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물리학자 존 폴킹혼의 신학적 종말론 (The theological Eschatology by John Polkinghorne the Quantum Physicist)
신준호 (현대와 신학, Vol.26 No.-, [2001])
신준호 (현대와 신학, Vol.26 No.-, [2001])
I. 서 론
존 폴킹혼은 영국 캠브리지(Cambridge) 대학의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쿼크, 글루온(Quark, Gluon) 등의 양자 물리학적 소림자들의 실체를 발견하는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양자 물리학자이다. 그는 캠브리지 대학 퀸스 칼리지(Queens College)의 학장을 역임하였으며, 영국 왕립 학술원의 정회원이 되었고, 1997년 왕실로부터 백작의 칭호까지 수여 받았다.
우리의 관심은 그가 영국 성공회에서 안수를 받은 사제이며 신학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에서 증폭된다. 그는 양자 물리학자로서의 과학적 전문지식에 기초하여 신학의 전통적 주제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현 시대의 자연과학과 신학 사이의 학제간의 대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 중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고 있다. 그는 1993년의 기포드(Gifford) 강연에 이어서 1997년 미국의 예일(Yale) 대학 주최의 테리(Dwight Harrington Terry) 강연에 초대됨으로써, 서구의 저명한 과학자들과 신학자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의 테리 강연의 내용은 과학시대의 신론(Belief in God in an Age of Science)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에 이미 소개되어 있다.1) 그 후 그는 독일 하이델베르크(Heidelberg)의 조직신학자인 미하엘 벨커(Michael Welker)와 함께 미국의 프린스턴에 있는 신학 연구소(the Center of Theological Inquiry, Princeton)에서 자연과학자, 성서신학자, 조직신학자, 윤리학자 등 l7명이 참여하는 학제간 대화의 모임을 1997-1999년까지 3년간 주도하였다. 그 모임의 주제는 "종말론"이었는데, 이 주제에 관한 다양한 학제간의 대화의 내용이 2000년에 단행본으로 출판되어 현재 미국에서 대단히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2)
이 글은 위의 책 안에서 폴킹혼이 직접 서술하는 종말론의 내용을 소개하면서, 폴킹혼의 자연과학적인 사고 체계가 신학적 관점에서 어떻게 수용되고 있는가를 밝히고, 부활에 관한 논의 안에서 폴킹혼이 전개하는 과학적 종말 사상의 핵심을 찾아보고자 시도하게 될 것이다.
II. 메타과학적(metascientific) 종말 이해의 비판
종말의 사물(the eschaton)에 관한 폴킹혼의 과학신학적 사고는 현대과학의 환원주의적인 제 결론들에 대한 비판과 함께 시작된다. 물리적 세계를 단지 기계적, 결정론적으로 이해하였던 20세기의 과학이 전환기를 맞고 있으며, 단순히 단편적으로 분석된 관찰의 결과들이 궁극적인 신뢰성을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은 굳이 폴킹혼의 글을 직접 인용하지 않아도 될 만큼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고 있다. 지난 시대의 과학은 방법론에 있어서 복잡한 실재를 조각으로 나눈 뒤, 관찰하고 분석하여 파악을 시도하는 환원주의(reductionism)를 채택하였다. 이 방법을 통하여 많은 가치 있는 통찰들이 발견되고, 그것들은 또한 20세기의 현실 세계 안에서 실용적으로 사용되었지만, 그러나 궁극적인 진리에 관한 한 그것들이 불충분하다는 사실은 널리 확신되고 있다. 환원주의적 인식 방법은 자연의 무한한 이야기들 중 단지 몇 조각의 부분들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의 새로운 인식론적 노력은 이와 같은 세계의 단편적 조각들만의 인식을 배격하기 시작하였다. 복잡한(complex) 실재를 부분들로 환원시켜서 인식하는 방법은 더 이상 어떤 학문의 분야에서 궁극적인 유효성을 획득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부정적인 분위기 안에서 폴킹혼은 환원주의적 인식 방법에 의한 세 가지의 대표적인 과학적 종말 이해를 예로 들고, 그것의 메타과학적인 해석을 비판함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형성한다. 우리는 이 비판을 먼저 이해하기로 한다.
1. 현대 과학의 무신론적 종말 이해
(1) 결정론적 물리 법칙에 의한 우주의 종말 : 가장 널리 알려진 과학적인 종말 이해는 엔트로피 법칙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에 근거한다. 그들은 태양과 같은 별들의 내부에 일어나는 핵융합과정들을 수학적으로 계산할 수 있으며, 그래서 대략 50억 년 후에는 태양이 수소 연료들을 소진하게 될 것이며, 붉은 거성이 되면서 부풀어오르는 별들의 진화의 단계가 펼쳐진다고 말한다. 이 때 지구는 자연스럽게 파괴될 것이며, 전체 우주는 영원한 팽창 혹은 최종적 응축 혹은 붕괴로써 소멸될 것이라고 추정된다. 우주의 종말은 영원한 열 죽음의 공허 또는 최종적으로 불타서 녹아 내리는 용광로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폴킹혼이 문제삼는 첫 번째의 비관주의적 종말론이다.
(2) 지구 전체 규모의 대 재난에 의한 종말 : 결정론적 물리 법칙에 근거한 위의 장기적인 예측과는 달리, 폴킹혼에 의하면 다수의 과학자들은 그보다는 단기적인 대 재난의 종말을 예고한다. 그 중 첫 번째의 것은 핵무기 혹은 생물학적 무기의 사용에 의한 멸망, 혹은 환경 오염으로 인한 자연 파괴의 멸망이다. 또한 바이러스 혹은 박테리아의 유전적 돌연변이에 의하여 야기되는 잠재적인 재난들도 예측되는데, 그 중의 하나인 HIV바이러스의 확산도 공포를 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폴킹혼은 이러한 예견들은 그다지 현실적이지는 않다고 평가한다.
(3) 유전자 변이에 의한 인류의 종말 : 위의 경우보다 현실적인 것은 폴킹혼에 의하면 인간 유전자의 생존기간의 종료에 의한 것이다. 유전자의생물학적인 생존기간은 비록 수백만 년에 이르기까지 지속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3-5만년 정도에 제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인류의 생존 기간도 3-5만년에 제한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폴킹혼은 이러한 자연적 과정의 평균적 사례가 인간이라는 종에 직접적으로 적용될 수는 없다고 보는데, 그 이유는 인간이 획득된 지식을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대단히 효과적인 정보 전달 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전적 돌연변이에 의한 자연선택이라는 대단히 느리고 불확실한 진화의 과정에 종속되어 있는 다른 생명체의 계는 인간의 계와 직접 비교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에 관한 한 라마르크적인 문화적 진화의 과정이 다윈적인 생물학적 진화의 과정을 수정하고 변경하는 효과가 무시할 수 없는 정도로 크다는 점이 고려되어야 한다. 이것은 출현한지 겨우 수만 년에 지나지 않는 인류의 문화적 발전이 30역 년에 걸친 지구 전체의 자연적 환경을 총체적으로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데에서 예증된다. 폴킹혼은 유전자조작의 문제가 이러한 인간적 존재의 특성을 증폭시키게 될 것으로 예측한다.
