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종학의 글과 칼럼

[210호 과학칼럼] 배보다 배꼽이 크면 과감히 버려라 [월간 복음과상황 2008년 4월호]

별아저씨의집 2008. 3. 27. 14:41

[210호 과학칼럼 복음과상황 2008년 4월호]

배보다 배꼽이 크면 과감히 버려



우종학 (캘리포니아 대학 산타바바라, 천문학 박사)

최근 어느 신문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국내 대학들이 특허를 내서 얻은 이익 보다, 특허를 내고 유지하는 데 들어간 비용이 더 많다는 내용이었다. 수익을 기대하고 특허를 내는 것이 당연한데, 투자한 것도 건지지 못했단다. 특허 숫자를 실적의 기준으로 삼다보니, 경제적 가치가 없는 기술을 갖고도 무조건 특허를 내는 데 급급했기에 이런 현상이 벌어졌다. 결국 배보다 배꼽이 큰 국가적 손실이다. 이런 예는 그리 드물지 않다. 한반도 대운하 사업도 그런 예가 아닐까? 운송, 관광 등등 여러 그럴듯한 논리가 제시되지만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도대체 왜 이 사업을 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득보다 실이 많아 보이는 이런 사업을 벌이는 이유는 분명 다른 곳에 있어 보인다.

배보다 큰 배꼽
 
양적인 실적이 중시되다 보면 주객이 전도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학자들의 경우에는 논문 실적이 그렇다. 논문 숫자로 연구업적을 평가하다 보니 표절이나 조작, 혹은 중복 발표 등을 통해서 논문 숫자를 늘리려는 유혹이 일어난다. 부정직한 행동에 대한 개인적 책임도 중하지만 양적인 실적 중심의 평가 때문에 학문 전반의 질이 떨어진다. 다른 학자들에 의해서 인용 한번 되지 않는 시원찮은 논문들이 증가하는 것은 거기 들어간 시간과 노력, 연구비 등을 생각할 때 낭비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서 몇몇 교수 출신 인사들이 논문 표절 시비에 휘말렸다.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서 이런 기사들이 주는 충격과 신선함이 밋밋할 수도 있겠으나 대한민국 장관급 인사들의 논문 표절 시비는 심히 망측하다. 그 교수들이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이 서글프지 않은가?
 
학자와 논문, 그리고 정직
 
논문 출판은 학자의 삶 그 자체이다. 연구가 주업인 과학자가 자신의 땀과 노력의 결과를 담아내는 결정체가 바로 연구논문이다. 내가 진두지휘하고 감독하는 한편의 드라마인 것이다. 한 편의 논문이 출판되기에는 뼈를 깎는 산고가 치뤄진다. 함께 연구한 공동저자들의 코멘트와 비판들을 일일이 수렴해서 논문을 완성해야 한다. 학술지에 제출한 뒤에는 정해진 심사위원이 걸고넘어지는 모든 문제들을 하나하나 방어하고 수정해서 논문을 통과시켜야 한다. 그러고 나면 편집과정을 거쳐 드디어 논문이 출판된다. 분야마다 다르겠지만, 논문의 제출부터 출판까지는 보통 수개월이 걸린다. 물론 논문을 쓰기 전, 결과가 나오기까지의 훨씬 긴 연구과정은 계산에 넣지도 않았다. 그렇게 한 편의 논문이 완성되어 출판될 때의 기쁨은 말할 수 없다. 한 명의 자식이 탄생하듯 논문은 연구자의 보람과 자랑이며 그 삶의 열매다.
 
