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종학의 글과 칼럼

[211호 과학칼럼] 선입견의 우상을 버려라 - 복음과상황 08년 5월호

별아저씨의집 2008. 5. 8. 16:44
[211호 과학칼럼] 선입견의 우상을 버려라 - 복음과상황 08년 5월호



우종학 (천문학 박사, 켈리포니아대학 산타바바라)

선입견의 위력

캘리포니아 오렌지카운티에서 누가 이웃인가에 대한 실험을 한 적이 있다. 펑크 난 자동차를 고속도로 갓길에 세워놓고 누가 도움을 주는지 알아보는 실험이었다. 터반을 쓴 인도인이 고장 난 차 옆에서 도움을 청했지만 몇 시간 동안 수백 명의 사람들이 그냥 지나쳐 갔다. 남미 계열의 사람의 경우에는 같은 남미 계열 사람들이 차를 세우기 시작했다. 젊은 대학생이 도움을 청했을 때는 차를 세우고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했고 금발 여성의 경우에는 너도나도 차를 세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런 비슷한 얘기는 많다.

선입견은 엄청난 파워를 갖는다. 9·11 사건 며칠 후, 두려움에 집 밖을 나가지 않았던 이슬람계 미국인 엄마가 아이를 데리고 동네 도서관에 갔다. 평소처럼 히잡을 쓰고 도서관을 들어가던 그녀는 결국 당황스런 경우를 맞았다. 안내 데스크에 앉아있던 여성이 두려움과 경계의 표정으로 옆 사람에게 이렇게 말한 것이다. “경비를 불러야겠죠?” 현재 미국에서 이슬람계 사람들이 선입견 때문에 겪는 고통은 엄청나다. 내가 속한 대학으로 중동에서 막 유학 온 어느 여학생은 한밤중에 국토안보부 요원들의 거친 방문을 받았다. 영화에서 보듯 무장한 요원들이 집을 포위하고 들이닥쳐 그녀를 체포했다. 학생의 집 주소를 알려준 대학측은 변호사를 동원하여 그럴 필요가 없음을 미리 항변했지만 그 기관의 힘 앞에는 무력했다. 그녀는 정신적 육체적 충격으로 유학을 포기하고 고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고 한다. 선입견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다. 메시아를 만났다는 빌립의 말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며 반문하던 나다나엘의 대답은 나사렛이라는 동네 출신에 따라붙는 편견을 여실히 보여준다.

한국사회 정치적 편견이 심한 편이다. 빨갱이라고 표현되는 무서운 딱지는 친일파들이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오히려 독립을 위해 싸운 사람들을 민족의 적으로 만드는 데 매우 유용하게 이용되었고 그 후로는 민주화를 억압하는 독재정권의 유용한 통치수단으로 사용되었다. 해방과 한국전쟁 후 5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이에 관련된 정치적 선입견은 여전하다. 소위 좌파라는 말로 색깔을 칠해 버려 개혁세력을 선입견으로 보게끔 만드는 수구보수 정치인들의 행태는 분명히 코미디지만 관객은 그 내용을 진담으로 믿어버린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인권과 차별의 문제의 핵심에는 나와 다르다고 보는 선입견이 존재한다. 서구 백인들에 대한 호감과 유색 외국인들에 대한 비호감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고아 출신들이 겪는 결혼과 사회생활의 어려움, 다양한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은 바로 선입견의 마력에서 불거진다.

과학자들의 선입견

과학자들은 어떨까? 안 그럴 듯하지만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과학자들만큼 강한 선입견에 붙들려 있는 사람들도 없다. 물론 그 선입견은 기존의 과학의 결과들을 토대로 했기 때문에 더 강할 수도 있다. 기존의 이론을 뒤집는 새로운 결과가 확증되기 전에 과학자들의 생각을 바꾸어 놓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새로운 결과가 나오더라도 과학자 사회가 그렇게 금방 새 결과들을 수용하고 새로운 이론을 정론으로 선택하지는 않는다. 변화는 종종 긴 시간과 노력을 요구한다.

