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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본질은 주일예배인가? II

별아저씨의집 2020. 3. 22. 19:28
교회의 본질은 주일예배인가? II. 2020.03.14
1.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 확산으로 예배당에 함께 모이기 어려운 시절이 되었습니다. 가정예배나 온라인 예배로 대체한 교회들도 있고 여전히 모여서 예배드리는 교회들도 있습니다.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서 한쪽을 칭찬하고 한쪽을 비판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 판단은 각 교회의 사정을 자세히 들여다봐야 가능하겠습니다.

2. 하지만 이 논란은 예배란 무엇인가, 그리고 교회란 무엇인가를 근원적으로 묻게 합니다. 단순히 주일날 모이네, 마네의 문제를 넘어 깊이 있는 고민과 성찰이 나오면 좋겠다는 싶습니다. 아니, 이 문제는 이미 한국교회가 겪고 있는 심각한 신학적 오류와 신앙적 왜곡을 드러나는 하나의 증상일지도 모릅니다. 교회의 미래를 생각할 때 반드시 짚어내어 성숙해야 할 문제입니다.

3. 일부 목회자들과 근본주의적 신학자들은 공적 예배를 멈출 수 없다고 합니다. 공예배라는 표현도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공적 예배가 따로 있고 사적 예배가 따로 있을까요? 지역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정하고 드리는 예배라는 의미에서 '공예배'라는 말을 사용할 수는 있겠습니다. 그러나 가족이 함께 드리는 가정예배나 삼삼오오 모여 드리는 구역얘배는 주일 11시 예배에 비해 예배의 가치가 떨어집니까? 정말로 공적 예배, 사적 예배가 따로 있습니까?

4. 한국교회는 주일예배 오전 예배를 특히 주일대예배라고 부릅니다. 가장 많이 모여서 드린다는 의미에서 그런 표현에 문제는 없겠습니다. 그러나 마치 이 예배가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로 사용되면 문제가 있습니다. 회장님급 당회장 목사님이 설교하는 예배라서 가장 중요한 예배라는 뜻일까요?

5. 어느 신학자는 공적예배를 중단하면 안된다는 칼럼을 냈더군요. '주일대예배'를 중단하면 안된답니다. 가만 생각해 봅니다. 그 '공적 예배'는 매주 6일 동안 중단하고 있지 않습니까? 공적 예배를 중단하면 안된다면서 왜 그럼 매일 드리지 않습니까? 부활을 기념해서 일요일을 주일로 삼고 그때만 드리면 된다고요? 매 주마다 6일 동안 '공적 예배'를 중단하는데 6일보다 좀 더 길게 중단하면 공적 예배를 중단하는 것일까요?

6. 20대 후반에 배웠던 잊혀지지 않는 교훈이 있습니다. 설교말씀이 좋았던 어느 작은 교회에 오후 예배를 드리러 가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중국선교사님이 설교를 했습니다. 중국정부가 기독교를 심하게 핍박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설교 후에 중국을 위해 기도하자며 목사님이 선교사님에게 묻습니다.

선교사님,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중국 공산정부가 망하고 기독교가 자유롭게 전파되도록 기도하는 것이 중국교회를 위해 좋겠습니까? 아니면 중국정부의 핍박이 계속되지만 그 과정 가운데 중국교회가 더 믿음 위에 든든히 설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 낫겠습니까?

7. 그 질문에 뒤통수를 얻어맞은듯 충격을 받았습니다. 기독교를 핍박하는 중국 공산주의 정권을 무너뜨려 주소서. 그래서 중국 교회들이 번창하고 복음이 퍼지게 해주소서. 이것이 그동안 해왔던 기도인데 중국 공산정권이 망하라는 기도 대신에 핍박이 계속 되도록 기도를 하다니 생각도 못해본 기도제목이었습니다.

8. 중국 공산정권이 망하는 길, 그래서 기독교가 세력을 확장하는 길은 저의 어리석은 판단이었습니다. 중국교회가 핍박을 받을수록 더욱 믿음으로 강건한 교회가 되고, 그 가운데 피어난 신앙과 교회가 앞으로 중국선교가 확장될 때 번영신학이나 맘몬신학이 아닌 올바른 교회로 뿌리내릴수 있다는 시각... 그때의 기억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9. 그렇다고 중국 공산정권이 기독교를 더 핍박하도록 기도해라.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어떻게 움직이시는지,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로 한 사람들이 어떻게 걸어갔는지 제대로 보아야 합니다.

10. 예수의 가르침은 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썪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길은 한번도 경제적이거나 전략적이거나 과학적이거나 효율적이지 않았습니다. 열두 영의 천사들을 동원해 식민정부와 로마지배를 쓸어버리는 일이 가능했지만 그 길은 예수의 길이 아니었습니다.