(4) 유성과의 충돌에 의한 종말 : 마지막으로 폴킹혼이 고려하는 우연적인 대 재난은 지구 외부로부터의 유성들의 충격(impact)이다. 지구 전체를 파괴할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을 가진 큰 유성들이 평균적으로 매 일억 년마다 지구와 충돌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으며, 현실적으로 지구와 소혹성들이 교차하는 지역은 그러한 충돌의 가능성을 실현시킬 만큼 가깝다고 한다. 폴킹혼은 6천 5백만 년 전에 있었던 지구와 유성과의 충돌이 공룡들의 시대의 절멸을 야기했다는 사실이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널리 신뢰되고 있음을 강조한다.
2. 메타 과학적인 반응들의 유형별 문제점
(1) 결정론적, 비관론적 허무주의
폴킹혼에 의하면 위에서 제시된 현대 자연과학의 무신론적 종말 이해에 근거하여 우주가 궁극적인 파국으로 결정되어 있다고 믿는 대표적인과학자는 쟈크 모노3)와 스티븐 와인버거이다. 그들에게는 인간이 가진 모든 지식과 통찰들, 예술들과 문화들은 허무한 우주적 역사 안에 일시적으로 출현했다가 사라지는 에피소드에 불과하게 된다. 탄소에 기초한 모든 생명체들은 무의미의 광대한 바다 한가운데에서 작은 섬과도 같이 존재하는, 의미의 부분적 체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폴킹혼은 와인버거의 다음과 같은 글을 인용한다: "우리가 우주를 점점 더 많이 이해하면 할수록, 그것은 더욱 무의미해진다.... 우주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인간의 삶을 광대극의 수준보다 약간 더 높이 끌어올리는, 그리고 그것에게 비극의 은총을 수여하는 대단히 드문 일들 중의 하나이다."4)
이러한 비관주의적 관점에 대하여 폴킹혼은 그것이 총체성의 의미를 획득하는 데에 충분하지 못하다는 반론을 펼친다. 우주의 총체적 의미가 파악되지 않고 해명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주적 역사가 덧없는 공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은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우주의 종말은 파국적 종말과 마찬가지로 또한 궁극적인 완성을 가져야만 한다고 주장한다.5) 그러나, 폴킹혼의 이러한 반론은 조금은 모호하다는 느낌을 준다. 총체성의 의미를 획득하는 데에 충분하지 못하다는 형이상학적 판단이 현실적 과학 법칙을 결정론적으로 신뢰하면서 비관주의적 관점을 고수하는 과학자들을 설득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미결로 남아 있다. 쟈크모노와 와인버거와 같은 비관주의적, 결정론적 관점에서의 종말 이해에 대한 폴킹혼의 적극적인 대응은 다음 단계로 넘겨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폴킹혼은 단지 자연과학의 무신론적 종말론에 대하여 기독교신앙의 종말론적 희망이라는 관점이 또한 고려되어야 한다는 문제를 제기하는 데에 그치고 있다.
(2) 티플러(F. J. Tipler)의 환상적 낙관주의
현 시대에 문제가 되는 과학적 종말 사상으로써 폴킹혼이 두 번째로 예시하는 것은 프랭크 티플러의 "불멸의 정보화 종말론"이다.6) 티플러도 역시 우주의 붕괴에 의한 종말을 전제하는데, 그러나 그의 사상이 비관주의적 종말 이해와 다른 것은 우주가 이러한 결정론적인 종말의 과정에도 불구하고 전체적 규모에 있어서 에너지 사용을 점점 더 절약하면서 고도의정보 처리 기능을 계속 발전시켜 갈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그는 종말에 있어서 우주가 우주적인 정보 처리-기능(a cosmic information-processor)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들의 물리적우주가 유한한 생존 기간을 가지는 것은 확실하지만, 정보를 처리하는 우주적 지능의 컴퓨터는 이러한 물리적 과정의 진행보다 더욱 빨리 작동할 것이며, 그래서 마침내 우주의 임종 때에는 무한한 양의 정보를 처리하는 불멸의 존재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종말이 도래하기 훨씬 전에 그 정보 처리 기능은 현재 인간의 제한된 신체성으로부터 벗어나있게 될 것이라고 티플러는 간단하게 생각한다.
폴킹혼은 이러한 티플러의 사고를 "신체적 종말론"이라고 이름 붙인다. 왜냐하면 그것은 현재의 과학으로는 검증되지 않는 미래적 기술 환경 안에서 정보 처리 기능이 마치 인간의 신체적인 과정들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는 과정들을 수행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 미래적 환경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극단적인 에너지의 집적을 가정하는데, 이것은 우주 대폭발의 초기 상태에 있어서의 에너지보다 훨씬 초과한다. 폴킹혼은 보통 초기 우주의 행동을 계량하는 양자 우주론들이 1043초라는 시간을 계산하는 반면에, 티플러의 시간 계산은 10N초에 이른다는 점을 무리한 사변으로 지적하는데, 여기서 N은 1010에 도달하고 있다.7) 폴킹혼은 그러한 과도한 상상을 "냉담한 환원주의자들의 색채"라고 판단한다. 생명 자체에 대한 애정과 감성을 배제한 채, 생명을 단지 정보처리 기능과 냉소적으로 동일시하는 데에서 그러한 무리한 계산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 때 인간이란 단지 단백질을 주성분으로 하는 유기물질로 만들어진 컴퓨터에 불과하게 될 것이며, 또한 종말의 불멸의 존재라는 것도 "물질의 기괴한성분 구조로써 구성된 컴퓨터"8)에 불과하게 될 뿐이다. 폴킹혼은 이러한 사상이 기독교적 종말론의 희망의 궁극적인 파산을 암시한다는 극단적인 비난으로써 티플러에 대한 비판을 마친다.
우리는 여기서 폴킹혼이 자연과학에 근거한 사변적인 낙관론을 강력하게 경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시대의 자연과학은 한편으로는 미래를 전적으로 허무한 비관주의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지적 능력에 대한 단순 사변적인 낙관주의의 관점에서 바라보고있다. 그것은 한편으로 궁극적인 파멸을 향한 물리적 과정의 절대적인 진행을 증명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물리적 과정을 낙관적으로 극복하는 정보 처리 능력에 대한 과도한 신뢰를 수학적으로 계산해 내고 있다. 폴킹혼의 종말론적 사고는 양쪽이 다 인간이 경험하는 구체적인 우주와 현실을 해명하기에는 불충분한 것임을 지적한다.
