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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한 우주공간 그리고 우리동네 [월간 복음과상황 2003년 12월호]


우종학

집을 잃어버릴 위험이 높았던 어린 시절, 꼬불꼬불한 동네 골목을 거쳐 집으로 돌아올 때면 가끔씩 새로운 길로 가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저기로 가면 어디가 나올까? 내가 살던 작은 동네는 어린아이의 일상을 보내기에 충분히 컸지만, 가끔씩 그 경계에 다다를 때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대책 없이 솟아오르곤 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한참 새로운 길을 탐색하다 가도가도 끝없는 낯설음에 두려움이 들기 시작하면 조심조심 오던 길을 되짚어 집으로 돌아오던 기억... 집을 잃을 염려는 이제 없어졌다. 그 대신 다양한 방식과 세계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릴 염려가 새로 생겼다고나 할까. 미국 국립천문대가 위치한 애리조나 주의 사막이나 대형 망원경들이 자리잡고 있는 칠레 북부로 관측 여행을 갈 때면, 시카고나 달라스 혹은 마이애미 같은 공항에서 비행기를 갈아탄다. 공항에 앉아 수없이 뜨고 내리는 비행기와 북적대는 사람들을 보면 지구가 참 좁다는 생각이 든다. 지구촌이 점점 작아지는 걸까?

보이져, 태양계를 벗어나다.

지난 1977년 미항공우주국(NASA)은 쌍둥이 우주탐사선인 보이져(Voyager) 1, 2호를 발사했다. 태양계의 바깥쪽 식구들인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을 탐사하라는 명령을 받은 무인 우주탐사선 보이져 1, 2호는 70년대 후반과 80년대를 거치면서 차례차례 이 행성들을 방문했다. 흥미진진한 33,000장의 사진자료들을 통해 밝혀진 목성의 소용돌이 붉은 반점이라든가 토성의 띠의 구조, 그리고 목성의 달 중 하나인 이오(Io)의 화산폭발 등은 태양계의 비밀들을 밝혀낸 보이져의 혁혁한 성과였다. 지난 26년 동안 135억 킬로미터를 항해한 보이져는 현재, (태양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행성인) 명왕성보다도 약 2배나 먼 지점까지 날아갔다. 이제는 태양계를 벗어나서 끝없는 별과 별 사이의 공간에 발을 딛기 시작한 셈이다. 혹 우주공간 어디선가 만날지도 모를 외계의 지성체(외계인)들에게 보내는 55개의 언어로 된 인사말과 동서양의 다양한 음악, 그리고 지구의 위치를 알리는 정보 등을 담고 있는 보이져 우주탐사선은 태양계를 벗어난 인류 최초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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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보이져 1호와 2호의 궤도. 태양을 중심으로 목성(Jupiter), 토성(Saturn), 천왕성(Uranus), 해왕성(Nepune)의 궤도와 함께 보이져 1, 2호의 자취를 그렸다. 행성 이름 밑의 날짜는 보이져가 각 행성을 방문한 시기이다. 나사의 웹사이트에서 보이져 항해를 요약한 플래쉬 영상을 볼 수 있다.
http://voyager.jpl.nasa.gov/window/voyager_ad.htm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보이져가 그렇게 넓은 세상에 나간 것은 결코 아니다.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별만 하더라도 빛의 속도로 3년이 넘게 걸리는 거리에 떨어져 있는데 보이져의 속도로 간다면 만년이 훨씬 넘게 걸린다. 밤하늘에 보이는 수천 개의 별 중에서 가장 가까운 별 하나에 도달하기까지가 그렇게 요원하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보이져가 밟은 공간은 여전히 우물 안인 셈. 태양 이외에 다른 별을 방문한다는 건 아직 불가능하다.

