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고민하다

[추천사] 공부하는 그리스도인 (IVP) - 학문적 신실함이라는 무모한 생각

별아저씨의집 2009. 12. 16. 23:03

공부하는 그리스도인 -  IVP 2010년 출간


The Outrageous Idea of Academic Faithfulness:
A Guide for Students  
by Derek Melleby and Don Opitz





추천사  우종학


짧지 않은 세월동안 대학에서 공부하고 일하면서 나는 두가지 종류의 기독교인 학생들을 보았다. 하나는 스펙을 쌓는 자, 다른 하나는 스펙을 포기한 자 이다. 여러분이 현재 대학생이라면, 직업훈련학교 대학에 온 것을 환영한다. 그렇다. 교육과 학문을 추구하던 대학은 좋은 스펙을 갖추고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한 직업훈련학교로 전락해 버렸다. 진리를 추구하는 학생은 음… 잘 보이질 않는다. 보장된 미래를 줄 것 같은 의대/법대 같은 대학원진학에 도움이 되는 과목들, 취직을 위해 학점관리에 유리한 과목들은 인기를 얻는 반면, 드넓은 우주와 세상, 그리고 역사를 보며 나는 어떻게 인생을 살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할 만한 과목들은 별로 인기가 없다. 경제력이 모든 기준의 척도가 된 사회, 대세를 따르지 않으면 손해볼까봐 불안한 사회에서, 대학생들의 스펙 쌓기는 당연한 생존목표가 되어버렸다. 그리스도인 학생들, 더 심하면 심했지 덜 하지 않다. 더군다나 그들에게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 스펙쌓기를 한다는, 정말 주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나를 위한 것인지, 자신도 판단키 어려운 거룩한(?) 동기도 있지 않은가? 이렇게 물어보자. 당신은 대학졸업 후에 무엇을 갖게되기를 바라는가? 좋은 직장? 훌륭한 배우자? 그렇다면 다시 한번 환영한다. 직업훈련학교 대학에 온 것을. 

다수는 아니지만 또 한 부류가 있다. 바로 스펙을 포기한 자들이다. 모든 세속적인 것들은 십자가의 불길에 던져 태워버리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고 교회와 공동체에만 헌신한 자들이다. 학점에 관심을 갖고 좋은 직장을 바라고 학문을 추구하는 것은 주님의 나라를 위해 버려야 할 하찮은 것들이라고 당차게 생각하는 자들이다. 하지만 세속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 자연세계와, 국가들의 관계와 사회구조와 학문과 문화예술에 주께서 관심을 가지신다면 어쩔 것인가? 결국 다 주님의 창조물인데 어찌 주께서 좁은 교회안의 일들만 관심을 갖고 계신다고 판단한 것일까? 

 오래된 얘기지만 대학에 들어가면서 나는 무척 혼란스러웠다. 고등학교 때까지 순진하게 믿었던 '사실'들은 흔들렸고 과연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까지가 가짜인지를 가늠하는 일에 대학시절의 절반을 소비했다. 우리나라의 역사가 그랬고 우주의 역사가 그랬고 그리고 기독교 신앙이 그랬다. 그때에도 한편에는 남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공부만 하는 이기적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님만 바라보고 공부하지 않는 평안하고 게을러 보이는 학생들도 있었다. 물론 다수는 그 중간 어디쯤에 있었겠지만, 공부를 열심히 해도 괴로왔고 하지 않아도 괴로왔다. 기독학생운동에 온통 시간을 빼앗기는 나를 과친구들은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았고, 전공에 하나님의 뜻이 있으니 총무로 헌신하지 못하겠다는 내 답변에 공동체의 리더들은 실망하는 눈치였다. 결국, 기독교 세계관을 공부하면서 얻은 답은 그것이었다. 신실하게 학업을 하라. 그래, 이기적으로 학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 하듯, 신실하게 학업을 하라. 

정말 주님께서 내가 무슨 수업을 듣고 어떻게 공부하는가에 관심을 가지실까? 내가 하루 8시간, 대부분의 시간을 투자하는 학업(직장생활도 마찬가지다)에 주님께서 별 관심이 없으시다면 당장 때려치우고 말지, 왜 계속 하는가? 그래도 대학은 나와야 밥을 먹고사니까? 하늘의 새와 들의 꽃도 먹이고 입히시는 주님을 믿으면서? 이 책의 핵심주장은 "하나님이 우리의 학업에 지극히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렇다. 주님은 창조계의 반쪽만 소유하신 분이 아니다. 교회 안에서만 살아 계신 분이 아니다. 그분은 세상 전체의 주인이시며 타락하고 어그러진 영역들에 지극한 사랑과 관심을 쏟고 계시는 분이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끊임없이 지켜보시고, 그런 훈련을 하는 하나의 과정인 대학에서의 교육, 학업에 지극한 관심을 갖고 계신다. 