(3) 양자 물리학의 거품 우주론
일단의 양자 물리학자들은 물리학적인 양자 이론을 우주의 전체 구조에 이르기까지 확장하려고 시도한다. 그들에 의하면 우주 전체의 운동은 양자론적 세계의 역동적 구조와 유사하며, 그것의 확장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폴킹혼은 이러한 양자 우주론을 구성하는 관념들에 주목한다. 양자들의 파동(quantum fluctuations)들은 에너지가 진공으로부터 순간적으로 분출하는 동시에 소멸하는 현상을 포착하는데, 우주의 운명도 이에 상응하는 과정으로 추정된다. 물론 이 때의 진공은 단순한 허공을 뜻하지 않으며, 능동적인 매개 작용을 수행하는 매개체를 의미한다. 이러한 특수한 의미에서의 진공 상태에서 야기되는 미세한 양자들의 파동들은 때로는 엄청난 속도로 팽창하며 확장되어서(양자들의 인플레이션), 우주적인 크기의 실체들의 후속적 진화의 확률적인 원인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 그들의 사변적인 추측이다. 각각의 차원의 세계들은 원초적인 진공상태로부터 영원히 끊어 오르는 거품과도 같은 구조의 일부이며, 그것의 종말은 양자론적 세계가 순간적으로 소멸되는 것과 같은 운명을 맞게 된다.9)
폴킹혼은 이러한 우주론 안에서의 우리들의 운명이 공허에 불과함을 직시한다. 가장 큰 규모의 우주 안에서 모든 것은 결국 영원한 거품으로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인류가 성취하는 최선의 지적, 문화적 업적들도 결국 덧없는 것이며, 때때로 무작위로 당첨되는 복권과도 같은 무의미한 사건에 불과하게 된다고 반박한다. 그 추측도 역시 "무작위적 불합리성의 바다 안에 외롭게 떠 있는 의미성의 외딴 섬"10)이라는 그림을 선사할 뿐이라는 것이다.
물리학적 양자론의 문외한인 우리들로서는 양자들의 미시적인 세계가 우주적 규모의 크기로 확장된다는 상상을 뒤따라가기에 곤란을 느낀다. 그러나 양자론적 장(field) 안에서 시간과 공간은 우리들의 일상적인 거시세계의 그것과는 다른 성격과 차원의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사고가 비논리적이라고 쉽게 판단할 수는 없다. 장은 에너지의 충만으로서의 진공 안에서 보편적 우주 안에 편재할 수 있으며, 그 안에서의 극단적으로 미시적인 파동의 효과는 우수 전체에 영향을 줄 수 있을 만큼의 인플레이션의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확장되는 과정 안에서 인간의 일상적인 거시적 질서의 차원이 전적으로 무시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폴킹혼과 함께 지적하여야 할 것이다. 인간의 역사과 실재가 거품 우주안의 무상한 의미의 외딴 섬에 지나지 않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인간이 바로 그러한 가능성을 측정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러한 양자물리학적 우주론의 상상 안에서 무시되고 있는 관련성, 다시 말하여 양자론적 미시적 세계와 인간적 일상적 거시 세계와의 관련성의 여러 가능한 영역들을 더욱 현실주의적으로 질문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Ⅲ. 종말론적 사고를 위한 단초들 : 에너지와 패턴으로서의 실재
1. 관계성
폴킹혼은 20세기 후반의 새로운 과학과 그 이전의 과학과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관계성의 인식 안에서 찾는다. 그는 20세기의 과학이 물리적 실재 근저에 놓인 관계적 특성을 인지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시대들의 과학들과 구분된다고 생각한다.
물리학이 새롭게 발견한 관계의 특성 중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소위 "스푸키 효과'라고 할 수 있다. 폴킹혼의 설명에 의하면 이것은 뉴턴적 세계관 안에서는 전혀 기대되지 않았던 관계성의 특성이다.11) 그것은 두 개의 양자적 실체가 한 번 상호 작용을 하였다면, 그들은 이제 그 후에 아무리 멀리 떨어지게 되더라도 서로 서로에 대하여 직접적인 인과적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폴킹혼은 우리들의 사고를 돕기 위하여 그 둘의 실체들이 단일한 체계(system)를 구성하게 되었다고 표현한다. 예를 들어 둘 중 하나는 여기 머물고 다른 하나는 달의 건너편으로 간다고 해도, 여기 하나에 대하여 수행된 측정은 저 건너편에 멀리 떨어져있는 동료에게 순간적으로 동일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이다. 폴킹혼은 이것이 존재론적(ontological) 효과이며, 인식론적(epistemological)효과가 아니라는 점을 대단히 강조한다. 즉 시공간을 초월하여 일어나는 인과적인 효과는 단지 인간의 인식 작용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 실체들의 존재 자체에 관련된 것이다.
아인쉬타인은 자신이 상대성 이론에 의하여 시간과 공간이 뉴턴이 생각했던 것과 같이 불변의 절대적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뒤에도 이 스푸키 효과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는 양자론적 실험의 측정의 절차 중의 어떤 것에 오류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앨런 애스펙트(Aliain Aspect)와 그의 동료들은 1980년의 실험에 의하여 이러한 기이한 "분리되지 않는 공존(togetherness inseparation)"12) 혹은 비국소성(nonlocality)이 자연의 실제적인 속성임을 증명하였다. 소립자들의 세계는 분리되어 있는 단위들과 조각들을 합쳐 놓은 것이라는 방식으로는 적절하게 사고될 수 없는 그런 기이한 방식으로 서로 복합적으로 연결되어있는 것이다. 전자와 같은 요소적 입자들을 더 이상 뉴턴적인 시공간 안에서의 개체적인 어떤 것으로 상상될 수 없다. 폴킹혼은 그것이 오히려 전자장 안에서의 에너지의 흥분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말한다.
양자론이 밝히는 이러한 초-시공간적 관계성을 확장하여 사고한다면, 미시적 세계 안에서의 모든 존재(에너지의 흥분들)는 서로의 상호 작용에 의하여 전체가 연관되는 전일적인(wholistic) 관계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성이 폴킹혼의 종말론적 사고를 구성하는 기초적 개념이 된다.
2. 전일성
양자론적인 미시 세계 안에서 밝혀지는 기이한 관계성의 특성이 뉴턴적 차원의 거시 세계와 영향을 주고받는 작용은 최근의 현대 과학에 의하여 새롭게 발견되기 시작하였다. 그 작용에 의하여 물리적 세계는 단지 기계적인, 결정론적인, 원자화된 이론들에 의하여 해명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전일성은 자신의 역사가 옛 구성요소들을 단순히 새롭게 배열하는 것을 훨씬 넘어서는 어떤 전적인 새로움을 출현시키는 체계의 작동 방식 안에서 발견된다. 그 체계 안에서 전체는 부분의 합 이상이 되며, 부분의 합으로써는 해명되지 않는 새로움이 창조적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전일적(wholistic) 현상을 포착하는 대표적인 이론은 폴킹혼에 의하면 카오스 이론과 복잡계(complex system)라고 할 수 있다.