20세기 최고의 인물로 꼽히는 알버트 아인슈타인을 예로 들어보자.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말로 유명한 그는 현대물리학의 주요한 한 가지인 양자물리학을 인정하지 않았다. 불확실성 원리라고 하는 양자물리학의 중요한 원리는 뉴턴이 제시했던 기계적 우주와는 다른 물리세계를 보여주었다. 하나를 알면 다른 하나는 알 수 없다는 불확실성 원리는 아인슈타인이 생각한 우주에는 맞지 않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다. 우주가 어느 시점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자신의 이론이 못마땅했던 그는 인위적으로 상수를 집어넣어 자신의 이론을 수정해 버렸다. 20세기 말부터 우주론 분야에서 엄청난 이슈가 되고 있는 우주상수는 그렇게 탄생했다. 과학자 사회가 새로운 개념이나 과학이론에 냉혹했던 사건들은 많다. 블랙홀의 경우도 그렇다. 에너지와 물질을 잡아먹기만 하고 토해낼 줄 모르는 블랙홀이라는 존재는 합리적 우주를 믿는 과학자들에게는 불편한 존재였으리라. 블랙홀이 던지는 모호성들을 인정하기 어려웠던 많은 과학자들에 의해 블랙홀은 오랜 기간 동안 학계에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기존의 과학 내용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과학자들의 선입견은 일반인들의 선입견과는 성격이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과학은 변한다. 오늘의 최고 이론이 앞으로도 꼭 그러리라는 법은 없다. 그런 면에서 보면 과학자 사회의 편견과 선입견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선입견이 그저 색안경을 쓰고 보는 것으로 끝나면 다행이련만, 선입견은 우리의 의사결정에 끼어들어 불필요한 대가를 지불하게 한다. 연구논문을 쓰는 일도 마찬가지다. 최근 몇 년 동안 나는 일련의 연구를 하고 있다. 작년 말에 제출한 세 번째 논문을 심사한 보고서를 받았을 때 화가 치밀었다. 심사위원은 그 논문의 결과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럴 수도 있다. 논문의 결과가 제시하는 내용이 파장을 일으킬 만했고 학자들 간에 얼마든지 의견이 다를 수 있다. 문제는 그가 지적한 이유들이었다. 꼭 다루었어야 할 중요한 테스트와 논의들이 빠져있다면서 그는 대대적인 수정을 요구했다. 완전한 편견이었다. 그 요구사항 하나하나는 이미 출판된 두 편의 논문에서 철저하게 다루었기 때문이다. 그 논문들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채 당연히 잘못된 결과일 거라는 편견을 가진 것이다. 나의 동료 연구자들도 열을 받았다. 특히 첫 논문의 경우,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다 검증해 본 훌륭한 논문이라 수정이 필요 없다며 심사위원이 그대로 논문을 통과시켰던 기억이 있기에 더 그랬다. 물론 심사위원에게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 합리적인 요구는 수용해서 더 좋은 논문으로 만들면 되고 동의할 수 없는 점들은 하나하나 근거를 들어 반박하면 된다. 문제는 심사위원과의 공방에 긴 시간과 노력이 들고 논문의 출판은 그만큼 지연되면서 다른 연구에 지장을 받는다는 데 있다.

논쟁은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심사위원의 보고서에 어떤 톤으로 답을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심사위원의 편견을 깨는 일은 단지 그의 논점들을 논박하고 그가 틀렸음을 보이는 것으로만 해결되지 않는다. 결국 하나하나 인정하게 되더라도 논문을 통과시킬지 아니면 더 꼬투리를 잡아 수정을 요구할지는 그의 선입견에 따라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심사위원을 자극할 만한 말을 극도로 자제하면서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반박서를 썼다. 그가 편견을 갖고 봤던 점들을 다시 구체적으로 논하고, 논문에는 불필요하지만 심사위원을 설득하기 위한 테스트 결과들도 첨가했다. 내가 써 본 반박서 중에 가장 긴 반박서가 아닌가 싶다. 수정한 논문과 반박서를 제출한 얼마 뒤 다시 심사위원의 보고서가 날아왔다. 재밌게도 이번에는 같은 논문을 훨씬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논문 출판은 이제 시간문제가 되었다.

