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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 사이언스플라자] - 여성과학자를 위하여

별아저씨의집 2012. 10. 23. 21:01

매일경제 [사이언스플라자] 10/17/2012


여성과학자를 위하여 


우종학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



3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 예일대학교 물리학과에서 정년이 보장된 정교수가 된 첫 여성은 나의 박사학위 지도교수였다. 여성이 처음으로 정교수가 된 시기가 20세기 초가 아니라 최근이라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백인 남성 중심으로 발전한 유럽ㆍ북미 과학계가 여성을 차별한 역사는 부끄럽게 남아 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입학을 불허하고 학회 회원 신청을 거절하며 대학 강단에 세우지 않는 일들은 물론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아직 갈 길은 멀다. 

올해 초 발표된 `2011년 여성과학기술인력 현황`을 보면 이공계 분야 대학이나 연구기관에 종사하는 여성 연구원 비율은 20%가량이다. 미국 상황도 비슷하다. 미국 연구재단 2011년 통계를 보면 이공계 분야 직업군에서 여성 비율은 30% 미만이다. 이공계 대학 교수는 우리나라나 미국이나 여성 비율이 약 20%다. 물론 이공계 내에서도 분야별 차이가 있다. 가령 생명과학 분야는 여성 과학자 비율이 절반 가까이 되지만 물리과학이나 공학 분야에서 여성 비율은 열 명 중 한두 명꼴로 매우 적다. 

지난 10여 년간 이공계 분야 여성 비율이 꾸준히 증가해 온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그러나 단순 비율을 넘어 내용을 살펴보면 질적 차이도 있다. 가령 이공계 분야 여성 연구자 비율이 20%지만 연구비를 받아 과제를 진행하는 연구책임자 가운데 여성 비율은 10% 미만이다. 또한 정규직에 대한 비정규직 비중은 남성보다 여성이 훨씬 높은 반면 보직을 맡은 간부급 연구자 비율은 남성에 비해 여성이 훨씬 낮다. 이러한 통계들은 여성 참여를 높이는 것뿐만 아니라 여성이 충분히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일이 중요함을 시사한다. 

법과 제도를 통한 성적 불평등 문제는 상당 부분 해결되어 왔지만 그 상처는 여전히 남아 있다. 여러 사회학 연구들은 동등한 조건일 때도 여성보다 남성이 더 높게 평가된다는 결과들을 공통적으로 보여준다. 이것은 남성이 우월한 위치를 차지했던 문화 속에서 여성보다 남성이 우월하다는 무의식적 기대가 자리 잡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령 어린 시절부터 남자 의사만 보고 자란 사람은 의사는 으레 남자라는 무의식의 기대가 있다. 불평등 역사는 법과 제도로 한 번에 치유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불평등을 경험해왔던 여성에게 오히려 기회균등 이상으로 더 많은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여성 과학자들 역할을 양적ㆍ질적으로 확대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은 가정과 육아 문제에 대한 사회적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아닐까. 가정과 육아 문제를 고민하는 많은 여성이 자발적으로 혹은 상황에 밀려 일을 그만둔다. 

특히 육아에 대한 사회적 대안과 배려 없이는 과학계뿐만 아니라 어느 분야에서도 보다 폭넓고 비중 있는 여성의 역할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2011년 통계를 보면 이공계 관련 대학이나 연구기관 중에서 출산 휴가와 배우자 출산 휴가, 육아휴직을 실시하는 곳은 많았지만 재택 근무나 탄력적 근무, 수유시설, 기관 내 보육시설, 보육 지원금 등 육아를 지원하는 기관은 10~20% 정도로 매우 낮은 편이었다. 아이를 기르는 일은 한두 해 만에 끝나지 않기 때문에 육아에 대한 장기적인 지원을 제도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두 아이를 훌륭히 키우는 엄마이기도 했던 내 지도교수는 어떻게 훌륭한 과학자가 될 수 있었을까? 분명한 것은 그녀가 과학자로서 맡은 일과 두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을 병행할 수 있도록 사회적 환경이 뒷받침됐다는 점이다. 여성과학자들에게 뛰어난 역할을 기대한다면 육아를 더 이상 개인의 짐으로만 남겨두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