카오스 이론은 어떤 체계들이 환경에 대하여 극도로 미묘한 민감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 주었다. 이들의 작동 방식은 뉴턴이 계산한 법칙에 의하여 시계와 같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 인식에 포착되지 않고 예측되지 않는 방식으로, 예를 들어 구름과도 같이 생성되고 사라지는 것에 비유된다. 이것은 "나비 효과"라는 이름으로써 이미 대중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즉 지구의 날씨의 체계들은 아프리카의 숲 속의 작은 나비의 날개 짓이 정글의 공기를 휘저어서 약 3주의 기간 후에 런던에 폭풍우를 몰고 올 만큼 증폭적으로 확대되는 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카오스 이론은 거시적인 폭풍우의 생성과 소멸이 측정 불가능한 미시적인 관계성에 의하여 야기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이러한 종류의 카오스 체계들은 그것들의 환경으로부터 결코 고립되어 사고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들의 환경에 대한 민감성이 환경 안의 미세한 변화에 엄청난 영향과 상처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체계들은 이전의 결정론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이해될 수 없으며, 전일적(wholistic)이라는 새로운 개념에 의하여 파악되어야 한다. 전일적인 생성 과정 안에서 어떤 체계는 극단적으로 미세한 자극이 체계 전체의 거대한 붕괴 혹은 창조적 전진을 일으킬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체계 안에서는 부분들의 합이 단순히 전체가 되는 것이 아니며, 부분들의 합은 환원주의적으로 파악되지 않는 전체의 변화를 때로는 야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체계들의 변화는 아무렇게나 되는 우연에 내맡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스트레인지 어트랙터(strage atrractor)라고 부르는 가능성의 영역 안에 제한되어 있다. 어느 정도의 무질서와 어느 정도의 질서가 물리적 세계의 역동적인 생성의 과정 안에서 서로 얽혀 있는 것이다.
미시적 차원의 세계 안의 초자연적인 움직임이 일상적인 거시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관계를 맺는) 전일적 현상을 표현하는 또 다른 예는 복잡계(complex system)이다. 폴킹혼은 1977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일리야 프리고진(I. Prigogine) 이 정식화했던 무산구조(dissipative structure)를 복잡계의 대표적인 예로써 제시한다. 복잡계는 주변 환경으로부터 에너지를 끌어당겨서, 열역학적인 평형 상태로부터 멀리 떨어진, 비평형 상태에 도달함으로써 자생적 질서(self-organizing order)의 패턴을 산출할 수 있다. 폴킹혼은 잘 연출된 실험에 근거하여, 아래의 것이 위의 것보다 뜨거운 두 개의 수평의 판유리 사이에 담긴 액체는 육각수라고 부르는 고도로 질서 있는 운동의 패턴을 형성하는 현상을 제시한다.13) 이 현상 안에서 수조의 수조 개에 달하는 액체 분자들은 복합적(complex)질서로써 전일적으로 상관되는 운동을 나타내 보인다. 이것은 합리적 이성의 관점에서는 사실상 기적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무엇이 이 무한대의 숫자의 분자들로 하여금 인간적 이성이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는 질서의 패턴을 형성하고 그 패턴에 따라 움직이도록 하는지는 인간에게는 인식되지 않는다. 20-21세기의 인류는 다만 그 현상을 발견했으며, 자연 안에 그러한 자생적인 질서의 패턴을 조직하는 경향을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해했을 뿐이다. 그러나 발견과 이해만으로도 20세기 문화 안의 합리적 이성이 전혀 알지 못하는, 현실의 새로운 측면을 드러내기에는 충분하다. 새로운 복잡성의 과학은 그 현상을 자생적 조직화(self-organizing)14) 라고 부르고 있으며, 폴킹혼은 이것을 자신의 종말론적 사고를 형성하는 기초적 개념으로써 수용하고 있다.
뉴턴의 결정론적 사고 체계를 넘어서는 폴킹혼의 종말론적 사고는 이와 같이 미시적 양자론적 세계 안에서의 관계성과 그것이 거시적 물리 세계 안에서 일으키는 전일적 작용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성과 전일성의 개념은 폴킹혼의 사고에 독특한 것이라기보다는, 복잡성의과학에 참여하는 과학자들 전반에 걸쳐서 일어나는 인식론적인 전환의 국면에 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재를 더 이상 폐쇄된 결정론적 체계로 보지 않으며, 오히려 미시적 차원의 민감한 자극에 의하여 전체 패턴이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변경되는 복잡성의 체계(complex system) 안에서 그것을 파악하는 것이 새로운 과학의 일반적인 경향이다. 폴킹혼은 물리적 실재에 관한 지금까지의 환원주의적 설명이 부적절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복잡계의 작동 방식 안에서 실재의 새로운 인식을 추구하는 많은 새로운 과학자들을 격려한다. 또한 그는 대단히 확장된 컴퓨터의 유용한 능력이 복잡계의 컴퓨터 모델의 측정을 좀더 정확하게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아직은 유아기적인 단계에 있다고 평가하는데, 왜냐하면 각각의 개별적인 사례들에 대한 연구로부터 부분적인 통찰이 유도되고 있는 정도에 그치고 있으며, 일반적인 이론은 아직 확립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복잡계에 의한 실재의 인식 안에서 다른 과학자들과 구분되는 폴킹혼 자신의 독특한 이해는 "에너지와 패턴"이라는 구조에 의하여 표현된다. 그의 종말론적 사고는 이 대목에 이르러서 일반성을 벗어나, 자신만의 특성을 나타내 보이게 된다.
3. 에너지와 패턴으로서의 실재 이해
복잡성의 체계에 근거한 종말론적 사고를 전개하기 위하여 폴킹혼은 최근에 이루어진 또 하나의 주목할 만한 실험의 결과를 인용한다. 그것은 스튜어트 카우프만에 의하여 컴퓨터 프로그램 상에서 실행된, 자생적 질서의 자기-조직화 현상이 나타나는 실험이다.15) 카우프만은 컴퓨터 프로그램 안에 디지털로 구성된 많은 전구들을 배열하였다. 그 전구들 하나 하나는 각각 불이 켜지거나 꺼진 상태에 있을 수 있으며, 켜지고 꺼지는 것은 그 전구들의 집합적 배열 안에서의 옆에 있는 다른 두 멤버의 상태에 의하여 결정되도록 프로그램화되었다. 뉴턴적-결정론적으로 이해되는 현실을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전구가 꺼지고 켜지는 단순한 규칙은 무수한 전구 전체의 집합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으로 일견 생각된다. 미시적 차원의 소박한 규칙(옆의 두 전구에 의하여 켜지고 꺼지는 것이 결정된다는 단순한 규칙)은 수십만 개에 달하는 전구 전체의 거시적 차원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우리들은 일반적으로 믿고 있는데, 바로 이것이 복잡성의 과학이 극복하고자 하는 현대의 결정론적 사고인 것이다. 결정론적인 사고는 수십만 개의 전구들이 무질서하게 영원히 무작위로 깜박일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러나 스튜어트의 실험은 그 전구들의 집합이 놀랍게도 대단히 빠른 속도로 및 개의 제한된 숫자의 패턴을 순환하는 사이클을 형성하는 현상을 보여준다. 수십만 개의 전구들의 집합은 어떤 질서있는 순환적인 행동의 패턴으로 정착한다. 더구나 그 사이클의 순환을 구성하는 각각의 패턴의 숫자는 N개의 전구의 경우에는 N의 제곱근의 근사치에 접근한다는 통계적 결과를 나타내 보여준다.