왜 표절과 조작을 해서라도 논문을 내려는 것일까? 이 질문은 왜 사기를 쳐서라도 돈을 벌려는 것일까라는 질문과 궤를 같이 한다. 하지만 논문 표절과 조작은 결국 학자로서 쌓은 모든 것을 잃게 하는 첩경이다. 표절과 조작은 옆집의 아이를 훔쳐오거나 그럴 듯하게 만들어 놓은 인형을 내가 낳은 아이라고 속이는 것과 같다. 표절과 조작이 분명히 드러난다면 학자로서의 신뢰는 무너지고 학계에서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어진다. 몇 년 전, 황우석 박사의 논문 사건이 터졌을 때 분명한 논문 조작임에도 불구하고 황우석 교수를 지지하는 여론이 있음을 보고 무척 당황스러웠다. 물론 정직에 문제가 있더라도 경제가 더 중요하다는 국민들에게는 황우석 박사가 가져다 줄 것만 같은 핑크 빛 미래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했으리라. 그러나 논문 조작은 과학계에서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는 범죄이다. 그것은 학문이 발전하는 근본 체계를 무너뜨리려는 반역에 해당된다. 어떤 일이든지 콘텍스트를 살펴보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표절과 조작의 문제는 콘텍스트와 무관하게 결코 용납될 수 없다. 속 빈 실적을 얻고 신뢰를 잃는 이런 바보같은 짓이 학계에 만연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크리스천 학자들에게 요구되는 거룩이야말로 이런 부분에서 구별되는 것이 아닐까? 
 
현명한 사람들은 배와 배꼽의 크기를 잘 판단한다. 배보다 배꼽이 크면 과감히 포기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배꼽은 배에서 떼버릴 수 없다. 떼어 낼 수 없다면 결국 배와 배꼽을 함께 포기해야 한다. 만 원짜리 생일선물을 보내는데 항공운송비가 삼만 원이 든다면 아예 현금을 보내 주는 것이 낫지 않은가? 오래 전에 차를 폐차한 적이 있다. 접촉 사고가 났는데 100만 원도 되지 않았던 차 가격에 비해 수리비가 더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물론 그 차를 꼭 다시 타고 싶다면 비싼 수리비를 냈을 것이다. 굳이 배를 지키겠다면 그보다 더 큰 배꼽의 대가를 감당해야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지 분명히 따져보아야 한다.
 
진리를 찾아라

 
 
 
 
몇 주 전 캘리포니아 대학 산타바바라에서 베리타스 포럼이 열렸다. 진리라는 뜻을 가진 이 포럼은 1992년에 하버드 대학에서 시작되어 미국의 각 대학 캠퍼스를 돌며 열린다. 주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와 토론이 기획된다. 이번 포럼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진화, 창조, 혹은 양쪽 다?”라는 제목의 토론이었다. 두 명의 외부 크리스천 학자와 회의론자들을 대표하는 두 명의 과학자가 각각 발표를 했다. 그 중 한 사람이 휴 로스 박사였고 사실 그 때문에 토론회에 갔다. 상반된 입장이 진지하게 전개되면서 결국 양쪽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하나씩 드러났다. 선택은 청중들의 몫이었지만 나름대로 훌륭한 설명과 함께 각각의 요리가 제시된 것이다.
 
휴 로스 박사는 토론토 대학에서 천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연구 활동을 하다가 신학으로 전공을 바꾼 뒤에  ‘Reason to Believe’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하는 변증가다. 십여 년 전 한국에서 석사과정 학생이었을 때 그의 저서들을 접했었다. 특히 <창조와 시간 (Creation and Time)>은 지구와 우주의 연대 문제로 고민하던 내게 성경해석과 신학의 다양함을 일깨워 주었고 천문학에서 말하는 백억 년이 넘은 우주를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일과 모순되지 않음을 확인해 준 책이었다. 휴 로스 박사는 지구의 나이를 만 년 정도로 젊게 보는 미국창조과학회의 입장과는 달리 지구가 백억 년 이상 오래되었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그는 인간이 진화되었다는 점은 부정하는 소위, 오랜지구론(old-earth theory)자다. 그러니까 오랜지구론은 하나님이 진화라는 방식을 통해 생물들과 인간을 창조했다고 보는 유신론적 진화론 (theistic evolution)의 입장보다는 보수적이고 과학을 부정하는 창조과학회의 젊은지구론 (young-earth theory)보다는 진보적이라고 하겠다.
 