제한된 지식, 제한된 경험, 그리고 선입견

선입견은 자신이 알고 있는 제한된 지식을 토대로 만들어진다. 토론이나 논쟁을 하다보면 두 개의 상반된 견해가 극명하게 드러날 때가 많다. 하나의 견해가 잘못되었음이 논리적으로 드러나도 사람들은 그 견해를 쉽게 버리지 않는다. 그렇게 합리적인 존재가 아닌 사람들의 논쟁과 토론에는 감정과 태도의 문제가 교묘히 섞여 버린다. 한마디로, 기분 나쁘면 상대편 말이 맞더라도 자신의 의견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신의 존재,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메시지를 얼마든지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전할 수 있다. 무신론자들이 갖는 선입견들이 왜 틀렸는지를 하나하나 근거를 들어 따질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 자신들의 편견이 틀렸음이 드러나도 쉽게 편견을 버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단지 논리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복음의 변증에 논리도 중요하지만 사랑과 이해가 필수적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크리스천들도 많은 편견을 갖는다. 성경이 별로 가르쳐주지도 않는 내용들을 기독교적이라고 철저하게 믿는 경우가 많다. 과학과 신앙의 문제도 그렇다. 누차 지적했듯이, 진화이론이 비과학적이라는 선입견은 별로 근거가 없음에도 쉽게 포기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진화의 방법을 사용해서 생물들을 창조했다고 믿는 크리스천 생물학자들에 대한 편견도 심하다. 똑같이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데도 신앙을 포기했다느니 사악하다느니 하는 말로 크리스천 과학자들을 폄하하는 창조과학자들도 그렇고, 학자로서 진지하게 진화이론을 연구하는 생물학자들에게 진화이론에 무비판적이라는 꼬리표를 다는 지적설계론자들도 그렇다. 이들은 평범한 크리스천들이 과학, 특히 진화이론에 편견을 갖게 만드는 장본인들이다.

선입견을 극복하는 열린 자세

크리스천들의 가장 큰 선입견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같을 것이라는 선입견이 아닐까.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그래서 하나님의 속성을 갖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속성에 제한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함정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할 때는 우리의 경험과 언어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이것을 신인동형 [anthropomorphism] 의 문제라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를 주실 때도 인간의 언어로 기록해 주셨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경험과 언어에 제한되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의 언어로는 그분을 다 설명해 낼 방법이 없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가서 고려시대 사람들에게 인터넷뱅킹에 대해 설명해 주거나, 다섯 살배기 아이에게 엄마 아빠가 이혼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어도 완전한 이해가 불가능한 것과 같다. 그래서 성경이 있지만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여전히 근본적인 어려움이 있다. 가령, 시간에 초월한 존재인 하나님을 시간에 제한된 우리가 이해할 수 있을까? 그래서 인간의 자유의지와 신의 예정이 모순되어 보인다.

우리가 우리의 모습을 투영해서 하나님을 이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인정해야 하지만 하나님을 그 투영된 이미지 안에 가두는 것은 중대한 잘못이다. 하나님을 우리의 좁은 지식과 경험세계 안에 가두는 것은 하나의 우상을 만드는 일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이것이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낸 신이라며 경배했다. 우리의 한계로 제한된 옷을 입혀 하나님을 왜곡하는 것, 그렇게 우리의 형상대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드는 일은 우상을 만드는 일과 다름이 없다. 우상화된 하나님, 왜곡된 하나님의 이미지가 판을 친다. 우리의 이성의 한계에 갇혀진 하나님뿐만 아니라 우리의 욕심과 죄 된 본성으로 일그러진 하나님도 수두룩하다. 복음의 핵심인 고난이 빠져버린 기복적인 하나님이 그렇고, ‘긍정의 힘’으로 인기를 끄는 하나님이 그렇고, 가난한 자와 고아와 과부에 관심을 잃은 부자 교회의 하나님이 그렇다.

창조의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자연법칙들을 통해서 우주를 다스리시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창조의 역사를 이해하려고 할 때, 우리는 우리의 좁은 경험과 지식의 세계 안에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오류를 범한다. 우리는 마치 시계공이 시계를 만들 듯, 우리가 무언가를 창조해내던 그 경험을 가지고 하나님의 창조를 이해하려고 한다. 설계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뭔가를 구상하고 만들어내던 그 설계의 개념을 가지고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광대한 능력은 우리의 이성의 한계를 넘어선다. 마치 마술사처럼 기적적인 방식으로 우주를 창조했을 것으로 제한하거나, 혹은 잘 구성된 설계도에 맞춰 자동화된 공정을 통해 창조했을 것으로 제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분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얼마든지 창조의 섭리를 행하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과학이 밝혀주는 결과들을 하나씩 겸손하게 배워가면서 하나님의 두 가지 계시인 성경과 자연을 이해하려고 애써야 한다. 동시에 항상 그분의 초월적인 능력과 우리의 이성의 한계를 인정하는 열린 자세를 가져야 한다. 하나님을 우리의 좁은 시각에 제한하는 편견은 버려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