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종학의 글과 칼럼

[217호 과학칼럼] 얇팍한 거룩의 이원론 (복음과상황 2008년 11월호)

별아저씨의집 2008. 10. 31. 09:33

우종학 (천문학박사, UCLA) solarcosmos@hanmail.net

“죄 많은 세상에 나가 살던 저희들을 오늘 이 거룩한 주일에 주님의 전에 불러주신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 자리에 임재하셔서 저희들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받아 주시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직장을 옮기면서 새로운 도시로 이사를 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 중의 하나는 교회를 정하는 것이다. 추천 받은 교회들을 중심으로 몇몇 한인 교회들을 둘러보았다. 오랜만에 한인 교회에 가면서 그동안 잊고 있던, 그러나 매우 익숙했던 면들을 새삼 보게 된다. 그 중 하나는 대표기도 시간에 들을 수 있는 대략 위와 같은 내용들이다. 한 주간 기도를 준비하신 분들의 열심과 정성을 폄하할 생각은 없으나 예배시간에 이런 기도를 들으면서 나는 내 지성의 밑바탕에서부터 꿈틀거리고 올라오는 딴지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바로 죄 많은 세상과 거룩한 교회, 죄짓는 평일과 거룩한 주일, 하나님의 임재 없는 허망한 일상과 하나님이 임재하는 거룩한 예배로 뚝딱 잘라내는 이원론이 그 바탕에 깔려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주일은 거룩하다. 예배도 거룩하다. 주님의 임재도 필요하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한다. 그러나 주일예배가 특별하다는 것은 우리의 일상이 특 별하다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특별할 뿐이다. 주일이 거룩하면 나머지 6일은 거룩하지 않은가? 교회 일은 중요하고 세상 일은 중요하지 않은가? 예배에는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일상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가? 그렇지 않다. 주일, 교회, 예배는 분명 구별되어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 그러나 6일, 세상, 일상도 또한 거룩해야 한다. 세상에서의 6일의 일상이 거룩하기는 훨씬 더  어렵다. 그것은 자신의 욕심에 따라 살아가도록 프로그램화 되어있는 세상의 흐름에 역행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뜻에 따라 살아가려는 진정한 의미의 거룩이다.

거룩의 뜻을 모르는 게 아니다 
 
거룩이라는 말은 구별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구별은 하드웨어가 아니라 소프트웨어에 적용된다. 이 컴퓨터는 나쁘고 저 컴퓨터는 좋다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에 깔린 프로그램이 어떤지를 묻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컴퓨터라도 바이러스가 깔려있으면 다른 컴퓨터까지 망쳐버리는 반면, 시끄럽게 잡음을 내는 구닥다리 컴퓨터라도 좋은 프로그램들이 깔려 있으면 얼마든지 유익한 구실을 해낸다. 교회와 세상을 성과 속으로 나누는 잘못된 이원론은 세계관 용어로 말한다면 방향(direction)이 아니라 구조(structure) 자체를 이원화하는 오류를 범한다. 세상이 악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굴러가는 방식, 그 방향이 악한 것이다. 같은 배라도 약탈에 이용되면 해적선이 되고 인명을 구해내면 구조선이 된다. 
 
로마서 12장에서 바울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거룩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우리의 삶을 영적 예배로 드리라고 명한다. 거룩한 예배는 주일 교회에서도 드려야 하지만, 오히려 세상에서, 우리 삶의 자리에서 6일 동안의 일상을 통해서 드려야 한다. 
 
누가 뭐 이런 원리를 모르겠는가? (모른다면 반성하시라.) 문제는 그것이 쉽지 않다는 데 있다. 죽고 죽이기의 경쟁사회에서 사업을 하는 사람이 경쟁자들과 다르게 (그러니까 거룩하게) 사업을 한다는 것이 어디 쉬운가? 죄다 부정을 저지르는 회사에서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나만 정직을 고집하는 것이 말처럼 쉬운가? 먹고살기 힘든 세상에서, 돈을 숭배하는 세상에서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먹을 것, 입을 것을 염려치 않고 사는 것이 가능한가? 다들 자신이 우상이 되어 높아지려는 세상에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이원론, 추하다
 