 사실 대학교육은 무척 중요하다. 세상에 제대로 눈을 뜨는 시기인 20대 초반에 우리는 특정한 사고방식을 배우고 특정한 생활방식을 익히게 된다. 그리고 많은 경우, 그 방식들이 이후 인생을 좌우한다. 대학에서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삶의 모습들을 보면서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지, 이런 질문 자체가 의미가 있기는 한 것인지 묻게 된다. 서로 모순된 그러나 권위있는 주장들을 들으며 우리의 정신은 알게모르게 분열을 겪는다. 신은 죽었으니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까라마조프 식의 메시지가 던져지고 그 우산 아래서 쾌락을 좇는 방탕한 삶도 보인다. 돈으로 모든 것을 살 수 있다, 벌어라, 억만장자가 되라는 메세지는 시도때도 없이 우리를 자극한다. 돈복음의 예화로 사용되는, 누구는 어떤 직장을 잡아 어떻게 돈을 벌었다더라는 성공담이 즐비하다. 인생은 결국 자연의 역사속에서 우연히 왔다가는 무의미한 존재일 뿐이라는 냉소적이고 허무한 메세지가, 어두운 밤 외로운 기숙사 방에 불쑥 찾아와 헤어날수 없는 우울과 슬픔에 밤을 지새게 하기도 한다. 결국 누구를 만나 어떤 영향을 받는가를 통해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이 정해진다. 그러나 잘못된 세계관을 갖게되면, 불량품 안경을 쓰게 되면, 세상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그 안경너머의 세상은 희미하고 혼란스러울 뿐이다. 대학이 전쟁터인 것은 사실, 까딱 잘못하다간 평생 불량품 안경을 쓰고 살아야 할 위험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학업에 관심을 갖고 계신 이유, 그리고 우리가 학업에 지극히 신경을 써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4년의 대학생활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시기는 인생의 첫단추를 끼우는 단계다. 이 책은 그 방향성을 제시해주는 입문서다. 저자들의 주장처럼 기독대학생들이 추구해야 할 가치는 바로 "신앙과 학문의 통합"이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창조영역을 연결하는 지혜와 통찰을 추구하는 것"을 신앙과 학문의 통합이라고 정의한다. 학문의 세계가 워낙 넒고 신앙의 내용이 광범위하기 때문에, 사실 신앙과 학문의 통합이라는 말은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으며 여러 오해를 불러 일으킬 소지도 있다. 그러나 이 말은 꼭 학문을 뭔가 기독교적으로 만들라는 말은 아니다. 기독교적으로 축구하기, 혹은 기독교적 김밥이 말이 되지 않듯, 신앙과 학문의 통합은 단지 제 3의 뭔가를 만들어내라는 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대학생들에게 해당되는 신앙과 학문의 통합의 의미는, 대학에서 가르치는 세속학문을 배우되 성경적 시각으로 비판적으로 수용하라는 의미에 가깝다. 이런 비판적 수용능력은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하루하루의 삶을 하나님 나라의 큰 흐름안에서 조망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준다. 

 학문의 밑바탕에 깔린 전제들을 끄집어 내고 그것을 비판하며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사라는 틀에서 재해석하는 비판적 수용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 과학분야를 예로 들어보자. 현대과학이 밝혀내는 결과들은 수용해야한다. 결국, 자연세계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요함으로 만들어졌고 자연세계를 연구한 과학의 내용들은 하나님의 지식이 아닌가. 그러나 과학자들이나 과학을 가르치는 교수들이 흔히 덧붙이는 해석들, 가령 자연법칙으로 설명되는 자연계에는 신이 없다와 같은 전제들은 걸러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주장들은 과학이 뒷받침해주는 내용이 아니라 하나의 전제, 혹은 해석일 뿐이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바로 이런 비판적 수용능력이다. 더 나아가 학자들에게는 기독교적 해석의 작업이 요구된다. 무신론자들이 끊임없이 과학의 결과를 해석하여 신이 없다고, 종교는 과학의 결과 앞에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때, 거꾸로 기독교 과학자들은 그런 과학의 결과는 신의 지혜에서 나온 것이라는 해석을 적극적으로 내놓아야 한다. 이런 해석작업을 끊임없이 하지 않는다면 결국 마크 놀이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달'에서 지적했듯이 과학분야에서의 기독교적 지성은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신앙과 학문의 통합은 단지, 어떤 이해력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보다 적극적인 의미에서 신선하고 놀라운 결과들을 나을 수 있다. 신앙을 가진 기독인들이 다양한 학문분야에서 탁월함을 보일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는 해방된 상상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기적인 자기중심성을 벗어날 수 있는 자유함, 남들이 모두 잘 나가기 위해 노력할 때 그런 자기중심성을 뛰어넘어 학문에 몰입할 수 있는 능력. 남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이기적인 동기로 학문을 추구할 때 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작품에 몰입할 때 더 나은 탁월함이 나올 수 있다고 믿는다. 결국 인간의 이기성은 우리의 눈을 흐리게하며 학문의 대상을 철저히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세상의 주인이시라면 그분의 시각을 가지고 세상을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세상을 창조하신 지혜의 주인이신 그분, 그 포도나무에 연결되어 끊임없이 지혜를 구할 때 우리는 넘쳐나는 상상력을 받을 수 있다. 연구가 막힐때 마다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할 때마다 나는 그분께 상상력을 구한다. 주시는 상상력을 통해 고비를 넘겼던 그런 경험이 어디 한두번이겠는가? 어디 나혼자만의 경험이겠는가?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듯이, 그분의 형상을 가진 우리가 창조의 상상력을 통해 탁월함을 이루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에 동참하는 일이다. 해방된 상상력은 복음의 능력이다. 

 학문적 신실함은 무모한 생각일 수 있다고 저자들은 지적한다. 그렇다. 스펙을 쌓는자들에, 그리고 스펙을 포기한 자들에게 학문적 신실함은 고리타분하고 케케묵은 소리같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로마서 12장 2절)"라는 말씀은 대세를 거스르고 무모함을 추구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지 않는가? 무모한 일이 가능하려면 무모할 정도의 노력이 필요하다. 분명, 희생이 따른다. 학문에도 충실하고 기독교세계관도 훈련하며, 신앙과 학문의 통합을 이루어 내려는 뼈를 깎는 노력, 쉽진 않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 책을 통해 어디로가야 할지 방향을 잡고 첫발을 내디딜 수 있을 것이다. 자, 준비가 되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