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고민하다/손가락 가는 대로

카더라 통신의 비애

별아저씨의집 2015. 8. 8. 21:00

카더라 통신의 비애

결혼 직후 1-2년, 어디서 듣고 온 이야기를 그대로 전달하던 아내에게, 누가 어디서 한 이야기냐며 레퍼런스를 물어보곤 했습니다. 당황하셨을 아내는 의심의 눈초리로 근거를 따지는 내 질문에 말문이 막히곤 했습니다. (물론 이 대화법은 아내와 남편의 바람직한 대화법은 아닐 듯 합니다 ^^) 그 이후로는 정확히 확인된 얘기가 아니면 진실일 가능성이 확인된 바 없음을 넌지시 비추면서 얘기하곤 합니다. 

세월호 피해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한번도 귀기울여 본 적이 없으면서 그저 들리는 소문만 듣고 보상금에 눈이 멀었다는 둥,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없다는 둥, 까칠하게 구는 사람들을 보면서 많은 분들이 카더라 통신의 파워를 일년도 넘게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정부를 비판하면 종북으로 몰거나 교회를 비판하면 이단으로 모는 그런 숱한 이야기들에 담긴 어떤 한계와 좌절스러움은 답답함을 넘어 모종의 비애를 자아냅니다. 결국 카더라 통신을 당해낼 수 없는건가. 죽.는.건.가...

"창조과학을 비판하는 과학이 교만하다고?" 라는 글을 담벼락 노트에 올렸더니 또 하나의 카더라 통신 이야기가 댓글로 달렸습니다. 어떤 페친이 제 글에 좋아요를 눌렀는데 그걸 본 그분의 페친이 저를 가리켜 '그분 무신론자라던데..?'라는 메세지를 보냈다는군요. 그래서 남들한테 들은 얘기 말고 제 글을 직접 읽은 적이 있냐고 물었더니, 그런건 아니라고 했다는군요.

그렇습니다. 그분의 이야기는 진실일 것입니다. 그 내용은 누가 저를 무신론자라고 했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들은 얘기일 테니까요. 문제는 들은 얘기를 그냥 믿는데 있다고나 할까요. 뭐, 물론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셈일테니까요. 

여기서 두 가지 문제를 꼽아보자면, 첫째, 그저 들은 얘기를, 잘 살펴보지도 않고 다시 남에게 전달하는 태도입니다. 개연성이 있는 얘기인지 근거가 있는 얘기인지 알아볼 시간이 없다면, 카더라 통신이라는 점을 기억하고 아닐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대로 남에게 전달한다면 카더라통신의 무한한 발전을 위해 한몫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처음 그 이야기를 퍼트린 사람의 원죄입니다. 한 사람이 범죄하였으매 모든 사람이 죄의 영향아래 놓이는 것이죠. 모든 카더라 통신의 근원에는 의도적으로 사실을 왜곡하는 원저자가 있거나, 다양한 (특히 어느 특정 부분의) 신체제약 때문에 상황파악과 판단이 잘 안되어서 오판한 원저자가 있습니다. 사실, 많은 경우 카더라 통신을 악용하는 사람들은 사실관계를 왜곡하는 질이 나쁜 사람들입니다. 

카더라 통신은 선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기도 하고, 힘없는 학생을 왕따시키기도 하고,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사람들을 종북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근거없는 의학지식을 퍼뜨려 많은 사람들의 건강을 악화시키기도 하고 카더라 통신을 믿은 사람들이 사회비용을 치르게도 합니다. 

뿐만아니라, 창조과학을 비판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으로 만들기도 하고, 여호수아서에 나오는 해와 달이 멈춘 기적을 나사가 증명했다는 찌라시를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물론 모든 국민이 다 지적으로 충만해져서 모든 수다거리의 근거와 참고문헌을 찾고 100분 토론 하듯 대화할 수는 없습니다. 비판적 사고가 가능한 사람들은 결국 통계적으로 보면 일부 사람들로 제한될 수 밖에 없을테니까요. 

중요한 것은 카더라 통신을 걸러내는 자정능력이겠습니다. 새벽기도한다고 카더라 통신이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침묵하는 당신으로 인해 혹은 카더라통신을 그대로 전달하는 당신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페북과 블로그에도 정보가 넘쳐납니다. 얼핏 봐도 의심이 가는 많은 이야기들이 담벼락에 수없이 오릅니다. 이런 시대에는 카더라 통신의 양적 공격에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부족하나마 카더라 통신을 걸러내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그것이 인애와 공평으로 다스려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조금이라도 당겨지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일수도 있습니다.