스튜어트의 실험 결과 안에서 폴킹혼은 현재 우리들 인간에게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심오한 현상이 이러한 놀라운 질서가 출현하는 현상의 근저에 놓여 있음이 틀림없다고 결론짓는다.16) 폴킹혼이 확신하는 심오한 현상이란 "패턴(Pattern)"의 형성이다. 뉴턴 이래의 현대 과학은 에너지(폴킹혼은 물리학 안에서 에너지가 물질과 동등한 값을 가지므로 에너지의 개념 안에 물질을 포함시켜서 사고할 것을 요구한다)에 의하여 우주를 관찰하고 계산하여 왔다. 과학 이론과 자연 사이에는 에너지를 매개로 하는 환원주의적 인식 체계가 구성되어져 왔으며, 모든 것은 에너지의 작동방식으로써 이해되어져 왔다. 폴킹혼은 이러한 사고를 "아래로부터 위로(bottom up)" 작용하는 사고 방식이라고 이름을 붙인다. 폴킹혼에 의하면 이러한 물질주의적(혹은 에너지주의적) 사고는 우리가 경험하는 실재의 또 다른 중요한 구성요소를 간과하고 있다. 그 구성요소는 인과율에 의하여 통제되는 결정론적 체계 안에서 아래로부터 작용하는 에너지의 작동방식을 "위로부터(top down)" 규정하면서 질서의 패턴을 출현시키는 "정보(information)의 기능"이다. 폴킹혼의 신학적 관심은 에너지의 작동 방식을 "위로부터" 규정하면서 패턴을 형성하는 정보의 활동에 집중된다. 이와 같은 정보에 의한 패턴의 형성이 우주적 실재를 구성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이며, 이것이 바로 폴킹혼의 사고 안에서 신학과 자연과학 사이를 매개하는 연결의 고리가 되고 있다. 실재는 "아래로부터" 작용하는
에너지(혹은 물질)와 "위로부터" 작용하는 패턴으로 구성된다.
폴킹혼은 이러한 이해가 물질과 로고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관념과 유사함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이 사고가 본질적으로 플라톤주의자들17)에 가까운 수학자들에 의하여 구성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에너지와 패턴이라는 구조는 실재의 비물질적인 측면의 움직임을 "정보의 패턴 형성"이라는 인식 안에서 신중하게 수용하도록 용기를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폴킹혼온 이 구조가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오히려 그것은 "창조된 현실이 한 종류의 재료(물질)로써 구성되어 있으며, '정신/물질'이라는 보완적인 양극점 안에서 존재하고 경험된다는 '이원론적 국면의 일원론(dual-aspect monism)' "18)으로 생각되고 있다. 물리적 과정 안에서 에너지와 패턴은 서로 뒤얽혀 있으며, 폴킹혼에 의하면 이것은 이원론이 아니라 오히려 일원론적인 실재라고 말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것이다.
폴킹혼은 롬 8장과 골 1장을 예로 들면서 이러한 양쪽으로부터의 구조에 대한 통찰은 신학자들에게는 전혀 놀라운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신학은 본질적으로 에너지에 의하여 구성되는 피조물의 성격을 그 자체로 이해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위로부터 규정하시는 창조자와의 관계 안에서 이해하여 왔기 때문이다. 여기서 폴킹혼의 자연과학적 통찰은 인류의 운명을 포함하는 우주 안에 피조된 모든 것들의 운명이 하나님의 종말론적 섭리 안에서 풀릴 수 없이 서로 얽혀져 있다는 신학적 사고로 넘어간다.
IV. 정보에 의한 패턴의 형성 과정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
1. "정보"의 개념
『과학시대의 신론』안에서 폴킹혼은 정보(information)라는 단어가 "동역학계의 미래행위가 지닐 구조화된 패턴을 형성하는 데에 작용할 영향력을 표현"19)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전화 등의 일상 생활이나, 수학적인 계산 행위에서 사용하는 객관적 정보 단위의 기록이나 전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정보의 개념을 위하여 폴킹혼은 봄(Bohm)의 유도파(guiding wave)의 개념을 예로 든다.20) 유도파는 어떤 체계의 전체 환경에 대한 정보를 전일적인 방식으로 암호화하고 있으며, 그래서 에너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체계의 미래 행동의 방향을 그 정보에 의하여 결정하는 방식으로 양자론적 실체의 운동에 영향을 미친다. 유도파의 영향력은 순수하게 정보에 의한 것이며, 에너지에 의한 것이 아니다. 이와는 구분되는,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정보는 전달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에너지를 소모한다. 정보의 에너지적 전달은 전달하는 신호음이 전달의 공간을 형성하는 환경 안의 소음보다 더 큰 에너지를 지녀야 한다는 조건을 충족할 때 가능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에서의 정보 전달은 순수한 에너지의 작용이다. 그러나, 폴킹혼이 말하고자 하는,패턴을 형성하는 정보의 개념은 그러한 에너지적 정보와는 다르다. 폴킹혼이 주목하는 봄의 유도파는 그러한 에너지 손실이 없다는 특성을 실험에 의하여 보여준다. 그 유도파에 있어서는 자체의 에너지가 아무리 약해지더라도 정보를 전달하는 효과는 그대로 남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봄의 유도파는 비에너지적 성격을 가진다. 여기서 폴킹혼은 에너지의 인과율을 벗어나는 "정보적" 인과율을 발견한다. 이것이 우주적 실재를 구성하는 또 다른 측면이며, 현대 과학에 의하여 최근의 300년 간 전적으로 무시되어온 측면이다.