우리 눈에 보이는 6000천여 개의 별을 비롯해서 약 2000억 개나 되는 별이 우리은하에 살고 있다. 은하는 우주를 구성하는 기본단위라고 할 수 있는데 수많은 별과 가스가 중력으로 묶여서 하나의 집단을 형성한다. 우리은하 안에서 별과 별 사이의 거리는 엄청나게 멀다. 별의 크기를 포도 알에 비유한다면 별과 별 사이의 평균거리는 서울과 부산 간 거리쯤 된다. 태양이 포도 알만하다면 지구는 개미보다도 작고 인간은 아예 눈에 보이지도 않는 셈이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포도 한 알에서 시작해서 부산에 있는 포도 한 알에 이르기까지의 거대한 공간이 텅텅 비어있다는 사실은 어쩌면 상상하기 힘들만큼 적막하다. 이렇게 드문드문 분포하는 별을 2000억 개나 갖고 있는 은하의 크기를 한번 상상해 보라. 어두운 곳을 찾아 산책을 나가서 직접 별을 마주하고 한번 우주공간을 느껴보는 것도 괜찮을 듯 싶다. 그러나 얘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전체 우주의 스케일에서 보면 천억 개 단위의 별이 살고 있는 은하 하나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우주에는 이런 은하가 백억 개도 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우주공간은 얼마나 넓은 것일까?

우주론의 혁명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크기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변해왔다. 아담했던 우주의 크기는 점점 넓어져 이제는 그 거대한 공간의 의미를 다 가늠하기 어려워졌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구의 모든 물질이 흙, 물, 공기, 불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가장 무거운 흙은 땅을 이루고 두 번째로 무거운 물이 그 위를 덮으며 가벼운 공기와 불은 땅과 물 위에 존재한다. 지상의 모든 물질은 이 네 가지 원소가 적절히 배합되어 생성된다. 그럴듯하다. 그러나 하늘의 별이나 태양과 달은 달랐다. 이들은 지상의 네 가지 원소들과는 다른 제 5의 원소에 의해 만들어졌다. 불변하는 하늘의 대상들이 지상의 물질로 만들어졌을 리가 없다는 논리이다.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을 토대로 2세기의 톨레미는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과 행성들이 공전하는 우주론을 완성했고 이 이론은 행성들의 움직임을 잘 예측하면서 천년 이상 지속되었다. 또한 톨레미의 우주론은 중세까지 서구를 지배했던 로마카톨릭과 조화를 이루었다. 하늘의 대상들이 운동을 하려면 뭔가 첫째 원인(prime mover)이 있어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은 신의 존재를 철학적으로 뒷받침했고 기독교신학에 자연스레 섞여 들어갔다.

그러나 톨레미의 지구중심 우주론은 도전 받기 시작한다. 16세기에 들어서면서 이 우주론이 예측하는 화성의 위치는 실제 관측과 크게 빗나가기 시작했다. 원래 틀린 모델이 처음에는 잘 맞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오차가 커진 셈이랄까. 이에 반해 코페르니쿠스는 태양 주위를 행성들이 공전하는 태양중심모델을 제시했고, 갈릴레오는 태양중심 우주론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망원경이 막 발명된 그 시절, 갈릴레오는 역사상 처음으로 망원경을 이용해 밤하늘을 관측하기 시작했고 완벽해야 할 하늘의 대상인 태양이 흑점을 갖고 있다거나 달 표면은 곰보투성이의 분화구들로 덮여있음을 발견했다. 아울러 목성이 지구처럼 달을 (그것도 4개씩이나) 갖고 있다는 사실과 초승달, 반달, 보름달을 거치는 달처럼 금성도 위상의 변화를 갖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우주론의 첫 번째 혁명은 톨레미의 지구중심 우주론을 무너뜨리며 이렇게 시작되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을 수용했던 당대의 신학과 부딪히며 아픈 역사를 낳았다.