더불어서, 그는 신의 창조를 과학으로 지지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이런 점은 창조과학운동이나 지적설계운동의 흐름과 궤를 함께 한다. 창조라는 가설을 바탕으로 과학적 모델을 세우고 이 모델이 무신론의 가설 위에 세운 모델보다 더 타당함을 보임으로써 창조를 지지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핵심 주장이다. 물론 이런 입장은 창조과학이나 지적설계가 과학에 기대는 것과 마찬가지로 위험하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기존의 과학을 비판하지만 한편으로 자신들의 과학을 통해 신의 창조에 대한 지지를 끌어내겠다는 이런 접근방식에는 가까운 길을 두고 먼 길로 돌아가는 듯한 불편함이 있다. 단순화해서 말한다면 과학이 밝혀내는 내용(가령, 생물들의 진화)을 하나님이 하신 일들로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새로운 과학 (가령, 지적설계론이나 창조모델)을 만들어서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변증하겠다는 방식은, 한편으로는 과학주의를 배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주의에 빠지는 듯한 인상을 준다. 창조과학, 지적설계, Reason to Believe의 전략이 갖는 위험성에 대해서는 보다 긴 논의가 필요하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휴 로스 박사와 같은 오랜지구론자들이 있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창조과학자들은 지구의 나이가 만 년이라는 믿음과 하나님은 진화라는 방식을 사용하지 않으셨다는 믿음, 두 가지를 갖고 있다. 창조과학자들이 이 두 가지 믿음을 한꺼번에 버리는 일은 엄청나게 어렵다. 하지만 그 중에서 첫 번째 믿음만 버려도 되는 중간적 입장이 바로 휴 로스 박사와 같은 오랜지구론자의 입장이다. 최소한 첫 번째 믿음은 버려야만 우리가 섬겨야 할 세상과 대화가 가능해지는데 그런 면에서 오랜지구론자들의 존재는 바람직하다.   
 
배보다 배꼽이 큰 창조과학
 
국내의 창조과학운동은 교계에서 거의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창조과학회에 속한 많은 분들이 헌신적으로 창조과학 세미나를 열어 복음을 변증한다. 이분들의 복음에 대한 열정은 높이 산다. 그러나 감히 말하건대 창조과학 활동은 복음에 득이 되기보다 실이 된다는 것이 나의 소견이다. 그리고 창조과학이 복음에 득이 되기보다 방해가 된다는 것을 한국교회가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다. 창조과학이 복음에 방해가 되는 이유는 대부분의 과학을 부정함으로써 복음이 들어갈 문을 닫아버리기 때문이다.
 
창조과학회는 지구의 나이를 만 년으로 주장하는데 그 聆揚?창조 기사에 대한 극단적인 문자적 해석에 근거한다. 극단적 해석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창조과학회의 해석을 많은 성경신학자들이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서는 이번 호 특집에서 한 꼭지가 다루어 질 것이다. 성경을 극단적으로 해석하는 일 자체는 복음에 크게 실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문제는 그 성경해석이 과학을 부정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한국창조과학회가  전통적으로 지지해 온 젊은지구론은 지구의 나이가 46억 년 가량 되었다는 지질학의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창조과학회는 천문학의 근간이 되는 빅뱅 우주론을 부정한다. 천문학에 의하면 우주는 140억 년 가량 전에 시작되었다. 하지만 지구와 우주의 나이를 만 년 정도로 보는 것이 창조과학회의 입장이다. 창조과학회는 진화이론을 부정한다. 그러나 생물학은 생물들이 공통 조상에서 분화되어 왔음을 보여준다. 창조과학회의 이런 무모한 주장들은 과학자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그리고 그 과학자들 중에는 물론 대다수의 크리스천 과학자들이 포함된다.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역사가 광대한 시공간에 이루어졌음을 음미하며 연구하는 크리스천 과학자가 어떻게 그 역사를 만 년 안에 가두는 일에 찬성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알기로 이런 주장을 하는 한국의 창조과학자들 중에 지질학, 천문학, 생물학 등의 분야에서 논문을 내며 연구하는 학자는 거의 없다.
 
혹자는 우주와 지구의 나이에 대한 창조과학회의 공식적 입장이 없다고도 한다. 글쎄다. 벤쿠버 세계관 대학의 양승훈 교수는 2006년에 <창조와 격변>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양승훈 교수는 아마도 휴 로스 박사와 비슷한 오랜지구론의 입장으로 보인다. 이 책의 출판으로 오랜지구론의 입장이 국내에서 대두되는 것이 반가웠다. 반면, 창조과학회는 지구의 나이가 오래되었음을 제시한 이 책의 내용이 자신들의 입장과 다르며 지구의 나이는 젊다는 것이 한국창조과학회의 공식적인 입장임을 재확인했다. 
 