그래서 이원론이 활개를 친다. 세상에서 거룩해지기 힘드니까 교회 안으로 숨어버린다. 세상에서의 6일의 일상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포기하는 대신, 주일-교회-예배라는 울타리를 쳐놓고 거기서만 거룩하려 한다. 삶의 모든 영역을 거룩하게 구별해 드리기는 포기하고 말 그대로 썬데이 크리스천(sunday christian)으로 전락한다. 사실, 주일날 교회에 모여 거룩하게 예배드리는 것이 뭐가 그리 어려운가? 그것만큼 쉬운 거룩도 없어 보인다. 물론 그것조차 잘 안 되는 경우도 많다.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어 모였지만 서로 미워하고 화목하지 못하기에, 교회 안에서 어떻게 서로 사랑하고 섬길까 하는 것이 많은 설교들의 주요 메시지가 되어 버렸다. 가장 손쉬워 보이는 거룩도 쉽지 않아서 교회는 온갖 에너지를 거기에 다 써버린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거룩해져야 할 곳은 우리의 삶의 자리, 우리의 직장과 가정, 우리의 일상이다. 이렇게 물어보자. 우리는 교회를 섬겨야 하는가, 세상을 섬겨야 하는가? 하나님은 교회의 주인이신가, 세상의 주인이신가? 우리는 주일 하루의 삶을 드려야 하는가, 삶 전체를 드려야 하는가? 대답은 분명하다. 진정한 거룩을 포기하고 손쉬운 거룩 뒤로 숨어버리는 것, 이것이 바로 얄팍한 거룩으로 생색내는 이원론의 추함이다. 
 
그리스도인의 성숙을 판단하는 기준은 두 가지가 아닐까? 첫째는 주되심이다. 내 삶의 주인 자리를 그분께 내놓았는가 아니면 아직도 내가 주인인가. 예수를 삶의 주인으로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된다. 그러나 삶의 전 영역을 내어드리기 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둘째, 이원론의 극복이다. 성과 속을 구별하는 이원론을 극복하지 않으면 아무리 성장해도 반쪽짜리 그리스도인이 될 수밖에 없다. 주일-교회-예배만 거룩한 반쪽짜리. 그래서 세상에서 보내는 6일의 일상에서 얼마나 구별되게 살려고 노력하는지를 보면 그리스도인의 성숙을 알 수 있다. 
 
특별은총안에 하나님을 가두다

그러나 이원론의 문제는 한 사람이 세상에서 거룩해지는 차원을 넘어선다. 더 큰 문제는 하나님이 창조세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지혜(일반계시)와 창조세계를 축복하신 은혜(일반은총)를 무시하는 경향이다. 성경에 모든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신 특별은총에만 치우치는 것은 이원론을 확대재생산한다. 
 
가령, 대통령을 뽑는데 기독교인 후보가 불교인 후보보다 낫다고 생각한다면 왜일까? 구원받은 사람이니까,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는 사람이니까 대통령직을 더 잘 할 것이라고 판단했다면, 오직 그것이 기준이라면, 이것이 바로 일반계시와 일반은총을 무시하는 것이다. 대통령을 뽑으려면 대통령의 자질을 갖추었는지 어떠한 국가정책을 제시하는지를 보고 판단해야 한다. 물론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의 여부가 하나의 잣대가 될 수는 있다. 그러나 대통령의 적합성을 판단하는 기준은 정치적 기준이어야 한다. 그 기준은 우리가 버려야 할 세속적인 기준이 아니라, 일반계시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반영한다. 불교인 후보에게도 훌륭하게 대통령직을 수행할 자질을 하나님이 주실 수 있다는 일반 은총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때마다 기독교 정당들이 출현한다. 기독교인들이 모여서 정당을 만들어 정치를 하면 더 잘할까? 왜 그럴 거라고 생각할까? 성경을 진리로 생각하는 특별은총을 입은 사람들이라 그럴까? 이것이 바로 이원론이다. 정당정치의 원리에 입각해서 차분히 준비한 사람들보다 특별은총을 입은 기독교인들이 더 정치를 잘할 거라고 판단한다면 분명한 이원론이다. 물론 성경적 가치를 가지고 정당을 만들어 새로운 정치를 펼쳐볼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기독교 정당이라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그 정당이 표방하는 정치의 내용을 가지고 판단해야 한다. 
 