우주론의 두 번째 혁명은 1920년대에 발생했다. 20년대의 대논쟁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유명한 두 천문학자 사이에서 일어났는데 우리은하 밖에 다른 은하들이 존재하는가에 관한 것이었다. 밤하늘에는 수많은 별들 이외에 구름덩어리 같이 희미한 대상들을 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안드로메다 성운을 꼽을 수 있다. 이 성운들이 우리 은하 안에 살고 있는 별과 가스의 덩어리인지 혹은 우리 은하 밖의 먼 곳에 존재하는 독립된 또 하나의 은하인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두 입장의 중요한 차이는 결국 우주의 크기와 관련되었다. 다른 은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던 샤플리(Shapley)는 우주의 크기를 작게 생각했던 반면, 우리은하 외부에도 섬처럼 또 다른 은하들이 존재한다고 보았던 커티스(Curtis)는 그보다 훨씬 큰 우주의 크기를 제시했다. 그러나 그 날 결론이 날수는 없었다. 성운까지의 거리를 잴 뾰족한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몇 년이 채 되지 않아 허블(Hubble)은 그 당시 최대의 망원경으로 제작된 윌슨산 천문대의 지름 2.5미터 망원경을 이용해서 우리은하에 존재하는 특별한 종류의 별(주기적으로 일정한 밝기 변화를 갖는 세페이드[Cepheid] 변광성이었다)을 안드로메다 성운에서 찾아냈다. 그리고 그 밝기를 재어서 우리은하의 별들과 비교했다. 같은 밝기를 갖는 별이 얼마나 어두워졌는지를 측정함으로써 거리를 잴 수 있었던 것이다. (똑같은 전등 빛도 거리가 멀수록 어두워진다는 원리) 그 거리는 놀랍게도 우리은하의 크기를 훨씬 능가하는 엄청난 값이었다. 이렇게 우주론의 두 번째 혁명은 우리은하가 외톨이가 아니며 또 다른 은하들이 존재한다는 것과 우주는 그만큼 넓다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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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우리은하로부터 약 200만 광년 떨어진 안드로메다 은하. 수천 억 개의 별과 엄청난 양의 가스가 쟁반모양을 이루고 있는 안드로메다 은하는 우리은하와 매우 비슷하다고 알려져 있다. 중심의 밝은 부분은 수많은 별빛이 모아져서 하나의 공처럼 보인다. 두 번째의 우주론 혁명을 통해 안드로메다는 우리은하 밖에 존재하는 또 다른 은하라는 것이 밝혀졌다. Credit & Copyright: Jason Ware

세 번째 우주론의 혁명은 같은 인물인 허블에 의해서 20년대 말에 시작되어 60년대까지 이어졌는데 그것은 불변하는 정적인 우주가 팽창하는 동적인 우주로 바뀌는 혁명이었다. 아인슈타인이 발표한 일반상대성 이론은 중력이 지배하는 우주가 불변할 수 없으며 팽창하거나 수축해야한다는 이론적 근거를 제시했고 허블은 먼 은하들이 움직이는 속도를 측정함으로써 우주가 실제로 팽창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비디오를 거꾸로 돌리듯이 팽창하는 우주의 모습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우주는 매우 작은 공간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이론과 관측으로 제시된 것이었다. 우주가 대폭발을 통해 시작되어 그 이후 계속 팽창해 왔다는 빅뱅우주론은 이런 맥락에서 제시되었다. 빅뱅우주론은 대폭발 당시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는 우주배경복사(cosmic microwave background)를 예측했는데 1960년대 중반, 펜지아즈와 윌슨은 우연히 이 배경복사를 발견한다. 자신들이 사용하는 전파망원경의 잡음을 제거하려던 이들은 이 잡음이 바로 우주배경복사임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우주배경복사라는 관측 증거를 갖게된 빅뱅우주론은 정적인 우주를 동적인 우주로 영원히 바꾸어놓았고 우주는 영원 전부터 존재했고 무한히 크다는 우주론은 유한한 시공간을 갖는 우주에 의해 대체되었다.

우주론의 혁명은 지금도 계속된다. 지난 달에 소개한 암흑에너지 우주론을 네 번째 혁명으로 볼 수도 있다. 우주의 크기에 대한 혁명은 대략 세 번으로 마무리되었지만 우주의 성분에 대한 혁명은 앞으로 더 일어날지도 모른다. 아직 규명되지 않은 암흑에너지가 우주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새로운 관측결과는 21세기의 문턱에 선 우리들에게 새로운 우주론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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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인류가 찍은 가장 먼 우주의 모습. 흔히 HDF(Hubble Deep Field)로 알려진 이 우주의 한 모퉁이는 현재까지 인류가 찍은 가장 먼 우주의 모습을 보여준다. 탁월한 선명도를 자랑하는 허블 우주망원경의 카메라를 통해 총 10일 가량의 노출시간을 투자해서 찍은 이 사진에 보이는 대상들 하나하나는 그림 2에서 본 것과 같이 수많은 별을 거느린 은하들이다. 이 사진에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장 희미한 별보다 40억 배나 어두운 은하들이 담겨있는데 그 거리는 백억 광년(빛의 속도로 백억 년 걸리는 거리)이 넘는다. 우주공간은 말 그대로 수많은 은하들로 가득 차 있다. 칼라 사진은 다음의 웹사이트에서 볼 수 있다.