2. 정보의 입력 과정
비에너지적 정보의 인과율이라는 앞선 과학적인 이해 안에서 폴킹혼의 자신의 신론을 구상한다. 우선 폴킹혼은 어거스틴의 우주론을 무시간적으로 차단된 우주(atemporal block universe)라고 이름 붙이면서 수용한다. 어거스틴의 고전적 신학 안에서 하나님은 완전히 시간 밖에 존재하시며, 미래를 아시는 유일한 분으로 적절하게 사고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주의 시간적 한계선 밖에 초월적으로 계시면서 동시에 우주 안의 실재를 참으로 이해하시는 분이시다. 폴킹혼도 또한 하나님이 존재하는 사물들의 시간성 안에서 사물들을 인식하신다고 생각한다. 시간성은 사건들의 연속성을 뜻하며, 그 결과 피조 세계 내의 시간적 경험이 신적인 본성 안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21) 여기서 우리는 과거와 미래와 현재 사이의 구별이 환상에 불과하다고 말했던 아인슈타인의 견해보다는 어거스틴에 의한 직선적, 비가역적인 시간의 이해가 오히려 더 2l세기의 과학이 발견하는 실재의 구조에 적절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음을 본다. 그러나 직선적인 시간관은 결정론적, 정적인 우주관이 아니라, 새로움을 창조하면서 스스로를 전개해 나가는, 생성의 우주관을 전제한다.
폴킹혼은 신구약성서의 하나님이 역사의 과정에 깊숙하게 개입하신 것을 세계의 생성에 관계하시는 신론적 내용으로 확장시켜서 해석한다.22) 바로 이 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성을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데, 폴킹혼도 역시 세계 내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흔적을 시간성 안에서 발견하고자 한다. 폴킹혼의 주장은 "육신을 가진 존재로서의 인간은 에너지와 정보에 의하여 활동한다고 생각할 수 있으며, 순수정신으로서의 하나님은 오로지 정보입력을 통하여 활동한다"23)고 생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적 존재들은 물리적 영역 안에서의 에너지적 인과율과 능동적 정보의 결합을 통하여 세계 내에서 활동하며, 그리고 피조물과 하나님의 섭리적 상호작용은 전적으로 "위로부터"의 정보 입력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론에서 유추한다면 폴킹혼의 하나님은 전적으로 정보의 입력이라는 활동을 통하여 인간을 비롯한 피조적 세계에 관여하신다. 시간적인 피조 세계 안에서 하나님은 비에너지적인 정보를 입력하심으로써 자신을 드러내시며, 스스로를 계시하신다. 폴킹혼은 이러한 새로운 신론적 사고가 신학에 있어서, 단지 위로부터 혹은 단지 아래로부터가 아닌 제 삼의 서술 가능성을 바른 방식으로 열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그것이 계속적 창조(creatio continua)의 전개를 유도하고 있으며, 성령의 은폐된 활동을 가르쳐온 오래된 기독교적 전통을 현대적 언어로 적절하게 번역한 것이라고 주장한다.24)
V. 패턴의 전이(transition)으로서의 부활
1. 물질의 변형
폴킹혼은 실재주의적인(realistic) 현실의 이해에 근거하여 과학적 설명이 우주적 역사를 결코 완전하게 서술할 수 없다고 확신한다. 현재의 자연과학이 우주의 종말에 관하여 말하는 모든 것은 결국 와인버거가 "태초의 3분" 안에서 제시하는 비관적 관점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폴킹혼은 성서의 묵시문학적 종말론도 종말에 관한 현대 과학적진단보다 더 나은 길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불합리한 자연적 징조를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 안으로 끌고 들어오기 때문이라고 한다. 폴킹혼은 양쪽의 종말 이해에 다 만족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넘어서는 통일된 "모든 것의 이론(theory of everything)"을 추구하고자 한다. 그는 그 이론이 물리학적 통일장 이론 안에서라기보다는 "실재에 대한 신학적 이해" 안에서 성취될 것으로 믿는다.25)
우주에 대한 완전한 이해에 이르는 길은 폴킹혼에 의하면 기독교적 부활 사건의 이해가 던지는 연속성/불연속성의 특성을 매개로 적절하게 서술될 수 있다. 부활의 사건은 나사렛 예수와의 "연속성"을 가지는 동시에 이 세상적 현실과의 절대적인 "불연속성"을 가진다. 연속성의 신학적 동기는 죽음의 절대적 단절을 넘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다. 그것은 인간과 우주의 운명이 영원한 회귀에 노예화되지 않는다는 진리를 확고하게 밝힌다. 불연속성의 측면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이 다름이 아니라 우리가 기쁨과 슬픔, 평화와 고통 가운데에서 현실적으로 경험하는 바로 그 예수의, 그리고 그가 살았던 바로 이 세계의 절대적 "완성"이라는 데에 있다.
폴킹혼은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종말론적 이분법을 에너지와 패턴의 상보적 이분법에 의하여 설명한다. 그는 이 내용은 "물질의 변형"26)으로써 표현한다. 양자 물리학자로서의 지적인 권위를 가지고 폴킹혼은 다가오는 세계의 "물질-에너지"는 그것의 물리학적인 속성에 있어서 현재 창조의 물질-에너지에 비교하여 근본적으로 상이할 것이라고 말한다. 현대 과학자들 중에서 어느 누구도 이 대목에서처럼 신학적인 관심사를 과학적 용어로 분명하게 표현해 준 이는 없었을 것이다. 이에 덧붙여서 폴킹혼은 물질의 물리학적인 변형이라는 사고를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전 15, 30)"는 바울의 신학적 표현과 연결시킨다. 신학적 사고 안에서 "옛 창조"로 표현되는, 우리가 경험하는 우주의 물질은 물론 스스로 진화하는 잠재적인 자기 조직화의 능력을 지니고는 있다. 그러나 폴킹혼은 그러한 종류의 진화의 세계 안에서는 죽음이 생명의 필연적인 대가임을 강조한다. 여기서 죽음은 물질의 죽음(소멸)을 포함한다. 물리적 구조 안에 배치된 무상(transience)이 죽음과 소멸의 근원적인 원천이다. 물론 복잡계가 말하는 카오스의 가장자리 안에서 새로움이 생성되지만, 그러나 폴킹혼은 그러한 방식으로 생성되는 실체들도 역시 어느 정도의 시간적인 지속만을 향유할 뿐임을 직시한다. 출현하는 새로운 실체들도 시간적으로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다. 폴킹혼에 의하면 새로움의 출현은 그것의 절대적인 비영속성을 동반한다. 그래서 그것은 영원한 신적인 본성에 그 자체로는 귀속되지 못한다.
여기서 폴킹혼은 다가올 세계, 즉 고통과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세계의 "물질-에너지" 안에는 이 세계의 물질-에너지와는 상이한 특성들이 존재해야만 한다고 확신한다. "물리적 법칙들" 안에서 반드시 불연속적인 변화가 일으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폴킹혼의 종말론적 사고는 여기서 불연속성 안의 인식론적 전환점을 통과하고 있다. 그는 여기서 부활의 불연속성을 본다. 빈 무덤 전승 안에서 주님의 일으켜지신 몸이 그 분의 죽은 몸의 영광스러운 변형을 암시하고 있다는 사실에 폴킹혼은 자신의 신학 전체의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스도 안에는 인간을 위한 희망뿐만이 아니라, "물질을 위한 희망"도 있다는 것이다. 폴킹혼은 부활에 의한 새 창조 안의 물질은 "신적으로 변형된 물질"27)일 것이라고 믿는다. 이로써 기독교의 부활 신앙은 물질에 관한 이러한 양자 물리학적인 통찰에 의하여 사고의 전환점에 부딪게 된다.
