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고민하다/독서모임

[독서모임] 네가지 사랑 - 루이스 1장 들어가는 말.

별아저씨의집 2008. 10. 12. 09:05
네가지 사랑 - 루이스 

1장 들어가는 말. 

루이스는 사랑을 두가지로 구별한다. 하나는 흔히 주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선물의 사랑 (gift-love)'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사랑받고자 하는 '필요의 사랑 (need-love)' 이다. 선물의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과 가장 가깝다. 반면 필요의 사랑은 하나님에 대해 우리가 하는 사랑이다.

루이스는 선물의 사랑을 높이고 필요의 사랑을 비판하는 방식으로 글을 쓰려했지만 그렇지 않음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필요의 사랑도 단지 사랑받고자 하는 갈망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실제 사랑이기 때문이다. 필요의 사랑은 단지 이기심이 아니다. 엄마 품에 달려가는 아이나 우정을 갈망하는 어른들을 이기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나쁜 증상이다. 더군다나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필요의 사랑일 수 밖에 없다.

인간의 필요의 사랑의 최대치는 인간이 가장 하나님과 유사하지 않을 때, 그러니까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에 비해 가장 많은 필요를 느낄 때, 드러난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과 가장 유사하지 않을 때 오히려 그분께 가장 가까이 다가간다.

하나님과 가깝다라고 할 때 두가지 면이 있다. 하나는 그 분과 닮았다는 의미에서 유사성으로서의 가까움이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자 하는 접근으로서의 가까움이다. 이 두가지는 꼭 일치하지는 않는데 유사성은 이미 주어진 것일 수 있지만 접근으로서의 가까움은 우리의 의지를 필요로 한다.

루이스는 '사랑은 신이기를 그칠 때 비로소 악마이기를 그친다'라는 말을 인용한다. 인간의 모든 사랑은 그 최고의 정점에서 모종의 신적 권위를 주장한다. 마치 신의 음성처럼 다른 것들을 다 무시하고 전적 헌신을 요구한다. 에로스나 애국심 같은 것들에서 그런 면모를 쉽게 볼 수 있다. 오직 하나님께 드려야 할 무조건적 헌신을 인간적 사랑 (그러니까 신의 사랑에 가장 가까운 어떤 선물의 사랑)에 바친다면 그 사랑은 신이 될 것이고 그리고 악마가 될 것이다. 신의 자리를 허락받은 그 사랑은 사랑으로 남아 있을 수 없고 우리를 파멸할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사랑을 우상으로 숭배해서도 반대로 깎아내려서도 안된다.

생각할 문제

1. 필요의 사랑에 대한 루이스의 깨달음에 동의하는가? 

2. 사랑이 신의 자리를 요구하는 예, 경험을 들어보자.

3. 접근으로서 하나님과 가까와짐과 유사성으로서 하나님과 가까와짐의 역학관계를 생각해 보자. 두 가까와짐이 어떻게 연관되는지 따져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