(http://sprite.phys.ncku.edu.tw/~astrolab/mirrors/apod_e/ap020901.html) Credit: R. Williams & The HDF Team (NASA) 

변하는 우주론 불변하는 신앙

21세기에서 과거를 돌아보는 우리에게는 각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우주론의 변화에 어떻게 반응했을까가 궁금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이 기독교신학에 받아들여진 초기에는 그의 우주관과 성경의 대립 때문에 고민하던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가령, 하늘에 물로 된 층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성경구절(시편 148편 14절)은 물이 공기보다 무거워 공기 아래 존재해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과는 대립된다. 우주론의 첫 번째 혁명이 일어날 즈음에는 코페르니쿠스의 우주론을 많은 당대의 신학자들이 비웃었다. 해가 지지 않아 아모리 족속을 대파했던 전쟁을 묘사한 성경(여호수아서 10장)을 보면 여호수아가 머물러 있으라고 명령한 것은 태양과 달이지 지구가 아니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루터는 지구가 움직인다는 태양중심 우주론이 말도 되지 않는다고 여겼다. 빅뱅우주론이 나오기 전, 우주는 무한하다는 우주론을 제시했던 뉴턴은 우주의 시공간을 신이 자신의 창조세계를 인지하는 중추신경으로 여겼고 신이 무한하기 때문에 시공간, 즉 우주도 무한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들의 생각은 옳았을까? 물론 이들의 생각은 다 틀렸다. 오늘날 과학자들이 믿는 우주는 이들이 생각하던 우주와는 너무나 다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들의 접근방식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새로운 과학의 결과는 신앙을 위협하는 것일까?

성경본문에는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문화와 철학이 반영되어 있는 것처럼 그 당대의 과학도 반영되어 있다. 바울은 고대 그리스의 우주관을 배경으로 자신이 셋째 하늘에 올라간 환상을 묘사했으며 스페인을 땅 끝으로 여겼던 당시의 지리학을 토대로, 초대교회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 땅 끝인 스페인까지 복음을 전하려 했다. 여호수아는 지구가 자전한다는 사실을 모종의 영적인 능력(?)으로 깨달아서 ‘지구야 회전을 멈추어라’고 명령한 것이 아니라, 당대의 사람들이 믿었던 대로 움직이는 태양에게 기브온 골짜기에 머무르라고 명령했다.

각 시대의 과학관이 성경본문에 반영되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성경이 과거의 특정한 과학관을 반영한다고 해서 그 과학관이 옳다고 볼 수는 없다. 성경의 인물들이 태양이 지구주위를 돈다고 믿었다거나 불변하는 하늘(우주)을 믿었다고 해서 그 믿음이 과학적으로 옳을 수는 없다. 그것은 일부다처제 사회였던 당시의 문화가 성경본문에 반영된다고 해서 일부다처제가 옳은 제도라고 주장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성경이 계시하는 것은 과학이 알고 싶어하는 세부사항이 아니다. 그것은 변화되는 우주론이 다루는 우주의 창조주가 누구인지 그리고 이 거대한 우주공간을 운행하는 분이 누구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신학은 변하는 우주론에 따라 변해왔다. 특정한 신학을 따르는 교회가 특정한 우주론을 지지할 수 있지만 그것이 그렇게 유익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우주론은 과학의 발전에 따라 변화해 갈 것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한 시대의 과학적 결론이 반영된 신학을 가지고 과학의 연구방향을 제한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위험스럽기까지 하다.

