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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넨베르크 [자연의 신학] 7장 영과정신

별아저씨의집 2018. 9. 26. 13:17

판넨베르크의 [자연의 신학] 7개의 논문 중에 마지막 두 논문을 읽으면서 오늘도 영감과 은혜를 받습니다. 7장에 등장하는 영과 정신의 관계는 매우 오래된 철학과 신학의 주제입니다. 물론 이 문제는 정신과 몸의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지요.


일상적인 의미에서 영이라는 말은 물질이 아닌 어떤 것으로 플라톤적인 개념으로 많이 사용됩니다. 유령 같은 것들이 그 예입니다. 종교적인 맥락에서도 특히 기독교 교회들도 영은 토속종교의 귀신 같은 개념, 혹은 여전히 플라톤적 개념으로 몸과 분리된 어떤 고스트 같은 것으로 일상적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판넨베르크는 아우구스타누스 이후로 영은 정신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지적합니다. 로크는 사유나 의지, 사고 등의 개념을 묶어서 비물질적인 영혼을 하나의 실체(substance)로 표현했지만 그 개념은 사실 정신이라는 개념과 등가입니다.


판넨베르크의 관심은 영을 단지 인간의 정신 정도로만 보는데서 그치지 않고 보다 광범위하게 확장하는데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대비되는 아퀴나스는 자연의 사물들의 물리적 운동에 적용되는 보다 광범위한 영혼 개념을 언급하고 있고, 이는 영이 생기를 부여하여 생명이 생긴다는 생기론에도 반영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물론 헤겔 이후에는 영의 개념이 다시금 인간의 정신이라는 개념으로 축소되어 버렸지만 말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영의 개념을 인간의 정신이라는 뜻으로 제한하지 않고 광위의 개념으로 사용합니다. 자연을 움직이는 주체로 (자연법칙을 집행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영이 묘사됩니다. 특히 창세기 2장 7절에 나오는 인간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니 생령이 되었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영을 생명의 원리나 원천으로 볼 수 있게 합니다.


(인간의 정신의 출현에 관해서도 판넨베르크는 정신이 언어를 통해서 창발되었다는 관점을 택한 후에, 그렇다면 언어는 정신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없으며 그대신 언어의 형성이 이루어지는 장을 영적 장이라고 기술합니다. 물리적 실재와는 다른 우선되는 기원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영에 귀결시킵니다)


이 부분에서 마크 해리스가, 성령은 무질서로 회귀하려는 피조세계를 질서의 영역에 남아있도록 내재적으로 역사한다고 표현한 것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에스겔 37장에 나오는 것처럼 마른 뼈들을 군대로 만드는 생명의 원천이면서 자연을 운행하는 집행자입니다.


아인슈타인의 질문처럼 우리 인간이 우주를 이해한다는 사실만큼 이해하기 어려운 수수께끼도 없습니다. 감각을 통해서 우리 인간은 자연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데이타)를 얻고 그 데이트를 재구성해서 자연을 이해하고 우주의 운행을 파악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우리의 감각에 제한된 그 정보들이 자연이라는 실재를 어느정도 (그러니까 과학기술문명을 이룰정도로 유용하게) 드러내는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인지하고 파악하는지는 쉽게 답할 수 없는 인식론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판넨베르크의 관점에서는 이 질문에 대한 힌트가 보입니다. 첫째는 성서가 증언하듯이 인간의 정신 (혹은 영)의 기원이 바로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영은 창조세계의 모든 사물에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정신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영은 모든 창조물들과 공유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영에 참여함으로서 하나님의 영에 의해 운행되고 집행되는 사물들의 본성을 파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내용은 하나님을 대리해서 창조세계를 보존하고 다스릴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품이 반영되어 질서있게 운행되는 코스모스의 우주를 우리 인간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과.도.기.에 설명한 내용과 일관되면서도 보다 철학적인 사유의 깊이로 끌어줍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의 정신활동은 자연세계의 존재와 운행과 공명합니다. 바로 둘다 하나님의 영이 공유되기 때문인 것이죠. 결국 인간이 자기를 초월하고 하나님의 영으로 창조된 전체 창조세계로 통합되는 과정이 바로 구속사와 병행하는 자연사의 과정일 수 있겠습니다.


자기초월적인 통합성, 자신의 생명의 한계, 시간의 한계, 공간의 제약, 인삭의 한계, 경험의 제약을 넘어 창조세계 전체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묻고 그 의미를 파악하고 살아내는 방식, 그것이 어쩌면 우리가 추구해야할 진정한 인간의 의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판넨베르크는 성서의 전통에서 등장하는 악한 영의 개념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바로 자기중심섬이 우리 정신을 지배하는 경우입니다. 그러면 자기초월적 활동이 제약되고 더이상 전체 창조세계와 통합되지 못한 채, 인간의 정신은 자기중심성으로 인해 분열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하나님의 영이 주는 호흡을 통해 생명을 유지하며 살아있을 수 있지만 그러나 자기중심성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이 일하시는 그 역동성에는 참여할 수 없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악한 영, 혹은 악에 대한 설명입니다.


나를 초월하여 창조세계라는 전체성에 통합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분명한 것은 자기중심성의 극복이라는 실천적 과제입니다. 판넨베르크는 신학적, 철학적, 과학적 사유에 그치지 않고 보다 실천적 차원의 문제들을 놓치지 않고 있는 듯한 느낌이라 은혜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자연에 대한 이해는 결국 우리 인간의 삶의 방향에 영향을 줄 수 밖에 없는 매우 실천적인 의미심장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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