일에 일일이 답해주지 못해 안타깝지만 그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 그것은 과학자가 되려면 글 쓰기 훈련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박사과정 시절 동료 대학원생들 사이에선 `교수들은 글 쓰는 기계`라는 농담이 오갔다. 연구비를 타려면 연구제안서를 잘 써내야 하고 그것을 토대로 다른 연구자들과 경쟁해야 한다. 오랜 시간 준비해서 제출한 제안서가 좋은 평가를 받아 채택될 때 즈음이면 벌써 다음 연구제안서를 준비하기 시작해야 한다. 

연구비뿐만 아니다. 시간이 한정되어 있고 경쟁이 심한 우주관측 기기나 실험장비 등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좋은 연구제안서가 필수다. 다양한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려면 끊임없이 연구제안서를 써내야 한다. 한두 달에 한 번은 연구제안서를 써야 하는 내 1년은 연구제안서 마감일에 맞춰 흘러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구제안서를 쓰는 일은 연구의 시작이다. 과학연구는 연구 주제에 대한 아이디어, 실험 혹은 자료 수집, 자료를 분석하고 해석하는 일, 그리고 연구 내용을 논문으로 작성하는 일 등 4가지 단계로 구성된다. 어떤 주제에 대해 어떤 자료를 가지고 어떻게 연구하겠다는 아이디어가 담긴 구체적인 연구제안서가 마련된다면 이미 연구의 반이 끝난 셈이다. 연구 결과를 담아내는 일도 논문이라는 글쓰기를 통해 이루어진다. 결국 과학연구는 글 쓰는 일로 시작해서 글 쓰는 일로 끝난다.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내용을 하나의 이야기로 담아낸 훌륭한 논문을 만드는 일은 물론 만만치 않다. 고치고 또 고치고 일백 번 고칠 만큼 좋은 논문이 나오기까지는 출산의 고통이 따른다. 연구 잘하던 뛰어난 후배가 논문 쓰기가 힘들어 결국 박사학위를 포기한 사례를 보았다. 미국 토박이였던 그를 보면 단지 영어 때문에 논문 쓰기가 어려운 건 아님을 알 수 있다. 글 쓰는 일이 괴롭다면 과학자로 사는 것이 불행할 수도 있겠다. 

연구논문을 심사하는 일도 글 쓰기 과정이다. 지난주 초에는 어느 국제저널에 투고된 논문을 심사해 달라는 의뢰를 받아 심사보고서 작성에만 꼬박 이틀을 보냈다. 꼼꼼하고 엄밀한 심사와 건설적인 비판은 과학연구의 생명인 논문 질을 높이는 유용한 도구다. 그래서 과학자로서 논문심사는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의무며 이는 또한 글 쓰기를 통해 이루어진다. 

글 쓰기 실력이 훌륭한 과학자가 되기 위한 필수조건임은 분명하다. 다른 학문 분야와 마찬가지로 과학에서도 글이라는 것은 소통 도구이며 매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자가 되려면 글 쓰기 훈련을 잘해야 한다. 

유학하는 동안 몇 년간 수업 조교를 한 경험이 있다. 대학생들 에세이를 채점하다 보면 리포트를 낸 학생이 1학년인지 4학년인지 구별할 수 있었다. 대체적으로 글 쓰기가 엉망인 1학년에 비해 4학년 학생들 에세이는 조리 있고 깔끔했다. 4년간 대학교육을 통해 글 쓰기 능력이 그만큼 향상된다는 것을 실감한 경험이었다. 

글 쓰기 실력은 독서량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고전을 비롯한 다양한 책을 읽어야 한다. 또한 일방적으로 강의를 듣기보다는 토론을 통해 상대방 논리를 파악하고 자기 논점을 전개하는 훈련도 필요하다. 순발력이 강조되는 트위터 시대지만 논리와 이야기가 담긴 장문의 글을 쓰는 훈련을 주기적으로 해야 한다. 

과학자가 되기를 꿈꾸지만 글 쓰기 훈련이 되지 않은 학생이 많다. 훌륭한 과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과학과 수학 실력도 중요하지만 어쩌면 국어 실력이 더 중요하다. 그것은 글 쓰기가 과학자의 일상이고 과학 활동의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우종학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