11. 구체적인 길을 요구하며 그렇게 되도록 해달라는 기도는 잘 하지 못합니다. 내가 판단해서 최선으로 보이는 그 길이, 그렇게 합리적이고 효율적이고 가장 좋아보이는 길이지만 그걸 하나님께 조를만 한 용기가 저에게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길이 사실은 영적 죽음의 길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내눈에는 땅에 떨어져 썪어져버리는 길, 허망하고 의미없는 것으로 보이는 그 길이 어쩌면 정말 하나님의 길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12. 배우자를 위한 기도, 진로를 위한 기도처럼 개인의 문제 뿐만 아닙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를 위한 기도, 한국교회를 위한 기도, 세계선교를 위한 기도,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기도. 이 모든 기도에는 나의 정보수집 능력과 추론 능력과 판단능력과 내가 배운 것들과 미래를 전망하는 시각과 나의 선호도와 그 모든 것들이 함께 작용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남들이 다 최고로 인정하는 외모 좋고 성격 좋고 돈이 많은 어느 이성이, '나'에게는 최적의 배우자가 아닐 수 있습니다. "내"가 보기에 "우리가" 보기에 가장 좋은 것을 고집하는 것이 매우 어리석은 일이 될수도 있습니다. 중국공산당이 망하게 해달라는 기도와 공산당의 핍박속에서 참된 교회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 우리는 나름대로 노력하고 판단해서 전망하고 노력하지만 최선의 길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13. 한국교회를 보며 느끼는 안타까움은 종종 교회당이 우상시되고 주일대예배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고 성경을 주술서처럼 우상시한다는 점입니다. 종교개혁을 거쳤지만 아직도 목회자를 성도와 하나님 사이의 매개자로 그려내고 지역교회가 마치 하나님나라의 현현이자 전부인양 여긴다는 점입니다.

14. 친절한 금자씨라는 영화에 나오는 '너나 잘하세요'라는 대사가 있습니다. 사실, 한국교회의 목회자, 리더, 신학자들의 말에 도대체 누가 귀를 기울입니까? 그들의 성도들 뿐입니다. 그중에서도 듣는 척하지만 그건 '목사님 생각이세요'라고 생각하는 교인들도 많습니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목소리가 사회에 울림이 됩니까? 적합한 의견으로 받아들여집니까? 어느 대중매체에 보도라도 됩니까? 기껏해야 교단신문 같은 목사들 밖에 보지 않는 신문에나 나오는 수준입니다. 교회가 그들만의 리그가 된지 오래입니다.

15. 교회와 사회 사이에는 거대한 거리가 있습니다. 교회의 목소리는 지극히 부적절한 혹은 별로 의미없는, 그냥 일탈스러운 그런 수준의 목소리가 되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도대체 교회 리더들의 목소리가 한국사회에 어떤 정합성과 적절성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가 손해보지 않겠다는 의도를 담은 주장을 넘어, 어떤 희생과 미래를 전망하는 기대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까?

16. 그 이유는 바로 교회가 신학적 깊이와 고민을 담아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회성장에만 급급해서 몸집을 키우는데만 몰입하다 보니, 신천지 수준으로 목회자가 농담을 던져도 아멘이나 외치는 교인들을 키웠습니다. 복음의 사회적 차원을 담아내지 못하고 그저 개인이 축복받는 지극히 개인적 신앙으로 축소시켰습니다. 빛과 소금이 되기는 커녕, 바이러스처럼 암적 존재의 역할이 더 커졌습니다.

17. 교회가 무엇입니까? 니버의 그리스도와 문화에 나오듯 교회와 세상의 관계를 보는 견해는 많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변혁해야 한다는 관점도 있고 세상 속에서 나그네처럼 살아야 한다는 관점도 있습니다. 2천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이 고민을 왔습니다. 교단과 신학의 전통이나 배경에 따라 교회들은 다른 색깔들을 가질수 있습니다. 하나의 길만 옳다고 주장하려는 아닙니다.

18.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한국교회에 막중한 시대적 요구가 주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단지 주일예배를 몇 주 중단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쩌면 한국교회의 생존에 직결된 문제입니다.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지성)의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거룩하고 선하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살아가는 것이 로마서가 가르치는 영적 예배입니다. 그 예배를 위해 주일에 함께 모여드리는 예배가 필요한 것입니다. 반대로, 주일 공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로마서가 가르치는 영적 예배들 드린 것은 아닙니다.

19. 교회에서 모여서 드리는 예배가 쓸데 없다는 말이 아니라, 삶의 예배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삶의 예배에 대해서 도대체 교회는 어떻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적실성이 떨어지는 교회는 사회에서 유리되어 산속으로 들어갈 뿐입니다. 신천지와 개신교가 차이가 무엇이냐는 세상 사람들의 질문에 신학을 들이댈 때가 아닙니다. 삶으로 드러나는 복음의 능력이 없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20. 탁상논쟁, 방어논리, 의미없는 뻔한 주장들을 부활시키는 적실성의 부재를 넘어 목회자, 신학자 뿐 아니라 신앙을 추구하는 교인들의 깊은 고민과 대화 그리고 성숙이 나오길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