이런 질문도 있을 수 있다. 과거의 잘못된 과학이 반영된 성경이 묘사하는 창조주는 지적으로 불성실한 것이 아닌가? 글쎄다. 사람들의 사고나 믿음이 각 시대의 과학으로 제한된다하더라도 창조주의 역할마저 제한되는 건 아니다. 가령, 백년 전에는 심한 두통이 소화불량에서 비롯된다는 과학적 결론이 지배적이었다고 가정해보자. 두통을 앓던 한 그리스도인이 그 시대의 과학지식이 가르쳐주는 대로 소화가 빨리 되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다면 그 사람의 과학지식이 틀렸다는 이유로 창조주가 그 두통을 해결해 주지 않을까? 태양이 멈춰 서게 해 달라는 여호수아의 기도가 과학적으로 틀리기 때문에 ‘태양은 원래 서 있는 거야.’ 라면서 여호와 하나님이 팔짱만 끼고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신실하신 창조주는 당대의 과학관을 토대로 표현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소원을 어김없이 들어주셨다. 인간은 아무리 잘 해봐야 각 시대가 제공하는 과학지식의 총합을 넘어설 수 없지만 창조주는 그런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신다.

아, 이 엄청난 공간

조디 포스터가 주연한 영화 ‘칸택트’를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이 우주에 우리만 존재한 다면 그건 엄청난 공간의 낭비이다.’ 전 세계의 베스트셀러, ‘코스모스’로 유명한 칼 세이건의 마지막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과학과 신앙에 관련된 좋은 생각거리들을 제공한다. 아마도 과학자로서 칼 세이건 자신이 가졌던 과학과 과학의 한계를 넘어서는 진리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보이져가 탐색한 우리 태양계의 크기로는 명함도 못 내밀 만큼 어마어마한 크기의 은하, 더 나아가서 이런 은하들이 벽돌처럼 거대구조를 이루는 우주라는 집의 광대한 공간을 생각하면 ‘공간의 낭비’라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질 것도 같다. 언젠가 어느 기독교 게시판에서 그런 글을 본 적도 있다. 진지하게 신앙생활을 해온 것으로 보이는 어느 익명의 청년이 인생이 달린 문제라며 고민을 호소했다. 현대천문학의 결과들을 공부하다보니까 약 200억 광년이나 되는 이 거대한 우주가 도대체 왜 존재하는지, 우리 인류를 위해 태양계를 창조하신 것은 이해가 되는 반면 아무 필요도 없는 별들은 왜 만든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성경은 왜 이런 사실들에 대해 침묵하는지 기독교 신앙이 결코 완전한 진리체계가 못 되는 것은 아닌지, 그의 고민은 매우 다급하게 들렸다.

물론 이 질문에 명확한 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도대체 이 넓은 우주공간의 유익은 무엇일까?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이 질문은 단지 현대천문학의 결과에서만 던져지는 것은 아니다. 인류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아프리카의 기나긴 모래사막은 왜 만드셨을까, 존재 자체를 파악하기도 어려운 캄캄한 심해에 사는 희귀한 어류들은 왜 창조하셨을까...

나는 이 넓은 우주공간이 낭비가 아니라고 믿는다. 사실 태양계만 따져보더라도 인류에게 별 필요 없는 대상들이 있다. 해왕성이나 명왕성은 심지어 우리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우주가 인류를 위해서만 창조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것은 신-중심적인 사고가 아니라 너무나 인간-중심적인 생각이다. 우주의 모든 영역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그래서 필요 없을지도 모르는 개체가 아니다. 우주라는 집은 한 몸이며 그 각 구조가 서로서로 연결된 하나의 내러티브이다. 빅뱅을 통해서 시작된 우주는 지난 백억 년 이상의 시간을 거쳐 자라고 성숙하면서 수많은 은하들을 형성했고 그 이상의 별들을 탄생시켰다. 현재 우주의 거대한 공간의 크기와 나이는 은하와 별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던 독특한 팽창의 역사를 담고 있다. 몇 세대를 거친 별의 내부에서 생성된 탄소 같은 무거운 원소들은 행성들의 재료가 되었고 지구에 사는 동식물의 몸을 구성한다. 우주공간은 창조주가 작곡한 역동적인 생성 스토리를 생생히 담고 있는 작품이다. 비록 하나 하나가 웅대한 교향곡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더라도 밤하늘에 끊임없이 선포되는 우주의 노래는 창조주를 찬양하며 그의 영광을 선포한다. 물론 우리가 사는 작은 동네에서는 들을 귀 있는 자들만이 그 연주를 듣는다.
Posted by 별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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