2. 패턴의 이월
"신적으로 변형된 물질"이라는 표현 안에서 다가올 세계가 이 세상의 물리적 현실과는 전적으로 불연속적인 차원임을 강조하는 반면에, 폴킹혼은 "패턴의 이월(carryover)"이라는 개념 안에서 이 세상과 다가오는 세상 사이의 연속성을 암시한다. 여기서 그는 자신이 영혼을 육체의 형식(form) 혹은 현대적 의미에서의 패턴으로 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리바이벌하고 있다고 말한다. 패턴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의미 안에서의 생명체의 "형식"과 유사한 의미를 가진다. 하나님의 부활의 행동에 관한 폴킹혼의 종말론적 사고에 의하면 이 세상에서 죽은 어떤 사람은 다가 올 세계의 새로운 "물질" 안에서 다시 육체를 가지게 되는데, 이 때 부활의 육체를 구성하는 "물질"은 이 세상의 물질과는 전적으로 다른 불연속적인 특성을 가지지만, 그 육체를 구성하는 "패턴"에 있어서는 이 세상에서의 삶의 경험의 총체성으로서의 과거의 인간과 연속성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사고 안에서 폴킹혼은 죽은 이 세상적 육체가 심신통일적 존재로 회복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러한 종말론적 사고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의 사고와 비교할 때 개인주의적으로 한정되지 않는다는 특성을 갖는다. 양자물리학에 의하여 밝혀지는 "관계성"과 "전일성"이 폴킹혼의 종말론적 사고의 기초를 구성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하여야 한다. 폴킹혼이 말하는 바, 영혼으로서의 패턴은 한 인간의 개인적인 경험들에 제한되지 않으며, 그것은 오히려 한 인간의 일생에 관계된 모든 다른 인간들과의 관계성을 포괄하며, 또한 그것은 다른 피조물과의 보편적 생태학적인 관계를 포괄하는 동시에, 또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그 개인의 독특한 관계를 포함하는, 복잡한 양자론적 총체성을 구성하게 된다. 폴킹혼은 자신의 이러한 사고가 모든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하나의 몸 안으로 통합(incorporation)된다는 성서적 사고를 적절하게 해명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광범위한 복잡성의 패턴이 죽음의 순간을 넘어서서 다가 올 새로운 세계의 생명 안에서 육체화 된다는 것이 기독교 신앙에 핵심적인 희망이라는 것이다.
폴킹혼은 현대 과학의 사상 안에서 공간, 시간, 그리고 물질이 일반 상대성 이론이라는 하나의 결합체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음에 착안하여, 부활의 세계도 역시 그러한 관계성의 결합체(nexus)의 특성을 가질 것이라고 유추한다. 그는 부활의 존재가 물질에 의해서만 구체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또한 부활의 "공간" 안에서 위치할 것이며, 또한 부활의 "시간" 안으로 포괄되어질 것으로 본다. 이것은 부활의 세계 안의 영원한 존재가 정적으로 정지된 상태가 아니라, 역동적으로 운동하는 상태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때 폴킹혼이 생각하는 시간은 현재의 시간과 순차적인 관계를 가지지 않는다. 즉, 반드시 옛 시간의 종말 "이후"에 새 "시간"이 시작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또한 부활 안에서의 공간적 변이도 순차적인 것이 아니다. 즉 하나의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관계의 구조를 보존하면서 이동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옛 창조의 벡터 공간은 새 창조의 새 공간과 이미 인접해 있으며, 양자의 관계는 폴킹혼의 수학적 언어에 의하면 "횡단적 교차(intersection)"28) 라고 할 수 있다. 다가 올 세계의 "시계"는 옛 창조의 시계와 같은 기준에 의하여 맞추어질 수 없다.그래서 폴킹혼은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의 각각의 죽음의 시간에 관계없이 같은 "시간"에 보편적인 부활에 도달한다는 성서적 진술이 상상 가능하다고 말한다.29)
"패턴의 이월로서의 부활"이라는 자신의 사고에 근거하여 폴킹혼은 죽은 자들이 부활의 육체를 가지게 되기 이전에 머무른다고 하는 중간 상태 혹은 연옥에 관하여 더 이상 사변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창조자 하나님은 다가올 세계 안에서 이 세계 안에서의 행동 방식과 전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예를 들어 어떤 마술적인 순식간의 행위로써 인류의 존재를 변형시키실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연옥의 개념이 인류의 존재가 하나님의 현실성과 영원히 만나게 되는 변형의 과정의 일부로써 비신화화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폴킹혼은 과정신학이 객체적 불멸성의 개념 안에서 최종적 종말을 사고하는 것을 비판한다. 그것은 개인의 종말론적인 희망을 생기 없고 불만족스러운 방식 안에서 단지 신적인 정신 안에 있는 어떤 정적인 기억으로 환원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바의 신의 결과적 본성에는 물질의 변형을 통하여 계속되는, 다가 올 세계의 적극적이고 역동적인 개념에 대한 탐구가 결여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폴킹혼은 하나님이 모든 것 안에 계시게 될 세계 안에서의 인류의 궁극적인 완성은 총체적인 성례전이 될 것으로 본다. 그것은 이 세계와 연속성이 있는 과정에 의하여 전개되는 또 다른 우주적인 역사이며, 그것은 그러한 방식으로 하나님과 영원히 만나는 형식을 취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창조자의 현존으로써 전적으로 고취된 새 창조의 종말론적 세계 안에서 우리는 인내심 있고 민감하게 행동하시는 현재의 하나님을 직접 인지하게 된다고 기대한다.
VI. 결 론
폴킹혼은 양자 물리학자로서의 전문적인 지식에 근거하여 인류와 우주의 종말에 관하여 사고한다. 그의 종말론적 사고는 먼저 현 시대의 자연과학이 신뢰하는, 우주의 미래에 대한 비관적 전망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그는 우주가 영원히 허무한 팽창 혹은 응집으로써 끝나지 않으며, 물질의 변형을 통하여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변혁은 컴퓨터의 기능에 비유되는 우주적 지능에 대한 신뢰에 기초하고 있는 단순한 낙관주의적 전망과도 구분된다. 우주적 종말은 단지 컴퓨터 안에 자리 잡는 냉담한 우주적 지능에 한정된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인간적 육체성에 속한 정서와 감정의 차원을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우주의 종말에 관한 현시대의 자연과학의 비관주의적 혹은 낙관주의적 전망을 거부하는 폴킹혼의 사고는 기독교적 종말론이 최근의 자연과학과 비판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귀중한 토대를 마련해 주고 있다. 기독교 신학자들은 폴킹혼의 견해에 근거하여 자연과학자들의 허무주의적 종말 이해에 적절한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 것이다.