생명이 걸린 수술을 해야 하는데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해서 최고의 외과 의사를 외면할 것인가? 그 대신 기독교인이지만 경험 없는 초짜 의사를 선택할 것인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찾아내는 의학의 발견들, 그 일반계시를 통해 훈련된 좋은 의사를 선택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왜 사회의 각 영역에서는 그런 선택이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왜 기독교인들은 철저한 이원론에 빠져 꼼짝을 않는 것일까? 왜 하나님을 특별은총과 특별계시 안에만 가두어 놓고 그 울타리 안의 규약들을 세상에까지 강요하는 것일까?

얄팍한 이원론이 창조과학에도
 
과학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창조주라면 그리고 창조세계를 (전부는 아니라고 해도)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드셨다면, 자연적 방법론에 기초하여 연구하는 과학은 하나님의 일반은총의 축복을 받은 학문이다. 과학이 밝혀내는 내용들은 모두 하나님의 진리일 수 있다. 물론 과학이 무신론자들에게 악용되는 것은 우려해야 한다. 그 한계를 모르고 유일한 진리의 길인 양 과학을 신격화하는 공격적인 무신론자들도 주의해야 한다. 그러나 과학 자체를 적시하는 것, 과학이 사용하는 방법론적 자연주의(methodological naturalism)를 공격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반계시와 일반은총을 무시하는 셈이다. 변덕스런 그리스신화의 신들처럼 자연현상에 끊임없이 간섭하는 대신, 하나님은 처음 부여한 원리대로 움직이도록 자연현상을 만드셨을 거라고 가정하는 것, 그래서 그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인과관계를 찾는 것이 방법론적 자연주의이다. 도대체 그것이 왜 잘못되었단 말일까? 정치가 잘못되었으니 기독교 정당이 나와야 한다는 논리나, 방법론적 자연주의에 물든 과학이 잘못되었으니 새로운 과학이 나와야 한다는 창조과학이나 지적설계론의 주장은 일반은총과 일반계시를 무시하는 같은 맥락의 오류를 범한다. 
 
지구연대 문제로 논쟁이 일고 있다. 한국창조과학회는 지구의 나이가 6천 년이라는 공식입장을 재확인했다. 지구연대 문제는 전혀 과학의 문제가 아니다. 지구의 나이가 6천 년 보다 훨씬 오래되었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의심할 근거는 거의 없다. 일반은총을 입고 일반계시를 밝혀내는 과학자들(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간에)의 결론이 특별계시와 모순된다는 창조과학자들의 공격에는 결국 이원론의 문제가 깔려있다. 문제는 성경이 과연 지구의 나이가 6천 년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성경 신학의 문제이다. 신학자들에게 물어보라. 많은 복음주의자들조차도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지구의 연대는 더 이상 과학적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신학적 문제다. 다양한 해석 중에 어떤 것이 더 타당한지, 신학자들이 다루어 주어야 한다. 십 여 년 전과 다르게 한국에도, 지구의 나이가 6천 년이라는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는 신학자들이 많아지는 것은 바람직하다. 잘못된 성경해석을 고쳐주어야 할 의무는 결국 신학자들에게 있다. 지구의 연대가 더 이상 과학적으로 논란거리가 아니라는 것도 크리스천 과학자들이 말해 주어야 한다. 창조과학회가 지구나이 6천 년이라는 입장을 어떻게 공식화했는지 모르겠다. 내 생각에는 창조과학회에서 회원들에게 투표를 하게 하거나 최소한 설문조사를 해 보았으면 좋겠다. 그들이 학문적 양심과 명예를 걸고 과연 지구 나이 6천 년을 지지할 수 있는지 물어보자. 
 
이원론처럼 무서운 사탄의 전략은 없다. C. S. 루이스가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지적하듯 아무 문제없이 그저 평범하게 교회만 잘 다니게 하는 것 보다 더 좋은 유혹은 없다. 하나님의 주권을 좁은 교회 영역 안으로 가두어 두는 것보다 더 뛰어난 전략은 없다. 얄팍한 거룩 뒤로 숨어버린 크리스천들은 더 이상 세상에서 거룩하지 않다. 그 대신 세상은 교회가 외쳐야 할 정의와 사랑의 목소리에 굶주려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려면 우리가 세상에서 거룩해져야 한다. 얄팍한 거룩의 이원론에서 벗어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