창조과학이 복음에 방해가 된다는 주장이 너무 과한가? 자, 이런 상상을 해보자. 어느 신실한 크리스천이 복음을 믿으라고 하면서 동시에 지구는 평평하다고 주장한다면 어떨까? 당신은 그 복음을 믿겠는가? 물론 지구가 평평하다는 허황된 주장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복음이 뒤집히는 것은 아니다. 그를 통해서도 복음은 분명 전파될 수 있다. 지구가 평평한지 아닌지에 별 관심없는 사람이 복음에 대해 자세히 듣는다면 성령의 역사를 통해 그가 회심할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문제는 지구가 평평하다는 주장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내용을 들어보지도 않고 귀를 막아버릴 것이라는 데 있다. 현대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지구의 나이가 만 년이라는 창조과학회의 주장은 지구가 평평하다는 주장과 별반 차이가 없다. 지구가 젊다는 창조과학회의 주장은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긍정적으로 들어 볼 기회조차 박탈한다. 창조과학회가 무신론과 싸우는 일은 복음을 위한 일이다. 그러나 잃는 것이 너무 많다. 복음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나 믿는 것으로 전락해 버렸다. 배보다 배꼽이 너무 크다.
 
창조과학의 주장이 기독교의 유일한 목소리는 아니다. 복음을 믿기 위해서 지구가 젊다는 주장을 꼭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창세기의 해석에도 다양한 견해가 있고 지구의 나이나 인간의 진화 이슈에 대해서도 복음주의 안에 다양한 목소리가 있다. 창조과학의 입장은 크리스천이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입장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라면, 득보다 실이 많은 창조과학의 입장을 고수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하는 크리스천 과학자들을 설득할 답변은 없다. 창조과학회가 그 입장을 고수하는 것은 역사적 이유로 보인다. 시작부터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극단적 문자해석으로 문제를 안고 있던 미국의 창조과학운동이 한국에 수입되었고, 과학자와 신학자들을 포함한 전문가들에 의한 비판적 점검없이 긴 세월을 아마추어리즘으로 흘러왔다. 이제는 그 커다란 몸집을 바탕으로 외부의 비판적 목소리에 아랑곳 하지도 않는 것은 아닌가?
 
<블랙 호크 다운>이라는 영화가 있다. 작전을 나간 헬리콥터가 추락하면서 포위된 미군들을 구출하기 위해서 점점 더 많은 지원군을 보내게 되고 결국 막대한 사상자를 낸 치욕스런 작전이 된다는 줄거리다. 아예 처음부터 고립된 소수의 미군들을 포기했더라면 사상자가 훨씬 적었을 수도 있었겠다. 물론 그런 선택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아무리 배꼽이 커도 배를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한국창조과학운동은 어떨까? <블랙 호크 다운>에서는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결국 귀환에 성공하지만 창조과학 운동의 앞길은 그렇게 희망적이지 않다. 창조과학회가 진정으로 복음에 실이 되기보다 득이 되기 위해서는 대대적인 수술이 필요하다. 크리스천 전문과학자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성경신학자들의 넓은 시각을 수용해야 한다. 복음을 위해 목숨도 버리는데 조직의 기득권은 버릴 수 없는가?
 
배보다 배꼽이 큰 창조과학, 복음을 위해 과감히 버려라.

필자소개
캘리포니아 대학 산타바바라의 물리학과에서 거대블랙홀에 대해 연구 중이며 국제학술회의/국제학술지 논문발표, 논문 심사, NASA 우주망원경들의 프로포잘 리뷰 등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한국에서는 IVF와 기독교학문연구소를 섬겼고 미국에서는 코스타를 섬기고 있다. 기독과학자들의 모임인 American Scientific Affiliation의 멤버. <복음과상황>과는 98년부터 필자로 관계를 맺었고 창조―진화 논쟁과 지적설계 논쟁, 그리고 신앙과 과학에 관련된 글들을 기고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