폴킹혼의 종말론적 사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에너지와 패턴의 상보적 관계로 파악되는 우주적 질서의 구조가 우선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현대 과학은 실재를 단지 물질-에너지의 측면에서 관찰하고, 관찰된 부분을 기계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현대적 우주관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환원주의적 이해 방식은 양자론적 미시 세계 안의 기이한 관계성 앞에서 좌절된다. 그것은 비국소적 특성을 나타내며, 시공간을 초월하여 존재론적 관계를 가지는 자연의 감추어진 속성을 더 이상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묘한 관계성은 카오스 이론과 복잡계의 작동 방식 안에서 부분적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폴킹혼은 카오스 이론과 복잡성의 과학이 보여주는 자생적 조직화의 현상 안에서 등장하는 새로움도 궁극적으로는 현시대의 물리적 소멸 과정에 종속된 것임을 강조한다. 물질-에너지 차원에서의 새로움이 아니라, 그것의 패턴을 형성하는 비에너지적 정보의 활동이 하나님이 세계 안으로 개입하시는 직접적인 통로이다. 에너지-물질과는 구분되는, 정보에 의한 패턴의 형성이라는 측면을 밝힘으로써 폴킹혼의 종말론적 사고는 우주적 실재의 새로운 구성 요소를 제시한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과학적인 실재의 이해와 기독교 신앙의 실재 이해를 결합시킬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 비에너지적 정보에 의한 패턴의 형성 안에서 우리는 창조자 하나님의 활동을 자연과학적으로도 확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폴킹혼의 종말론적 사고는 옛 세계의 종말과 새 세계의 도래라는, 기독교적 종말론의 절대적인 불연속성을 현대적 용어로써 적절하게 표현한다. 이 불연속성은 물질의 변형이라는 폴킹혼의 독특한 사고에 의하여 더욱 명확하게 제시된다. 인류는 현재 존재하는 각각의 인간성의 단위로서의 패턴이 이월되면서 새로운 물질로 구성된 새로운 육체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폴킹혼의 사고는 현대의 신학 안에서 거의 망각되어져 온, 부활의 육체에 관한 논의가 신학과 자연과학과의 대화 안에서 재개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고 있다. 기독교 신학은 합리적 이성에 의하여 추방되어온 자신의 핵심적 주제들, 즉 부활과 사후의 삶,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논의를 폴킹혼과 같은 자연과학자들과의 대화 안에서 새롭게 시작하여야 할 것이다.
각 주
1 존 폴킹혼 저, 이 정배 역,『과학시대의 신론』 (서울 : 동명사 1998) ; J. C. Polkinghorne, Belief in God in an Age of Science, The Terry Lectures (New Haven, Conn : Yale University Press 1998).2 John Polkinghorne and Michael Welker, ed., The End of the World and The Ends of God. Science and Theology on Eschatology (Harrisburg, Pennsylvania : Trinity Press Internationa1 2000). 폴킹혼과 벨커는 필자에게 이 책의 번역을 위탁하였으며, 번역서는 곧 출판될 예정이다.
3 폴킹혼은 다음의 대표 저서를 인용한다: Jacques Monod. Chance and Necessity, trans. Austryn Wainhouse (New York: Knoph, 1971).
4 Steven Weinberg. The First Three Minutes (New York : Basic Books, 1977), 149.
5 John Polkinghorne and Michael Welker, ed., The End of the World and The Ends of God. Science and Theology of Eschatology (Harrisburg, Pennsylvania : Trinity Press International 2000), 32-33.
6 Frank J. Tipler, The Physics of Immortality : Modern Cosmology, God, and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New York : Doubleday, 1997). 이 책이 티플러의 대표적 저서라고 할 수 있다.
7 Polkinghorne & Welker, The End of the World and the Ends of God, 33.
8 같은 곳.
9 존 폴킹혼 저, 이 정배 역,『과학시대의 신론』 (서울 : 동명사 1998), 9 ; 참고. John
Boslough, 홍동선역.『스티븐 호킹의 우주』(서울 : 책세상 1990). 135-157.
10 John Polkinghorne and Michael Welker, ed., The End of the World and The Ends of God, Science and Theology on Eschatology, 33.
11 이 현상은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젊은 연구 조교들이었던 Boris Podolsky와 Nathan Rosen과 함께 발견한 것이며, 보통 EPR 효과라고 불린다고 한다. 참고 J.C. Polkinghorne, The Quantum World (Lodon : Longman,1984), chap7.
12 The End of the World and the Ends of God, 35를 보라.
13 Polkinghorne & Welker, The End of the World & the Ends of God, 36.
14 이러한 자생적 조직화 현상의 또 다른 많은 예가 있다. 물의 증발 혹은 결빙 혹은 자석의 자력 상실 등의 일상적인 예를 넘어서 미시적 파동의 세계 안에서의 레이저 광선의 펌핑(pumping) 현상, 분자적 차원들의 벨로소프-자보스틴스키(Belousov-Zhabotinski) 현상과 인간의 사회적 차원에서의 영적 현상들을 비교한 다음의 내용을 참고하라 : 신준호, 『기독교의 현대적 이해』 (서울 : 한들출판사 2000), 151ff.
15 Stuart Kauffman, The Origin of Order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3), chap. 5.
16 Polkinghorne & Welker, The End of the World and the Ends of God,37.
17 이 점에 관하여 폴킹혼은 자신의 테리 강연인 Belief in God in an Age of Science, The Terry Lectures (New Haven, Conn.: Yale University Press 1998), chap 6을 참고로 소개하고 있다.
18 Polkinghorne & Welker, The End of the World and the Ends of God, 38.
19 폴킹혼,『과학시대의 신론』(서울 : 동명사 1998), 37.
20 같은 책, 75.
21 여기서 폴킹혼은 일리야 프리고진의 비가역적인 우주적 시간관을 수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비가역적 시간에 관한 프리고진의 대표적 저서는 다음과 같다: I. Prigogine and I. Stengers. Orders out of Chaos, New York, Bantom Books, 1980; 국역 신국조 옮김.『혼돈으로부터의 질서』(고려원미디어, 1993)
22 폴킹혼.『과학시대의 신론』,79.
23 같은 책, 7l.
24 같은 책, 81.
25 Polkinghorne & Welker, The End of the World and the Ends of God, 38.
26 같은 책, 39. 또한 폴킹혼.『과학시대의 신론』, 24.
27 Polkinghorne & Welker, The End of the World and the Ends of God, 39.
28 같은 책, 40.
29 같은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